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기대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21일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열린 28회 국학원 정기학술회의에서 ‘바른 한국상고사의 의미와 그 연구의 필요성’을 주제로 발표했다.

복 교수는 “지금 시대는 상고사 정신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일본의 한국사 조작, 중국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이유”라며 “상고시대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발제문 요약이다.

1. 시대별 고조선 인식은 어떠했나?

1) 고대 및 중세

한국사에서 상고시기의 인정은 고려시대까지는 분명하게 자랑스럽게 인정했다. 그런 흔적은 고려말기 서적 곳곳에서 나타난다.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권근의 《양촌집》, 《응제시》, 《참성단제문》 등에서 단군조선의 웅대하고, 단군 고조선이 역사적, 국가적 자존심임을 분명하게 천명한다.

그래서 당시 고려는 늘 자주적인 행동을 하려하였고, 요ㆍ금과의 전쟁에서 분명하게 자기를 지켰고, 원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유일하게 독립정부를 유지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민왕의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도 바로 이승휴를 시켜 강화도 참성단에 올라가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고려는 단군을 국가의 수호신격으로 생각하면서 자주적인 국가를 지켜온 것이다.

과거 고려시대까지만 하여도 기자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민족의 시조가 아니라 한 제사의 대상으로 나타난 적은 있었다.

2) 조선 초기 및 중기

그러던 것이 고려 말 명나라의 영향으로 한국사에 기자가 등장하면서, 조선시대 유교정치를 구현하는 동안 단군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런 단군에 대한 것이 조선에 이르면서 아주 다른 상황으로 변하였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단군은 국가의 자존심이었는데, 조선에서 들어와서는 그 지위가 갑작스레 격하가 되고, 찬밥신세가 된 것이다. 고려시대에 단군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기자’가 들어앉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유교가 조선의 통치이념이었기 때문에, 유가의 기본 사상인 ‘의’에 표상적인 사람인 기자가 조선에서는 충분히 받들어지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더구나 조선의 식자층들은 기자가 동쪽으로 왔다는 그 말을 활용하여 충분하게 단군의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이런 유교와 기자 숭배사상은 조선중기에 다다라 이이를 중심으로 극성기를 이루게 된다. 결국 유가적인 시기에 단군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었고, 기자만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국가적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시기는 단군 고조선은 없어졌고, 차라리 명나라의 한 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르는 시대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결국 1592년 ‘조일전쟁’을 통하여 사대주의에 대한 처절한 반성의 기회가 왔으나, 유가들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명나라의 도움으로 나라가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 더더욱 명나라와 기자를 숭상하였다. 특히 율곡을 비롯한 철저한 중화주의자들은 기자중시에 열을 올렸고, 송시열 같은 경우는 아예 만동묘를 세우고, 집안에서 중국 복식을 입게 했을 정도로 사대주의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조청전쟁’으로 조선은 전혀 예상하지 않은 시대적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다. 그것은 조청전쟁에서 명나라는 더 이상 조선을 도와주지 못하였다. 그대로 주저앉은 것이다. 

3) 조선 후기(실학시대)

이런 상황에 이르자 일부 조선의 관료들은 일부 반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반성의 기미는 기자로부터 탈피였다. 이른바 남인계통 들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파들에서도 단군을 다시 제자리에 올려놓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수산 이종휘의 《동사》에서 <단군본기>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성호 이익에 의해서는 고조선이 아니라 ‘단국’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고, 미수 허목 역시 그의 저서 《미수기언》에서 단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를 실학시대라 부른다. 이렇게 조선의 자주성을 찾는 과정에서 단군은 가장 먼저 그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꿈으로 깨어나고 만다. 그래도 유가들의 세상인 조선은 계속하여 청나라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강화도에서 맺은 ‘조일조약’을 맺고 나서는 22세의 원세개를 감국이라는 신분으로 데려다가 조선의 정치에 이왈저왈하는 자리에 앉혀놓고 그 명령을 듣고 있었다. 이렇듯 조선은 아무 생각 없이 사대주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4) 근대

(1) 전통사학

1910년 일본에 의하여 대한제국이 어이없이 해체를 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누구도 그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다. 뿔뿔이 의병을 일으켜 산발적으로 일본군과 싸우지만 그 성과는 크지 못하였다. 이때 홍암 나철에 의하여 단군을 신으로 섬기는 대종교가 조직된다.

이때 나철은 우리가 일본에게 이렇게 치욕을 당하는 것은 우리 본분을 잊고 사대주의를 한 결과가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영광스런 과거를 찾기 위해서는 자주적인 사상과 누구에게 괴롭힘도 당한 적 없고, 누구를 괴롭힌 적도 없는 그 시절 즉, 고조선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주장은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그 공감대는 서일에 의하여 조직화되었고, 그 조직들은 상해 임시정부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한국최초의 단군민족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단군의 고조선 건국정신에 입각하여 일본과 싸웠고, 결국 1945년 승리를 한 것이다. 이때 당시 전통사관 계승자들은 실학시대까지 남아 있던 기자에 대한 이해를 빼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즉 한국사에서 ‘외세’ 그것도 조작된 외세를 모두 빼버리고 진정한 실증주의를 하고자 한 것이다.

(2) 외래사학

침략자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일본은 한국사를 완전히 날조하여 없앴다. 특히 한국은 상고사가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상대국에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 범죄는 한국인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잃게 하고, 희망이 없는 민족으로 만든 것이다. (현재 더 큰 문제는 많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그것을 그대로 따른 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일본은 이런 것을 예상하고 한국사를 날조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명나라 때 조선에 갖은 협박을 하여 고조선사를 없앤 후로 또 다시 일본이 그 흔적마저 없애려고 한 것이다.  

5) 현 대

(1) 환국정부에서- 70년대

앞서도 말했듯이 단군의 건국정신인 홍익인간은 1945년 이후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정신적인 자산이었다. 그 정신은 국민적인 정신으로 매우 유익한 국민의 자긍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교과서에 뭐라 하건 말건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은 모든 국민들에게 진실이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은 그 진실이 사실로 밝혀지기를 고대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단군의 정신이 커지면 커질수록 국가는 발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에 대한 열정은 점점 커가는 것이 되었다.

(2)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1980년대 단군에 대한 강조는 지나친 민족주의 강조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주춤하였다. 그 시기를 회고해보면 미국이라는 힘이 크게 작용하던 시기였다. 그러던 것이 1990년 초반 북한에서 단군릉 발굴 소식이 전해지면서 남한도 일순간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그것은 남한에서 잠시 잊었던 단군이 북한에서 갑자기 재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순간 단군민족주의를 줄기차게 주장해오던 것이 순간 북한으로 그 주도권이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남한의 많은 학자들이 북한의 단군릉 발굴 소식을 접하고 북한 주장에 적지 않은 공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 역사의 공동체임을 주장하면서 동시 통일의 주체가 북한임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북한의 단군을 발굴 사실은 조작이다. 본인은 이 사실을 1993년도 8월에 북한 학자들로부터 이미 들었다.) 이것은 결국 북한도 단군민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단군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민족과 국운이 융성하던 시기는 단군이 건국한 상고시대가 항상 믿음과 자신감의 발로였고, 국운이 쇠퇴하면서 사대주의에 매몰되었을 때는 단군의 정신도 매몰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다시 국운 상승을 위해서는 반드시 상고사를 의지하며 노력하여 그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결국 한국 상고사는 한국인 자신감의 발로였고 자신감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시대는 상고사 정신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국으로부터 정체성이 짓밟혀도 대항한번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본의 한국사 조작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제대로 대응 한번 못하고 조선 중기를 연상하는 정책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는 분명하게 단군정신을 계승하여 국난을 당하였을 때는 과감하게 치고 나가 그들의 명맥을 유지 할 수 있었으나 조선은 전혀 그렇지를 못했다. 우리가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2. 한국 상고사 연구에 대한 접근방법에 대한 분류

1) 외래사관

한국 상고사 연구 시기는 1804년 하야시 다이스케의 《조선사》가 출판되면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것은 그동안 계속 이어지던 한국 통사의 개념에서, 단군조선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깎아 내려지면서 국가가 발행하는 역사 관련 서적에서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일본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사》에서는 아예 없어지고 만다.

‘고조선의 존재’란 그 사실여부를 떠나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일본의 이런 처사에 대하여 일부 최남선을 비롯한 대한 사람들은 항의를 하였지만 찻잔 속에 미풍이 되고 말았고, 결국 일본의 한국사 왜곡 날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역사 연구가들은 일본의 협조 하에 인쇄물로 나와 시중에 읽히기도 하고, 교재로 사용도 되었다.

이들은 철저하게 이른바 “실증주의”라는 미필적 고의를 내세워 그들과 맞지 않고 인정하기 싫은 한국사의 내용을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며 역사책에서 제외시켰고, 그것을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글쓴이는 이들을 ‘외래사관’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2) 전통사관

이에 반해 전통시대 사관을 꿋꿋이 지키며,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해체된 대한제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왜 이런 일을 당하였을까 고민하던 사람들은 그 원인이 필자가 주장한 외래사관인  ‘사대사관’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철저히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던 단군의 고조선을 부활시키고자 절치부심의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내용이 어쨌든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단군 및 고조선에 대한 연구결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연구결과들은 당시 국가의 운명 상 그들에게는 인쇄물로 찍혀 나오기는 매우 어려운 사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사본으로 이어지는 어려움도 많았고, 그 내용역시 들쭉날쭉 하게 된 것이다. 즉 외래사관은 국내의 중요문헌을 거의 다 볼 수 있었지만 들판의 전통사관추종자들은 그런 중요한 사서를 볼 수가 없었기에 귀동냥으로, 전해들은 이야기로 한국사를 서술하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전통사관 추종자들은 그 사실을 여부를 떠나 듣기 좋고 읽어서 힘이 나는 내용들이 첨가가 되는 것들도 많이 있었다. 글쓴이는 이들을 ‘전통사관’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3) 종교사관

1910년 전후한 무렵부터 이른바 민족주의 사학이라고 분류되는 수많은 역사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 사서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상고사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으며, 고대, 중세, 근대에 대해서는 간단할 정도로 자세하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사서들이 역사적 사실 규명보다는 정신적인 교훈 위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공통적인 흐름은 종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 사서에 들에 대한 정통성문제나 역사성 등에 대한 많은 문제가 있어 대부분 위서논쟁에 휩싸이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한민족의 웅대성을 강조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여지까지 연구된 역사학 연구 이론이나 논리로 설명이 절대로 되지 않는 사실을 굳세게 주장하여 그 책에 대한 절대적적인 신봉자 외는 모두에게 거들떠보지도 않는 대상이 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충분히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만큼 상상력과 한민족의 우수성에 집중되어 있어 그 내용대로 확립을 하고자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 신뢰자들은 전통사관을 주장하던, 외래사관을 주장하던 모두 정신개조의 대상으로 보고, 한 우두머리가 나서서 그 책을 통하여 집단을 형성하여 종교화하고자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격암유록≫ 같은 경우이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종국에 가서는 개인숭배 쪽으로 흘러가서 그 관계자들에게 큰 상처를 준 경우가 대부분이다. 글쓴이는 이들을 ‘종교사관’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3. 연구진행을 위한 제언

글쓴이는 위에서 한국 상고사연구 관련한 몇 줄기에 대하여 간단히 정리하여 보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위에서 분석해본 결과 한국 상고사 연구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문제점 가장 큰 것은 왜 상고사를 연구해야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목표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상고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본 자료가 되는 사서의 주체와 객체가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혼란만 가중시킬 뿐 혼란을 극복하는 방법은 되지 못한다. 이런 사관의 차이는 당연히 연구의 내용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런 차이점을 가지고 서로 혹독한 비판과 무시를 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첫째, 상고사의 시대적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상고사라는 것은 ‘단군 고조선’사를 말한다. 이 단군고조선사에 대한 그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다. 그렇지만 글쓴이의 입장에서 상고사라는 개념은 고조선과 연나라와 전쟁을 한계로 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고조선을 큰 타격을 받았고, 결국 고조선은 와해되어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동예, 조선, 예 등으로 분할된다. 이런 시기를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고대사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물론 이런 시대구분을 한 것은 과거 한국사는 위만조선부터 시작된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보다 앞서는 시기는 상고사로 분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연전쟁’을 구분하여 상고사와 고대사를 구분하는데 그 시기는 기원전 4세기 무렵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상고사 연구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다. 

단군이 건국한 고조선의 건국 목표는 ‘홍익인간’이다. 이 이념은 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사상적인 것이다. ‘더불어 잘 살자’는 정치 슬로건이다. 이것은 전 세계 사람이 모두 동의하는 내용이다. 지금의 전 세계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세계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 이념을 가진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이념은 한민족이 세계 리더로 갈 수 있는 분명한 아이콘인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물질적으로 경제대국, 정신적으로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나라 또는 민족으로 인식을 시켜야 하는 것이다.  ‘내적으로는 민족과 국가의 자신감 넘치는 정체성 확보, 이를 통한 국가 안보의 당위성 확보, 현실에 당면한 남북통일의 주도권을 갖기 위한 남한 주도의 민족 공감대형성, 그리고 통일 이후 21세기 세계 문화대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