(1편 청산리전투를 이끈 백포 서일은 ‘표지판’에 없었다!(클릭) )

(2편 풀만 무성한 독립유적지, 서일기념비는 어디에?(클릭) )

(3편 연변조선족의 시조 ‘웅녀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클릭) )

 

 답사팀은 항일무장투쟁의 살아있는 역사현장, 밀산을 떠나 마지막으로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던 <숙신(肅愼)> 유적지로 향했다.

책에서만 보았던 이름, 숙신!

▲ 흑룡강성 쌍압산 우의박물관에 있는 숙신과 읍루 설명문 중 일부

그 숙신의 또 다른 이름인 <읍루(挹婁)>의 옛 땅을 직접 밟아 본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며 천 리 이상을 쉬지 않고 차로 이동했다. 이곳은 최근 중국 정부가 발굴한 역사유적지로서 고조선과 매우 연관이 깊은 곳으로 판단되는 곳이다.

중국이 설치한 안내표지판에 따르면 읍루지역을 발굴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중국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10년이 안 된다고 한다. 중국은 이 지역을 발굴하면서 이 지역이 중국 한나라 시대에 <읍루>라는 나라 이름으로 존재했다고 발표했다. 그 읍루는 상고시대에 숙신이라는 나라로 존재했다고 중국박물관 안내문은 설명하고 있다. 

 <숙신>과 <읍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위서 논란이 있지만 『환단고기』에도 수십 군데에 나타나고 있다. 나아가 중국의 사서에도 <숙신>과 <읍루>가 등장한다.

예를 들면, 『위략』에는 ‘挹婁一名肅愼氏'(읍루일명 숙신씨)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는 ’挹婁在夫餘東北千餘里濱大海南與北沃沮‘(읍루재부여동북천여리빈대해남여북옥저)라는 기록이 있다.

특히 『후한서』「동이열전」에는 `挹婁古之肅愼氏之國也在夫餘東北千與里東濱大海南與北沃沮接不知其北所極土地多山險' (읍루고지숙신씨지국야재부여동북천여리동빈대해남여북옥저접불지기북소극토지다산험)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추정되는 숙신이다. 읍루의 옛 영토다.

이 기록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읍루의 옛 이름은 숙신이다. 부여 동북쪽 천여 리에 있으며 동쪽 큰 바다와 가깝다. 북옥저와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끝을 알 수 없으며 험한 산이 많다‘

읍루가 『후한서』「동이열전」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국은 우리의 직계 조상들을 동이東夷라고 표현했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상식이다. 따라서 읍루가 중국의 『후한서』「동이열전」에 기록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읍루가 동이東夷의 한 부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사진은 흑룡강성 쌍압선에 위치한 우의박물관에 전시된 읍루와 관련한 안내문이다.

이 기록을 보면 읍루의 옛 이름은 숙신이며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 - 여진 - 만주 - 만족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되어 있다.

▲ 북만주 흑룡강성 쌍압산 우의현 칠성하 포태산 부근의 읍루 역사 유적지

주목할 부분은 읍루가 발해(대진국)를 세운 중요 부족 중의 하나인 말갈이라는 것이다. 말갈은 발해뿐만이 아니라 고구려의 기층민족이었다.

말갈 즉, 읍루의 성곽과 그들이 천제를 지낸 것으로 추정되는 칠성단이 최근 발견된 것이다.

시종 설레는 마음으로 유적지로 향했다. 읍루유적지를 가는 길은 예상보다 훨씬 멀었다. 여러 사서史書에서 읍루는 부여에서 60일을 가야 한다는 등, 부여로부터 천여 리가 떨어졌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북만주의 평야를 승용차로 쉬지 않고 7~8시간을 달렸다. 그리고 드디어 읍루의 유적지에 도착했다. 유적지에는 중국이 세워놓은 안내문과 조형물레 읍루라는 글씨가 한자로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유적지에는 성곽이 일부 남아 있고 성곽을 둘러싼 해자일부도 눈에 띄였다. 안내문에는 A.D 3세기경에 존재했던 나라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박물관 기록에는 한나라 말기부터 진나라까지 존재했다고 되어 있는데 한나라가 A.D 220년에 망했으므로 안내문의 설명은 비교적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는 고구려 초ㆍ중기다.

▲ 칠성단이라는 이름의 읍루국 천제단.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매우 양호하게 남아있다. 맨 위에 7개의 구멍이 있다.

북만주에서 고구려와는 별개의 국가로 수백 년간 존재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광대한 단군의 나라가 수많은 제후국으로 분열되었다는 일부 사서 기록의 신빙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읍루는 고조선 시기에는 고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던 제후국이었다. 그 당시에는 숙신이라는 나라로 존재하다가 고조선이 망하면서 읍루라는 국가로 다시 자립해서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칠성단이다.

고조선 즉 동이의 문화를 갖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바로 칠성단이다. 성곽유적지에서 약 1 km 정도 떨어진 곳에 천제단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있었는데 이름이 칠성단이었다. 사방이 트인 곳에 약 100여 미터 높이 쌓아올린 제단 맨 위에 7개의 구멍(穴) 이 있는데 바로 지금의 우리나라 칠성신앙과 딱 맞아 떨어지는 유적지였다.

칠성단 정북 쪽에 왕성유적지가 있고 정남향 방향으로 완달산이 보였다. 일명 포태산고성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었다. 칠성단 주위로는 칠성하(七星河)라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 칠성단 앞 안내문에서 기념촬영 한 임찬경 박사. 그는 답사팀에게 귀중한 역사탐험 기회를 주었다.

지금도 우리나라 풍속에 사람이 죽으면 사용하는 관의 밑바닥을 칠성판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들이 장독대위에 정한수를 떠놓고 북두칠성님에게 빈다. 우리의 영혼이 북두칠성에서 왔다는 전통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수명)을 관장하는 신이 북두칠성신이라는 전통적 고대 민간신앙이 수천 년 전부터 내려왔음을 읍루의 유적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 지내는 천제문화가 수천 년 동안 내려오던 우리의 소중한 문화요, 전통신앙이었음을 칠성단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답사였다. 

끝으로 해박한 지식과 다양한 경험으로 소중한 역사탐방의 기회를 주신 임찬경 박사(국학연구소)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정리=윤한주 기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