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는 1893년부터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인쇄출판소인 삼문출판사를 운영합니다. 1896년부터 <독립신문>을 인쇄, 편집을 맡았습니다. 특히 『The Korea Review』지에 우리 민족의 기원 민속 풍습 역사 언어 종교 등에서 100여 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해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를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 7월의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제공=독립기념관)

또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박사의 탄신 150주년을 맞아 외국인 최초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도 덧붙였다.

독립기념관은 헐버트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7월 한 달간 야외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개최한다.

헐버트는 최초의 근대적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자격으로 1886년 7월 4일 조선에 왔다. 헐버트는 육영공원에서 근대교육을 펼쳤다. 1891년에 순한글판으로『민필지』라는 제목의 세계지리서를 펴내어 한국 청년들의 계몽에 힘썼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담은 광무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파기를 위한 호소문을 불어로 번역했다. 직접 현지 기자들을 만나 한국의 사정과 독립을 호소하는 등 헤이그 특사의 활동을 막후에서 지원했다.

1909년 광무황제에게 상하이 독일은행에 예치한 예금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개인 사정으로 미국에 돌아갔다.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헐버트는 뉴욕타임즈 등에 글을 기고하거나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는 순회강연을 하는 등 한국 독립을 위한 노력을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헐버트는 1949년 7월 29일 국빈자격으로 초대되어 내한하였으나, 방문 일주일만인 8월 5일 오후 12시 15분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노환으로 영면했다. 1950년 정부는 헐버트의 공로를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