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북한 조선출판물교류협회에서 1999년도에 발행한 책 한 권을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내가 단군과 고조선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아는 지인이 건네 준 것이다. 책 제목도 범상치 않았다. 『조선민족의 원시조 단군』이라는 책이었다. 책 첫 머리에는 민족의 원시조를 찾아주고 단군릉을 개건한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 책이 북한에서 발행되었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 했다.
사실 이 책에서 받은 깊은 인상은 다음의 내용이었다.

"단군은 일찍부터 조선 사람들 속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고조선의 건국시조" 이고, "단군은 실제로 생존하였던 고조선의 첫 임금이며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역사 인식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1993년도에 북한에서 발굴했다는 평양시 강동군의 단군릉은 사실인가? 북한에서는 단군릉에서 출토된 두 사람 분의 뼈들을 연대 측정한 결과 1993년을 기준으로 5011±267년 전이었다고 발표했다. 뼈 중 한 사람은 단군의 뼈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단군의 아내 뼈라고 하였다.
당시 남한 학자들의 견해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국가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유적이나 유물을 조작하는 사례는 심심찮게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의 구석기 시대 유물 조작이다. 하지만 단군릉의 경우는 이러한 조작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먼저 인골이 발굴되었다는 무덤은 과거부터 민간에서 단군릉이라고 전해져 왔던 곳으로, 조선시대 지리서인 중종 때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 등 문헌 기록에 남아 있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성종 때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의 증보판으로 중종 때 나온 지리서이다. 이 책  55권 중 제55권 「평안도 강동현」기록에 따르면,

"동쪽은 성천부 경계까지 5리, 북쪽은 동부 경계까지 32리, 자산군 경계까지 44 리, 남쪽은 삼등현 경계까지 8리, 상원군 경계까지 46리, 서쪽은 평양부 경계까 지 39리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8리이다. .....(중간생략).... 대총 하나는 현의 서쪽으로 3리에 있으며 둘레 4백 10척으로 속담에 단군묘라 전한다."
 

라고 해서 강동현에는 4백 10척의 대형 무덤이 있는데, 이것은 예로부터 단군릉으로 일컫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정조」22권, 10년 1 번째 기사에 따르면,

"승지 서형수가 아뢰기를, “단군은 우리 동방의 맨 먼저 나온 성인으로서 역사에 편발 개수의 제도를 제정하였다고 일컫고 있습니다. .....(중간생략)..... 그런데 신 이 강동에 벼슬할 때에 보았는데, 고을 서쪽 3리쯤 되는 곳에 둘레가 4백 10척 쯤 되는 무덤이 있었습니다. 옛 노인들이 서로 단군의 묘소라고 전하고 있었으 며, 유형원의 『여지지』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막론하 고 어떻게 황폐해지도록 놔두고 사람들이 마음대로 땔나무를 하거나 소와 말을 먹이도록 놔둘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자 정조는 단군의 묘소를 수리하고 무덤을 수호할 호구를 두게 하였다. ”

만약 북한에서 발굴한 것이 단군릉이 맞고, 출토된 두 사람의 뼈들 중 한 사람의 뼈가 단군의 뼈가 확실하다면 단군에 대한 기존 정보에 혼란을 초래할 것은 분명했다. 그 동안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동국통감』 등의 기록에 따라 기원전 2333년으로 보았다. 그런데 단군으로 추정되는 뼈에 대한 연대 측정 결과를 그대로 믿는다면 최소한 기원전 3000년 전에 태어난 사람으로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고조선의 건국 연대보다 훨씬 더 올라가게 될 것이다.
만약 북한에서 조작했다면 조작에 따른 논란의 여지를 미리 없앴을 것이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를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는 것은 조작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연대 측정의 오류는 생각해 볼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 연대 측정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인데, 북한은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전자상자성공명법'을 사용하였다. 북한이 채택한 ‘전자상자성공명법’은 198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고고학ㆍ지질학 및 지리학 분야에 적용되기 시작한 최신 측정법으로 수만 년 전의 유물뿐만 아니라 연대에 관계없이 쓸 수 있는 방식이고 탄소측정법 등과 달리 유, 무기물을 모두 실험대상으로 할 수 있으며 특히 적은 시료의 양으로도 충분히 실험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잘은 몰라도 ‘전자상자성공명법’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널리 써오는 믿을 수 있는 측정법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북한 단군릉의 발굴에 대한 우리 학계의 평가 시각은 단군릉의 발굴 사실과 수습된 유물을 통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는 인정되나 이를 단군과 연결지어 해석하는 것은 첫째, 연대 문제, 둘째, 지리적 문제, 셋째, 무덤의 형식이 고구려 하대의 무덤이라는 점, 넷째, 출토 유물의 문제, 다섯째, 단군의 실존 여부 문제 등이 있다는 이유로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단군릉 발굴이 학문적 목적보다는 정통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단군릉에서 발견된 유골이 단군이 아닐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 이유는 첫째, 단군릉이 실재하기보다는 후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고구려 무덤 양식에서 단군의 뼈가 나올 수 있는가이다. 셋째, 인골의 연대 측정 방법이나 측정결과가 산출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북한의 단군릉에서 발견된 인골의 연대 측정 결과에 다음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단군릉의 인골 연대 측정 결과의 조작, 둘째, 연대 측정 결과 5011±267년 전 이라는 수치에 오차가 있다. 셋째, 북한의 주장대로 라면 출토된 뼈가 단군의 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북한 단군릉에서 발굴된 인골에 대한 논쟁을 검토해 보면 국내 학계에서 제기한 반론들은 국제연구동향과 북한의 연구논문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나온 것이었다. 북한에서 단군릉을 발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군은 역사적 인물이라고 하는 학자들과 단군은 신화적인 인물이라는 학자들 간의 논쟁이 격렬해지자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단군릉을 발굴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인골이 발굴된 것이다.
단군릉에서 발굴된 인골을 두고 논쟁이 끝나지 않는 것은 단군 및 고조선에 대한 역사인식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조선 중종 때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단군릉이라고 한 바로 그 무덤에서 5000년 전의 인골이 나왔다면 진위 여부를 떠나서 관심을 가질만한 일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 왕검의 인골인지, 그리고 그것이 맞는다면 한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할 것은 단군릉과 인골의 진위여부 보다는 왜 예로부터 평양시 강동군에 위치한 대형 무덤을 단군릉으로 믿어 왔느냐 일 것이다. 북한의 단군릉 발굴 결과에 대해서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갖고 관련 자료 수집과 논리적인 근거 제시를 통한 반론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면 단군릉에 가고 싶다. 특히 5000년 전의 인골 앞에서 무슨 상상이 가능할까? 남ㆍ북한 청소년들이 단군릉 앞에 모여 민족의 뿌리 역사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우리 민족이 공유할 수 있고, 공유해야만 하는 우리 역사의 첫 출발점이고 출발점이 있어야 목적지도 보이는 법이다. 북한의 단군릉을 통한 북한의 고조선 인식을 파악하기 이전에 우리들의 역사인식을 먼저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단기 4346년 7월 9일

 

기고=민성욱 국학박사, 학교법인 한문화 운영팀장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졸업

국학박사(논문 '한국사에서 말갈 인식에 관한 연구')

학교법인 한문화학원 법인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