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21일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열린 28회 국학원 정기학술회의에서 ‘조선후기의 단군 이해에 대한 연구’를 주제로 발표했다.

김 위원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20세기 초까지를 ‘조선후기’로 설정했다. 이를 ▲유교적(儒敎的) 정체성을 통한 단군의 이해, ▲도가적(道家的) 정체성을 통한 단군의 이해, ▲ 대종교(大倧敎)의 성립을 통한 단군의 이해 등 3가지로 나누어 발표했다. 다음은 발제문 요지다.

▲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이 21일 국학원 정기학술회의에서 '조선후기의 단군 이해에 대한 연구'를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강만금 기자]


1. 유교적 정체성을 통한 단군 이해

왜란과 호란이라는 치욕적인 국난을 경험하고 난 조선조 후기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비상하게 고조되어갔다. 그 관심은 역사지리, 즉 강역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여 정치사와 문화사를 심도 있게 복원하려는 노력으로 확산되었다. 이와 같은 상고사 연구의 심화 확대는 우리보다 낮은 단계의 민족으로 멸시해 오던 일본과 여진족으로부터 받은 수모가 직접적인 자극제가 된 것이다.

그러한 치욕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 대응 태세를 촉발시켰다. 하나는 국력을 키워 강대국으로 부상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문화의 우월성을 재확인하여 애국심을 고양하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시대적으로 볼 때에는 상고사의 적극적 해석이었다. 다시 말해 역사의식을 도덕성보다는 정체성 확인에 초점을 맞추고 새롭게 가다듬자는 것이다.

단군과 관련한 상고사 연구에 불을 붙여 놓은 인물로 미수 허목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허목은 『동사(東事)』를 통해 단군 조선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한 학자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단군 조선과 부여․고구려․백제로 이어지는 단군 혈족 국가군을 고대사의 주류로 부각시키고, 역사의 시작을 단군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 환인(桓因)씨와 신시(神市)씨[환웅]까지도 서술 대상에 넣었다. 또 단군의 아들 부루가 도산(塗山)에서 하(夏)의 우임금을 조견(朝見)했다는 중국과의 문화 교류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허목은 『동사』에서 단군을 「세가(世家)」로 설정하고, 신시문화의 계승자로서의 단군이라는 인식을 통해, 방외별국론(方外別國論)이라는 주체적 역사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방외별국이란 우리나라를 중국과는 다른 또 하나의 독립된 천하질서로 파악하려는 허목의 인식이었다.

그러나 허목의 주체적 인식은 반유교적(反儒敎的) 가치로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의 단군 인식이 유교적 단군 이해에 머문 이유다. 만약 허목의 단군 인식이 조선의 국시였던 주자학에 반하는 것이었다면, 1689년 숙종의 명에 의한 간행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무튼 허목의 단군 인식은 단군 이해의 새로운 틀을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다. 비록 유교의 정체성을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주자학을 탈피한 입장에서 단군을 민족의 수장으로 내세우는 자주적 문화정통론을 엮어낸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시도는 조선조에 들어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편 허목에서 비롯된 단군에 대한 재평가는 18세기 초의 홍만종에 이르러, 단군을 ‘수출(首出)의 신군(神君)’으로 인정하고 정통의 시발로 격상시키는 시도가 나타난다.

홍만종은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에서 「단군조선」이라는 개념 설정을 통해, 단군을 ‘수출지신군(首出之神君)’, ‘생민지비조(生民之鼻祖)’로 받아들이면서, 조선이 갑어천하(甲於天下:천하의 으뜸)라는 역사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동국역대총목』에서 단군의 치적으로 ‘백성에게 편발(編髮)과 개수(蓋首)(상투)를 가르쳤다’는 것과 ‘군신․남녀․음식․거처의 제도가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팽오라는 신하에게 명하여 국내 산천을 다스리고 민거(民居)를 정했다는 것’, 그 밖에 ‘아들 부루를 도산에 보내 하의 우임금을 조견했다’는 것도 아울러 인정하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내용이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에서 처음 발견된다는 점은, 우리에게 단군문화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준다. 가령 이 책의 내용이 홍만종의 소설이 아니라고 한다면, 적어도 그의 시대에도 단군문화와 관련한 서책들의 존재 가능성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홍만종은 단군을 통하여, 우리의 독자적 영성론(靈性論)을 추구하려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홍만종의 단군 인식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수련 전통에서 벗어난 한국의 자생적 도가(道家) 혹은 선가(仙家)의 수행문화가 주창된다는 점이 그렇다. 더욱이 그가 조선 수행문화의 근원을 단군에서 찾고자 했다는 것은, ‘동국선파(東國仙派) 수장으로서의 단군’을 통해 강렬한 민족주의적 단군론을 주창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홍만종 역시 유교적 단군 이해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해동이적』에 송시열(宋時烈)의 발문이 있음을 보아도, 그의 단군관이 유교적 정체성에 갇혀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이익은 고조선의 문화와 강역을 더욱 깊이 연구하여 소위 단군 조선의 국호는 ‘단(壇)’이라는 신설(新說)을 주장하고, 그 강역은 순(舜)의 12주 안에 들어 있다 하여 만주의 요심(遼瀋) 지방(요하의 동서)을 단군 조선의 중심지로 보았으며, 단군이 개국했다는 태백산도 묘향산이 아니라 요지(遼地)에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또한 이익은 단군 조선의 문화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여, 지역적으로 요․순의 나라와 근접했다는 사실과 단군의 아들 부루가 하와 교류했다는 사실 등에 의거하여, 요․순․우 즉 중국의 이상 시대(理想時代)인 삼대와 같은 수준의 문화 단계에 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구체적으로는 단군이 편발과 개수를 가르친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이익의 단군 이해에도 일정한 한계가 나타난다. 단군정통론을 내세우는 듯하면서도 독자성을 회피한 것이다. 그는 단군 이해가, 중국 순임금의 교화를 입어 중화의 상태로 변했다는 논리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이러한 이해의 토대에는 순임금이나 단군이 모두 동이인이며, 지역적으로도 근접해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익이 중국 중심의 화이론을 부정하면서도 우리의 독자적 역사인식을 개척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입장은 같은 시대의 인물인 수산 이종휘의 단군 이해(以神設敎論)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근대 단군민족주의자들로부터 환영 받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이종휘도 그의 『동사(東史)』에서 「단군본기」를 첫머리에 넣고, 단군의 치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외사씨(外史氏: 이종휘 자신-필자 주)의 말을 인용하여 마니산의 제천단과 구월산 삼성사의 신앙을 소개하고 있으며, 단군을 ‘수출성인(首出聖人)’으로 추앙하고 있다.

특히 이종휘는 『동사』에서 단군 조선의 신교(神敎)를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유가 사서에서 신교가 소개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동사』역시, 유교적 정체성을 통한 단군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다. 단군을 혈통의 조상으로 보고 기자를 문화의 조상으로 설정한 것이나, 고구려나 발해와 따로 이야기 할 수 없는 요․금․청을 구축해야 할 오랑캐로 취급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종휘의 단군 이해 역시 중화주의 범주 속에서의 역사인식이었다.

2. 도가적 정체성을 통한 단군 이해

17세기의 도가사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규원사화』다.

일명 단군실사(檀君實史)라고도 일컫는 『규원사화』는 북애노인(北崖老人)이 1675년 숙종 원년에 저술한 사서로서 우리나라 사학사와 사상사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서(奇書)라 할 수 있다.

저자인 북애노인의 성명은 알 수 없으나 과거에 낙방한 경험을 가진 한성(漢城) 출신의 가난한 선비라 한다. 그는 과거에 낙방한 이후 출세 영달을 단념하고 부아악(지금의 삼각산) 기슭에 규원서옥(揆園書屋)이라는 서실을 짓고 여생을 오직 이 한 권의 저술을 위하여 바치었다.

북애자의 『규원사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먼저 국사가 없음을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는 점이다.

“내가 일찍이 항상 거론하던 바와 같이, 조선의 근심 가운데 국사(國史)가 없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무릇 『춘추(春秋)』가 저작되자 명분이 바로 서게 되고, 『강목(綱目)』이 이뤄지니 정통(正統)과 윤통(閏統)이 나누어지게 되었으나, 『춘추』나 『강목』 같은 것은 한(漢)나라 선비들이 자기들의 사상에 의거하여 정리한 생각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사서는 누차의 병화를 거치며 흩어져 거의 없어졌다. 후세에 고루한 자들이 한나라 서적에 탐닉하여 헛되이 사대(事大)와 존화(尊華)만을 옳다고 여길 뿐, 먼저 근본을 세우고 이로써 우리나라를 빛낼 줄은 알지 못하니, 마치 칡이나 등나무의 성질이 곧바르게 나아가고자 하지는 않고 도리어 얽히고 비틀어지는 것과도 같음에 어찌 천하다 하지 않겠는가!”

당시만 하더라도 고려시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부터 조선조 수많은 관찬․사찬사서들이 즐비했던 시기다. 그럼에도 북애자가 ‘국사가 없다’고 말한 바는 무슨 의미인가. 북애자의 탄식처럼 사대와 존화의 역사만 횡행할 뿐, 나라의 근본을 세우고 나라를 빛낼 수 있는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의 작사의 근본 동기는 국가를 다시금 부강하게 만드는 정신문화 혁명의 지침을 제시하고 있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강국이 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지리(地利)’를 얻는 것이다. 즉 영토가 넓고 물자가 풍성해야 강국이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압록강 이북의 구토(舊土)를 수복하는 길밖에 없다. 둘째는, ‘인중이합(人衆而合)이니, 소욕(小欲)과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당쟁의 분열을 버리고 국민적 단결을 이루는 것이다. 셋째는, ‘보성(保性)’으로서, 우리의 본성을 간직하여 우리의 장점을 잃지 않음이다.

어느 나라든지 그 풍토에 맞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문화가 곧 본성이다. 우리나라의 본성은 단군 조선 이래 내려오는 신교(神敎)로서, 이것은 유․불․선의 장점을 모두 포용한 것이다. 중국 문화에도 장점이 없는 것이 아니나, 우리의 유자들은 중국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점만을 취하다가 본성을 잃고 나라가 허약하게 되었다고 개탄한다. 특히 자기를 비하하고 번문욕례(繁文縟禮)에 사로잡힌 존화사대적인 주자학의 폐단을 그는 무엇보다도 통렬히 배척한다. ‘보성’은 저자의 문화 의식과 역사의식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규원사화』는 우리의 본성, 즉 고유문화의 우수성을 선양하기 위해서 씌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규원사화』에 서술된 단군조선의 국력과 문화 역시 중국을 압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단군조선은 그 국명이 ‘박달’또는 ‘백달’이요, 단군이란 ‘박달 나라의 임금’을 뜻하며, 수도는 만주 길림의 평양이다. 환웅이 하강하였다는 태백산은 묘향산이 아니라 백두산이며, 백두산을 삼신산․장백산․불함산․개마산․태백산 등으로도 부른다. 말하자면 단국(檀國)의 중심지는 반도 이남이 아니라 반도 이북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유가 사서에서 『규원사화』를 거론하거나 인용한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유교적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규원사화』가, 활자화 되어 세상에 공개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보수적인 성리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한말․일제강점기의 민족주의 사학에 미친 『규원사화』의 영향은 더욱 큰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시기 대종교 인물들인 김교헌․박은식․신채호․최남선․권덕규 등의 고대사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볼 때, 『규원사화』의 사학사적 위치는 중차대한 바가 있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 ‘도가적 정체성을 통한 단군 이해’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하나가 『청학집(靑鶴集)』이다. 이 책은 선조〜인조대의 도가(道家)의 한 사람인 조여적이 찬한 선가류(仙家類)의 서책이다. 조여적(趙汝籍)은 관서인으로 선조 연간(1588)에 과거에 낙방한 후, 당시 저명한 선가의 한 사람이던 이사연(李思淵)의 문하에 들어가 60년간 그를 사사(師事)하면서 견문한 선가들의 사적과 담화를 엮어 이 책을 펴낸 것이다.

『청학집』에 소개된 그들의 담론 가운데 주요한 것만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수사문록(記壽四聞錄)』이나 『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 등에 기록된 우리나라 도가의 계파와 고조선 ․삼함 유민들의 씨족 계보 등이 소개되어 있다.

『사문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선파(仙派)는 황제로부터 비롯되는 중국의 도맥과는 별도로 환인진인을 조종으로 하는 독자적인 도맥을 이어 왔다고 한다. 즉 환인 뒤에 환웅․단군․문박씨․영랑(향미산인, 신라 四仙의 하나)․보덕(마한의 神女)이 나와 도맥을 이어갔으며, 이 밖에 신라 초에 왜에서 건너온 표공과 가락국의 암시선인(칠점산인)․신라의 물계자․대세․구칠․최치원․옥보고 등이 별파로서 여풍(餘風)을 이어 갔다. 고려 시대에는 청평산의 이명, 두류산의 곽흥(郭興: 睿宗代), 명종대의 최당․한유한․한식 등의 선가가 나왔다.

둘째로, 우리나라 역대 은일고사들과 저명한 학자들의 행적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15〜16세기의 사화에서 실세한 사림의 이야기가 많고, 17세기 사인(士人)들의 계(契)도 소개되고 있다.

셋째로, 국제 정세에 대한 예언적인 담화와 우리나라 역대의 애국 무장(武將)의 행적, 그리고 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상이 소개되어 있다. 도인들은 공통적으로 명의 멸망과 청의 흥기를 예언하고 있으며, 장차는 천운(天運)이 조선으로 돌아와 왜를 병탄하고 중국과 쟁형(爭衡)할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들은 대체로 유학을 공부한 사인들이면서도 존화의식 같은 것은 별로 찾아볼 수 없고, 도리어 중국과의 대항 의식을 가진 것이 특색이다. 이 점도 앞에서 소개한 『규원사화』의 문화의식과 일치됨이 확인된다.

3. 대종교의 성립을 통한 단군의 이해

대종교에 있어서의 단군이라는 존재는 국조이며 시조인 동시에 창교주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대종교적 역사관이 정신사관적인 요소의 강조와 대륙사관적인 측면의 부각, 그리고 문화사관적인 방향이 중시되었던 것도 이러한 측면과 밀접한 것이었다.

정신사관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 사학사의 흐름을 유교사학․불교사학 그리고 도가사학(道家史學)의 흐름으로 이해해 볼 때, 과거 유교와 불교중심으로 흘러 내려오는 역사인식을 도가(道家) 또는 신교(神敎), 즉 단군중심의 역사인식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대륙사관적인 방향에서 살펴볼 때, 그동안 반도중심적, 즉 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인식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요․금․청 등의 대륙중심의 인식으로 확산시켜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사관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외래사조에 침체되고 와해된 우리 고유문화, 즉 신교문화(神敎文化)를 복원하고 그것에 정체성(正體性)을 부여하는 작업과도 일치하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요소들의 강조는 당연히 민족적 성향을 강하게 나타내며 타율성(他律性)․정체성(停滯性)․당파성(黨派性)․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으로 위장된 일제 식민지사학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사학을 성숙시켰고 나아가 민족적 역사의식의 고취를 통해 항일운동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정신사관적 측면을 분석함에 있어 가장 선행해야 할 부분이 대종교 성립의 종교적 특성을 살펴보는 일이다. 한말 등장하는 여타 종교의 교주들과는 달리, 나철은 자기역할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즉 동학의 최수운이 천주(天主)의 사도(使徒)로 나타나는 것과 증산교의 강일순이 스스로 천제(天帝)요 옥황상제(玉皇上帝)로 등장하는데 비해, 나철은 우리 민족 본래의 하느님 신앙의 창교주(創敎主)인 단군의 종교에 입교하여 일개 교인의 위치로 대종교를 중광(重光:다시 일으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대종교가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민족사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당위성을 얻게 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즉 대종교에서 단군의 의미는 종교적 입장으로 보면 창교주인 동시에 민족사의 관점에서는 국조(國祖)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종교에서 단군의 위상을 올바로 세운다는 의미는 종교사와 국사를 동시에 바로 세운다는 뜻과도 일맥하는 것으로, 역사와 문화와 종교가 혼재된 신교사관(神敎史觀)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우리의 상고사를 밝힌다는 의미와 신교(神敎)의 종교사를 구명한다는 것은 동질성의 연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상고 우리 사회의 특징이 교정일치(敎政一致)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현상은 자명해진다.

대종교는 출발 당시부터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통하여, 우리의 국조인 단군대황조가 대종교의 개창자(開倉者)임을 밝히면서 단군대황조의 종교적 감화가 무릇 동북아 전역에 퍼졌음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유속과 가르침이 부여․고구려․백제․발해․신라․고려․조선, 나아가서는 요․금․청까지도 이러한 가르침이 끊이지 않고 연면히 이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역대 강역인식에서도 대종교의 경전인 「신사기(神事記)」를 비롯하여 「단군교포명서」․「봉교과규(奉敎課規)」 그리고 나철의 유시(遺詩)인 「중광가(重光歌)」등에 이미 대륙중심의 역사인식이 뚜렷하게 등장하고, 대종교의 문화적 유속(遺俗)에 대해서도 잘 드러내 주고 있는데, 이 내용들 역시 『단조사고』의 주론에 등장하는 내용들과 상당 부분 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한편 위와 같은 신교사관을 통해 단군을 우리 역사 속에 살려놓은 인물이 김교헌이다. 김교헌은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한 인물로서, 후일 대종교 중광 2세 교주를 역임한다. 특히 그는 1910년 광문회(光文會) 활동을 이끌면서 고전(古典)과 사서(史書)의 수집․간행 및 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유근뿐만 아니라, 최남선․장지연․신채호 등도 이 당시 김교헌의 영향을 받으며 민족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갔으며, 광문회에서는 김교헌의 가문에 역대로 수집․소장되어 오던 방대한 양의 서책과 문헌이 중요하게 활용되었고 후일 그 책들은 최남선이 보관하다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었다.

김교헌은 그의 저술인 『신단민사(神壇民史)』․『신단실기(神壇實記)』․『배달족역사』에서 대종교의 역사적 원형인 신교사관(神敎史觀)을 정립시켰다. 『신단민사』에서는 우리 단군민족의 혈통의 흐름을 대종교의 경전인 『신사기』와 같은 구족설(九族說)에 그 근원을 찾음과 함께, 역사적 강역인식에서는 대륙을 주요 활동무대로 설정하여 고조선부터 조선조까지 철저하게 대륙적 인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까닭에 고려와 조선시대도 여요시대(麗遼時代)․여금시대(麗金時代)․조청시대(朝淸時代)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교문화에 대해 단군의 오훈(五訓)을 시작으로 역대국가들의 제천행사를 밝힘과 함께 구서(九誓)․오계(五戒)․팔관(八關)의 의미를 구명한은 물론, 대종교의 역대 교명(敎名)을 설명함으로써 민족문화의 고유성과 공유성(公有性)․전통성․자주성을 강조한다. 『배달족역사』는, 정확히 말하면 김교헌이 교열(校閱)한 것을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가 발간한 것으로, 『신단민사』의 굵은 줄기만을 간추려 놓은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신단실기』는 단군에 대한 사적(事蹟)과 신교사상에 대한 자취를 모아 자료집의 성격으로 정리해 놓고 있다. 이것은 『단조사고』내용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단조사고』의 저술에 김교헌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교사관은 신채호 역사정신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낭가사상(郎家思想)의 형성 배경에도 대종교의 정신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단적인 예로, 신채호가 대종교를 경험하기 이전에는 그가 유교라는 정신적 바탕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신교(神敎)와 같은 맥락인 한국 고대선교(古代仙敎)에 대해서, 불로장수를 추구하는 중국종교의 아류(亞流)로 공박했다.

그러던 그가 대종교 중광 이후 대종교를 경험하면서부터, 중국도교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우리 민족 고유의 선교가 이미 도교 수입 이전부터 형성되어 우리 민족신앙의 중요한 줄기가 되었다고 인식함으로써, 의식의 중대한 변화를 몰고 온다.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신채호의 논문이 1910년에 발표된 「동국고대선교고(東國古代仙敎考)」인데, 그는 이 글에서 과거의 유교정신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고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역사의식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1910년대 이후의 신채호의 역사연구는 거의 대부분을 선교의 실체를 연구하는 데 두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러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대륙적 인식 및 문화사의 지평을 넓혀 간 것이다.

박은식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대종교를 경험하기 이전에는 유교적 중화사관(中華史觀)에서 헤어나지 못한 고루한 유학자에 지나지 않았다. 1910년 이전의 박은식은 인생이나 사회구제의 대명제(大命題)로 공부자(孔夫子)의 도, 즉 유교밖에 없다는 인식으로 일관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유교구신(儒敎救新)을 위하여 양명학 운동이나 대동교(大同敎) 창건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까닭에 대종교 경험 이전의 박은식의 역사의식은 민족사관과는 거리가 먼 유교적 애국사상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박은식은 대종교를 경험하면서 완전히 변한다. 1911년 『단조사고』의 원고를 가지고 만주로 망명한 것으로 추측되는 박은식의 변화는 환골탈태 그 자체였다. 그의 역사정신의 고갱이라 할 수 있는 국혼(國魂)의 의미도 바로 대종교의 정신적 구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신교(神敎)의 현대적 구현이 대종교로 단정하고 대종교를 국교(國敎)로서의 가치가 있음을 고증하기도 했다.

박은식 역사인식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글이 『몽배금태조』다. 이 글은 나라가 망한데 대한 준엄한 자기비판이 통곡처럼 흐르고 앞으로 나라를 찾으려는 결의가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통렬한 독립지침서이며 변모된 박은식에 대한 사상과 의식이 가장 집중적으로 표된 책으로써,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대종교의 영향임을 서두에서 박은식 스스로 밝히고 있다.

박은식은 이 글을 통하여 유교적 가치에 대한 환멸과 함께, 유교를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위해 반드시 청산해야 할 반민족적 가치로 규정함은 물론, 망명 전 교육의 정신적 토대였던 유교가 교육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천명했다. 또한 박은식은, 육체의 생활은 잠시일 뿐 영혼의 존재는 영구한 것이라고 언급하며, 인간이 나라에 충성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자면 육신의 고초는 잠시일 뿐이요 그 영혼의 쾌락은 무궁한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에 화를 주는 자는 육체의 쾌락은 잠시일 뿐이요 영혼의 고초는 무궁할 것이라고 경고함으로써, 정신사관의 본질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박은식의 역사정신이 『대동고대사론』․『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흐르는 국혼사관(國魂史觀)․대륙사관․신교문화사관(神敎文化史觀)의 형성에 중요한 배경이 되는 것이다.

한편 정인보의 역사정신의 중추인 ‘조선얼’ 또한 대종교의 영향 속에서 배태된 것이다. 정인보는 나철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국내비밀활동을 전개했을 뿐만이 아니라, 신규식의 동제사(同濟社) 활동에도 가담하여 직․간접적인 대종교 활동을 감행한다. 그 또한 대종교가 단군이 처음 교화를 베푼 것이며 홍암에 의해 중광된 대종교를 국교로 인식했던 인물이다. 이 밖에도 안재홍․이상룡․유근․장도빈 등도 이러한 역사정신의 바탕 위에서 그 나름의 민족사를 개척하고 서술한 것인데, 이들 모두 신교적 정서와 뗄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대종교도들의 다양한 단군인식은, 역사적 방면에서의 단군만이 아니라 문화적․종교적 방면에서의 단군의 의미를 중시하게 된 대종교적 배경과 무관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