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과 고조선관련 해서 대개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가 없다고들 한다. 그래서 신화니 사화니 운운한다. 그렇다면 과연 당대 기록이 없었는가. 조선이라는 국호가 처음 나오는 사서는 『관자』인데, 『관자』는 중국 전국시대 후기 제가백가의 논문집을 말하는 것으로 제나라 관중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단군이 처음 나오는 국내 사서로는 우리가 잘 아는『삼국유사』가 있다.
그런데,『관자』가 기원전 7세기경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 고조선의 건국시기도 기원전 7세기경 전후로 보아야 된다는 억측을 부리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관자』의 조선관련 기록 중에 기원전 7세기경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관자』권23 규도 편과 경중갑 편에 나오는 조선관련 기록에 따르면,

"제 환공이 관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나는 이 세상에 일곱 군데의 보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관해 알고 있습니까? 관자가 대답했다. 첫 번째 보물은 음산에 있는 보석이요, 두 번째 보물은 연의 자산에 있 는 은이요, 세 번째 보물은 발ㆍ조선의 반점이 박힌 짐승 가죽 입니다."

그저 조선의 특산물을 소개하는 내용이므로, 그 건국시기를 알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지만 조선이라는 국호가 처음 등장하는 기록임에는 틀림없다. 이제 단군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국내사서인 『삼국유사』의 기록은 어떠한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삼국유사』권 제1 「기이」제1 고조선 왕검조선에 나오는 단군 관련 기록에 따르면,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 왕이 있어 아사 달에 도읍을 정하였다. 『경』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한 백악이 라고도 하니 백주의 땅에 있다. 혹은 개성의 동쪽에 있다고 하니 지금 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이라 했으니 고(高-요임 금)와 같은 시대이다."

여기서 고는 고려 정종의 휘(諱)인 요(堯)를 피하기 위해 고(高)자를 쓴 것이다. 그 외에도 단군 및 고조선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산해경』등과 같은 중국사서와 『삼국사기』『삼국유사』등과 같은 국내사서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그야말로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의 역사서 이다. 언뜻 보기에는 단군과 고조선관련 기록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역사서가 그렇듯이 행간과 자간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사실 기록 이면에는 숨은 뜻이 있다. 그것까지 읽어낼 수 있다면 역사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삼국사기』를 읽으면 곳곳에 단군과 고조선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기록이 「고구려본기」동천왕 21년조의 기록으로,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왕험에 가서 도읍하였 다고 하였다."

여기서 평양은 오늘날 평양과는 다르다. 그 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조선의 도읍지인 아사달과 연관이 있고, 아사달의 아사는 고대어로 넓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아사달은 평양이 되는 것이다. 고조선의 도읍지인 아사달과 고구려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은 같은 곳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본기」권 제20 영양왕 21년 기록에 따르면,

"11년(600) 봄 정월에 사신을 수(隋)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대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옛 역사를 요약하여 『신집』5권을 만들었다. 나라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기 록하여 이름을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깎고 고친 것 이다."

사서의 편찬은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나라가 막 등장했던 시기이고, 강력한 제국인 수나라와 맞서기 위해서는 고구려는 내부결속이 반드시 필요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신집』5권으로 고구려 이전의 역사인 고조선의 역사를 요약 정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유기』는 오래된 기록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역사서라는 뜻을 갖고 있어 고조선과 고조선 이후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여러 나라의 성장과정도 함께 수록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환단고기』「단군세기」에는 3세 단군 갸륵에 대한 기록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3세 단군인 갸륵 단군이 신지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하게 했다."고 적혀 있다.

어쩌면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배달유기』는 고조선 이전의 역사인 배달국의 역사서이고, 『유기』는 고조선과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고구려의 역사서인 것이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국가가 고구려이고, 그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고구려에서도 고조선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으로 내부 결속을 강화하였고, 고구려를 계승하고자 했던 대조영은 건국 초기에 그의 동생 대야발을 시켜 고조선의 역사서를 편찬케 하였다. 고구려를 계승하고자 했다면 분명 고구려의 역사서를 편찬케 하는 것이 통상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고조선의 역사서를 편찬케 한 것은 그 만큼 뿌리 역사를 중요시 하였고, 강조하였던 것으로 이해가 된다. 고구려 대학박사 이문진과 대야발이 참조하였던 『유기』와 같은 고조선관련 역사서가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 『사기』가 있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유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조선의 정통 역사서인 『유기』는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대다수가 없어졌고, 일부만 대진국으로 넘어가 『단기고사』를 편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고조선 당대의 역사서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존재했지만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와 대진국이 멸망하면서 함께 없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내용들이 『삼국사기』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단군 및 고조선과 관련된 기록들이 많이 소실되고 없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찾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뿌리 역사인 단군 및 고조선에 대한 기록들을 찾는 노력들을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유기』와 같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밝혀주는 역사서가 발견된다면 한민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다시 써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원대한 꿈과 희망을 갖고,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 등 주변국과의 역사적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올바른 역사의식 함양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단기 4346년 7월 1일
              

기고=민성욱 국학박사, 학교법인 한문화 운영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