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ㆍ현대 역사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을 어떻게 보고 있나? 일본이 단군왕검을 신화로 왜곡하여 우리 역사를 2000년이나 절단하였기 때문에 고조선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 역사교과서를 고조선 기술을 검토하여 고조선 인식을 살펴보는 논문이 21일 발표됐다.

민성욱 박사(학교법인 한문화 법인팀장)는 이날 열린 제28회 사단법인 국학원 정기학술회의에서 "근현대 역사교과서의 고조선 인식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발표문을 요약한다.

▲ 민성욱 국학박사(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이 21일 국학원 정기 학술회의에서 근현대 역사교과서의 고조선 인식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강만금 기자]


우리 뿌리 역사인 고조선을 보는  역사인식은 한국사에서 어떤 시대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고조선사는 국조인 단군왕검께서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으로 나라를 세우셨고, 이 땅에 터 잡은 이래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고대 국가를 거쳐 고려, 조선, 대한제국에 이어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르기 까지 우리 역사의 첫 출발점이며, 고유한 사유체계인 ‘홍익정신’이 그로부터 비롯되어 오늘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면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국학'이라고 하는데, 어느 민족이나 국가에는 고유한 사상적 기반과 문화적 원형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단군이고 고조선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뿌리역사인 고조선에 대해서 근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인식하고 서술하고 있는 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교과용 도서라고 하면 교과서 및 지도서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국정도서, 검정도서, 인정도서 등 세 종류의 교과서가 사용되고 있다. “국정도서”는 교육부가 저작권을 가진 교과용 도서를 말하며, “검정도서”는 교육부의 검정을 받은 교과용 도서, “인정도서”는 국정도서나 검정도서가 없는 경우 또는 이를 사용하기 곤란하거나 보충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사용하기 위하여 교육부 장관의 인정을 받은 교과용 도서를 말한다. 특히 교과서는 그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고 그러한 의미들은 교과서다운 교과서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알려 주고 있다.


교과서 중의 역사교과서는 그 시대의 역사인식을 보여 주고, 그러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역사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 역사교과서는 다른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개화기 이후 근대 교육 제도 도입에 따라 오늘날과 같은 교과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당시에는 우리말과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많아 그것이 고스란히 교과서에 투영되었고, 반면에 일본의 역사연구 결과를 그대로 답습했던 역사교과서도 있었다. 대일항쟁 기간 동안에는 역사교과서를 통하여 일본사를 배워야 했던 아픔도 있었고, 반면에 대일항쟁운동의 정신적 구심으로 삼기 위하여 민족사학이 발전하는 계기도 되었다. 광복 이후 미군정에 의해 채택된 교과서는 개화기에 도입된 교과서 내용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미군정이 끝나고 환국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현재까지 역사 교과서의 발행은 초등학교는 국정으로 일관하였으며, 중학교는 검인정제에서 국정제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검인정제로 바뀌는 과정을 겪었고, 현재는 세계사를 포함하는 ‘역사’ 과목으로 7종의 검정교과서가 있다. 고등학교는 국사과목으로 국정교과서이었다가 지금은 ‘한국사’ 과목으로 6종의 검정교과서가 있다.

 근대 역사교과서 분석 및 고조선 인식

근대 역사교과서 등장 배경

조선후기 사학이 지닌 민족의식의 심화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왜란과 호란 그리고 청의 중원지배라는 국제정세의 변동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다. 이러한 조선후기의 민족지향ㆍ민주지향 및 과학지향의 성격을 띠면서 근대사학을 향해 착실하게 전진해 가던 역사학은 1894년의 갑오개혁을 계기로 소위 ‘신사체(新史體)’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으며,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거치면서 ‘신사학(新史學)’ 즉 ‘민족주의사학(民族主義史學)’으로 또 한 번의 변신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지만 개화기의 신사체는 이러한 외형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신사체의 모체가 되었던 일본 사학의 왜곡된 한국사상(韓國史像)까지도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민족지향에 저해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역사상 각급 학교에서 국사과목이 교육과정에 들어간 것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비롯된다. 그 전에도 서원이나 서당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비롯하여 『사략(史略)』, 『통감절요(通鑑節要)』등 몇 가지 사서가 읽히고 있었지만 그것은 중국사가 중심이요, 국사를 독립과목으로 가르친 일은 거의 없었다.

 근대 교육제도 도입과 역사교과서 간행

근대적 공교육제도가 출범한 이후 국권이 상실되는 1910년까지의 역사교육은 자국사인식은 물론 근대계몽기에 새롭게 대두되는 국민, 국권의식의 형성과 더 나아가 민족의식과 민족정체성의 강화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사서는 그 시대적 인식 및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이 시기에 편찬된 역사교과서는 시대적 산물이자 당대 역사인식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한제국시기에 간행된 22종의 국사교과서는 역사인식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더구나 1895년~1910년의 국내 사학은 중세사학에서 근대사학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므로 더욱 그렇다.
1895년 2월 고종은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의 실시를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교육조서’를 반포하여 교육입국의 이상을 천명하였다. 또한 1895년 학무아문이 학부로 재편되었고,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학부는 1895년 10월경 최초의 관찬 역사교과서 『조선역사』를 국한문 혼용체로 간행하였고, 이어 『조선역대사략』과 『조선략사』가 편찬되었다. 이후 학부는 이 사서들을 보충하여 1899년에 『동국역대사략』, 속간본인 『조선역대사략』 및 국한문혼용의 『보통교과동국역사』를 간행하였다.
교과서는 ‘교과용도서(敎科用圖書)’의 준말로 달리 말해 교과 운영을 전제로 교육용 재료를 모아 편찬한 책이 교과서이다. 교과서는 한 사회의 교육이념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구조 및 지식발전 정도를 반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과서는 1885년 학부에서 편찬한 『국민소학독본』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근대적인 개혁기인 갑오개혁(1894)부터 경술국치(1910) 전까지 초ㆍ중등 역사교과서인 『보통교과 동국역사』, 『보통교과 대동역사략』, 『초등대한역사』, 『대한역사(상)』, 『초등본국역사』 등 근대역사교과서를 분석하여 고조선과 한사군, 고려국경 등에 대하여 서술되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개화기는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한 이후부터이고, 조선근대적개혁기는 1894년 갑오개혁이후부터이며, 근대교육제도 도입기(허재영은 근대 계몽기라고 함.)는 1895년 이후부터이고, 대한제국시대는 1897년 부터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근대교육제도 도입에 따른 근대역사교과서의 내용을 살피고자 하므로 시대 구분 용어를 1895년부터 1910년까지 근대교육제도 도입기로 보고 당시에 간행되었던 근대역사교과서를 그 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근대 역사교과서 분석 및 고조선 인식

근대역사교과서에는 단군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단군은 당뇨 25년 무진년에 건국하였다. 비서갑의 여인을 단군의 왕비로 책봉했다. 나라의 경계는 동쪽은 대해의 끝이고, 서쪽은 요하와 잇닿아 있으며, 남쪽은 조령이고, 북쪽은 중국 흑룡강성과 접하였다. 태자 부루를 도산에 보내어 지나 하우씨가 주관한 만국회의에 참석하게 했다. 왕자 3인을 강화도 전등사에 보내어 삼랑성을 쌓게 하였다. 처음에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백악으로 옮겼다. 팽오에게 명하여 국내 산천에 제를 올리도록 하였다.”는 내용이다. 또한 기자와 위만도 서술하였는데, “단군이 후손에게 왕위를 전한지 1212년에 기자에게 물려주고 북부여로 옮겼다가 후에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위만은 준왕을 급습하였고, 이에 준왕은 바다 건너 금마군에 이르러 국호를 고쳐 마한이라 칭하였다.”라고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당시 역사교과서 기록을 볼 때 단군을 신화가 아닌 역사적 실체로 인식하였으며, 구체적인 고조선의 강역, 태자가 지나 하우씨의 만국회의에 참석하였고, 또한 단군의 세 왕자가 있었으며, 도읍도 평양에서 백악으로 옮긴 사실 등을 역사의 실체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에 대해서도 준왕을 기자조선 41세로 기록하였고, 위만을 포함하여 단군조선, 기자조선과 위씨조선을 상고 3조선으로 일컬었다.

한말 교과서의 단군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단군조선은 국사의 시발로서 중요시 되고 있지만 , 오직 시조 단군의 건국과 치적 그리고 태자 부루의 조회 등 단편적인 사실만이 인식될 뿐 이었다. 물론 이러한 분위기에서 민족주의사학이 태동되었고, 대일항쟁기를 거치면서 민족주의사학이 그 절정에 이르기도 하였다.

 근대역사교과서의 고조선 인식

이상의 기록들을 살펴 볼 때, 근대역사교과서에서는 단군을 신화가 아닌 역사적 실체로 인식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고조선의 강역과 태자 부루가 만국회의에 참석했다는 기록, 단군의 아들 3명을 강화도로 보내 삼랑성을 쌓게 했다거나 도읍을 옮긴 천도의 기록 등 고조선과 단군을 역사적 실체로 보고 있다. 하지만 기자에 대해서도 준왕을 기자조선 41세로 기록하고, 단군조선, 기자조선, 그리고 위씨조선을 동등하게 보아 상고 3조선으로 부르고 있다. 근대역사교과서는 공통적으로 韓중심의 역사인식체계를 갖고 있는데 이것은 대한제국이라는 국호의 제정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고조선의 조선이라는 국호는 본래 단군에 대한 민족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고, 대한제국의 국호는 기자 숭배에 뿌리를 둔 崇韓의식의 표출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국조 단군을 역사의 시발점으로 보고, 단군조선 이래로 근대조선까지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로 인해 민족주의사학이 태동되었고, 대일항쟁기 때 민족주의사학은 더욱 공고하게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광복이후 미군정청에 의해 간행된 역사교과서를 통해 민족주의사학의 전개에 여전히 많은 아쉬움을 남기게 하고 있다.

 대일항쟁기의 교과서 발행 제도와 역사교과서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의 실시로 일본은 한국의 교육정책에 관여하면서 학제개편을 추진하였고, 일본은 이러한 학제개편의 시행을 통해 교육의 모범을 보인다는 의미에서 ‘모범교육’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모범교육이 핵심은 국정교과서의 보급에 있었다. 이것이 결국 오늘날까지 국정교과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1910년 이후에 일본은 식민지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학부에서 편찬한 역사교과서는 폐지하고 교과목에서 역사과목을 없앤 후 국어독본 교재 속에서 일본사를 가르쳤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부터는 일본과 동일한 학제를 적용하고, 교과목에 일본역사가 추가되었다. 일본은 대일항쟁기간 동안 1911년부터 1945년까지 네 차례 조선교육령을 제정하였는데, 1911년 처음 제정한 제1차 조선교육령에서는 보통학교의 교과서를 국정으로 규정하고 있고, 조선총독부는 1945년에 패전할 때까지 초등교육의 교과서를 국정으로 단일화 했다. 제2차 조선교육령에는 보통학교에서는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보통학교 교과용 도서를 사용토록 하고, 해당 교과서가 없을 경우에도 문부성에서 저작권을 가진 소학교 교과용 도서를 사용토록 하였다. 또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소학교의 교과용 도서를 문부성에서 저작권을 가진 것으로 정했다.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에서는 ‘동양사’와 ‘서양사’는 동양사를 중심으로 한 ‘동아급세계’로 바뀌고, 국사는 ‘황국사’로 바뀌었다.
대한제국의 근대개혁이 좌절되고,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근대 개혁이나 식민지 지배를 위해서 교육은 가장 중요한 부문 중 하나였고, 교과서는 그중에서도 핵심이었다. 대한제국과 조선총독부는 모두 국정교과서를 통해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시키고자 하였으나 현실적인 여건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한제국의 국정제와 대일항쟁기간 동안 조선총독부의 국정제를 그 형태의 유사성 만으로 동일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대한제국의 국정제는 근대교육을 추진하기 위하여 교과서 공급의 책임을 맡았고, 조선총독부의 국정제는 지식을 독점하여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일방적인 역사인식 주입을 거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제도를 거부하거나 법령을 어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근대 역사교과서 발행은 그 의미가 크지만 국가의 교육 통제를 위한 국정으로의 과정이었으며, 국정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출발이었다.

 미군정기 역사교과서의 내용과 고조선 인식

대일항쟁기간 동안 단절되었던 역사교육이 광복을 맞이하면서 소생할 기회를 맞이하였다. 국어와 국사 과목에서 임시 교과서가 등장하였는데, 미군정하에서 역사 임시 교재로 『초등국사(군정청 학무국, 1946.06)』와 『국사교본(진단학회, 1946.06)등이 발간되었다. 광복이후 미군정청에 의해 간행된 역사교과서를 통해 광복이후 민족주의사학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이 교과서에는 단군조선을 전조선이라고 하고, 기자조선을 후조선이라고 하며,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상고 삼조선 체계는 그대로 답습이 되었다.

 현대 역사교과서 분석 및 고조선 인식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1949년에 교육법이 제정되고, 1950년에 교과용도서 관련 규정이 마련되었으며, 제1차 교육과정이 준비되고 있었지만 6ㆍ25전쟁의 발발로 교육과정의 제정과 그에 따른 교과서 제작이 지연되었다. 그래서 제1차 교육과정은 1954년 4월 20일에 공포되었고, 이에 의거하여 국정 교과서는 1955년부터 1958년까지 4년에 걸쳐 편찬 발행되었다. 5ㆍ16 군사정변이 발생한 이후 제정된 제2차 교육과정에 의해서 교과서는 3년 계획으로 편찬ㆍ발행되었다. 초등학교는 1964~1966년까지, 중학교는 1965년, 고등학교는 1966년부터 사용하게 하였다. 1차(1954~1963)~2차 교육과정기(1963~1973)에 역사교과서는 초등에서는 국정교과서, 중등에서는 검정교과서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교과서 편찬과 발행의 일반적인 기준과 절차가 마련되었고, 이와 함께 국사교과서의 경우 내용의 차이가 지적되기도 하였다. 여러 종류의 교과서가 발간된다면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심각한 문제로 인식이 되었고, 나중에는 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만드는 커다란 구실이 되었다.


제3차 교육과정기(1973~1982)에는 교과서 발행사상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교과서가 국정 또는 단일본으로 편찬된 사실이었다. 국사교과서도 사회과에서 독립하면서 국정화(1973) 되었다.
제4차 교육과정(1982~1987)에서는 부분적으로 검정이 풀렸으나 그 속도는 부진하였고, 제5차 교육과정(1987~1992)에서 교과서 검정은 1987년 중학교에 대해 1988년에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대해 실시하였다. 제5차 교육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1교과 1교과용도서를 탈피한 것인데, 예를 들면 국어 교과는 말하기ㆍ듣기ㆍ쓰기의 3개 교과서로 발간되었다. 또 하나는 초등 사회과 4학년 1학기 교과서를 시ㆍ도별로 편찬한 것이다. 이것은 지역이나 학교의 특성을 고려한 다양한 교과서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시도였다. 제6차 교육과정(1992~1997)에서는 그 동안에 지적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집필기간의 확보(약 17개월 정도), 유효기간(6년)을 확대하고 3년까지 연장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검정기준을 공개 논의하여 결정하도록 하였다.


시대의 흐름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경쟁에 의한 교과서 발행으로 교과서의 질을 향상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기본 방향이 바뀌고 있다. 그리하여 발행제도를 국가 독점(국정)에서 국가 간접 참여(검정과 인정)로, 다시 민간 주도(자유발행)하의 다양한 교과서 발행이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제7차 교육과정(1997~2007)에서 중등 국사교과서도 검정으로 바꾸어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어, 중학교 사회와 고등학교 한국 근ㆍ현대사가 검정 교과서로 발행되었다. 검정 ‘한국 근ㆍ현대사’ 교과서의 탄생은 그 동안 국정 단일본으로 편찬되었던 국사 교과서의 일부가 검정화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새로운 교과서 집필에 시대별ㆍ영역별 전문 인력들이 참여하여 공동으로 교과서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현장 교사들 다수가 참여하여 교과서 집필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바람직한 교과서의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검정의 확대가 갖는 장점은 교과 내용 조직의 획일성을 피하고 다양한 형태의 교과서를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한계점은 교육과정과 집필상의 유의점에 따른 교과서 검정은 내용 선정과 조직에서 큰 차이를 가져오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007년 개정 교육과정이 2007년 2월28일에 교육인적자원부 제2007-79호로 고시되어 2011년 3월1일부터 적용될 예정이었으나, 2009년 12월23일에 2007년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되기 전 다시 교육과정이 개정되었다. 2009년 개정 교육과정은 2011년 3월1일부터 적용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2007년 교육과정은 7차 교육과정까지 나뉘어져 있던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한국사 영역과 세계사 영역을 『역사』과목으로 통합하고, 종래 『국사』과목을 『역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2009년 교육과정이 다시 개정됨으로써 중학교는 『역사』과목은 그대로 유지된 반면 고등학교는 『역사』과목은 『한국사』과목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선택과목으로 변경되었으며, 『한국문화사』가 폐지되는 등 역사교과의 변화와 축소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러나 2011년 4월22일 교육과학기술부ㆍ국사편찬위원회ㆍ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는 역사교육강화의 일환으로 고등학교 교과인 『한국사』를 필수로 이수해야 한다는 방안을 발표하여 필수과목으로 변경되었다.

현대 역사교과서의 분석과 고조선 인식

 초등학교 역사 교과
 

초등학교 역사교과서는 국정 교과서인 “사회” 과목에 포함되어 있다. 3학년과 4학년 “사회”시간에는 시ㆍ도에 대해서 배우고, 5학년과 6학년이 되면 국사와 세계사를 각각 배우게 된다. 특히 5학년 1학기 때에는 한국사에 대해서 배우는데, 특히 고조선에 대해서는 『삼국유사』기록에 따라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우리나라 최초 국가인 고조선을 세웠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조선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혹은 고조선 사람들의 생활모습에 대해서도 알 수 있도록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를 단군왕검이야기로 표현하고 전문을 수록하고 있으면서 그 의미를 오래전부터 고조선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로 여겼으며, 그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단군왕검이라고 생각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비파형 동검과 탁자 모양의 고인돌 그리고 미송리식 토기 등과 같은 유물로 고조선 세력의 범위를 파악함과 동시에 청동기 문화가 발달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고조선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여덟 개의 법(8조법)중 현재까지 내려오는 세 가지 조항으로 엄격한 사회질서 유지 ㆍ사유재산제 및 신분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이고,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하였으며, 고조선 이후 역사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의 나라들이 연이어 등장한다는 것은 역사의 영속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중학교 역사 교과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검정에서 국정으로, 다시 국정에서 검정으로 변경되었다. 『역사 1』은 한국고대사이고, 『역사 2』는 한국 근현대사 이다. 중학교는 현재 모두 7종의 검정교과서가 편찬되어 있으며, 교과서 별로 일부 내용이 다르다. 내용이 다른 것은 집필진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국사의 출발이자 시원을 밝히는 고조선에 대한 서술 내용은 통일성을 기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특히 중학생인 경우 독립된 교과목으로 역사를 본격적으로 접하는데, 교과서마다 내용은 다를 수는 있어도 고조선에 관한 역사인식에 차이가 있다면 혼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되기도 한다. 
 

고등학교 역사 교과

2011년부터 고등학교에서 개설되도록 되었던 『한국사』과목은 처음에 2007년 교육과정 고등학교 1학년 『역사』과목이었다. 『역사』과목도 필수에서 선택으로, 다시 필수로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한국사』과목은 근ㆍ현대사를 중심으로 세계사의 흐름 위에서 한국사를 주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고등학교 『한국사』는 검정 교과서로 현재 6종의 교과서가 편찬되어 나와 있다. 출판사의 집필진 구성에 따라 일부 내용이 다르고, 역사인식의 차이도 뚜렷한 것도 있다. 대체로 고조선 성립과 관련하여 고조선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로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다만,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와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로 고조선에 대한 역사인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기도 한다.
국정교과서 시기였던 『국사』도 연도에 따라 내용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조선 성립과 관련하여 『국사(1996)』에서는 “고조선은 단군왕검에 의하여 건국되었다고 한다.”, 『국사(2002)』에서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 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 『국사(2007)』에서는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고 하여 2007년에 비로소 교과서에 역사적 사실로 서술되었다. 이것은 사실 큰 변화이다. 많은 단체 및 기관들에서 역사교과서를 통하여 한국사를 바로 잡겠다는 노력들의 결과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2011년부터 현재의 『한국사』로 명칭이 바뀌고, 검정도서의 형태로 전환되면서 출판사에 따라 고조선에 대한 역사인식이 다르다는 것을 이렇듯 고조선 성립과 관련해서는 일부 역사인식을 달리하지만 나머지 내용들은 거의 유사하다. 다시 말하면, 고조선에 대한 역사인식에서 고조선 성립과 관련된 내용 말고는 쟁점사항이 없다는 말이 성립된다.
서술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였고, 단군왕검의 건국 이야기와 8조법을 통하여 농경사회, 사유재산의 성립과 계급의 분화에 따른 지배계급들이 농사와 형벌 등의 사회생활을 주도하였으며,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집권한 후 철기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세력을 넓혀 나가다가 한무제의 공격을 받아 고조선이 멸망하였다는 내용을 공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맺음말

고조선의 건국연대는 모든 역사교과서가 약속이나 한 듯 기원전 2333년이라고 되어 있다. 분명 사서마다 연대가 다른데, 유독 1485년 서거정이 편찬한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모든 역사교과서가 고조선 건국 배경을 설명할 때 공통적인 내용이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등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라는 사실이다. 고조선 건국 연대는 아무리 빨라도 청동기 시대를 거슬러 올라 갈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청동기 시작 연대와 고조선 건국 연대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가이다. 이미 교과서 수록 내용 중 첫 시작부터 모순을 갖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 대신에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이야기’라는 표현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신화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해소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게 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런데 신화가 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지는 그 동안 한국사의 주체가 한국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한국사는 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신화라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인식을 통한 역사의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고조선이라는 용어가 갖고 있는 함의도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고조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삼국유사』를 거론한다. 분명 『삼국유사』는 고조선을 풀어나가는 열쇠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고조선에 대한 역사인식에 따라『삼국유사』의 수록 내용을 취사선택할 때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조선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면 오늘날의 고조선은 대체로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즉 삼조선과 1392년에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거론하면서 고조선을 오늘날 사용하는 의미의 고조선을 상정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기자조선은 거론 자체를 안 하면서 위만조선은 부각을 시키고 있다. 교과서 수록 내용으로 보면,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농업과 수공업의 발달을 가져 왔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여 점차 강력한 국가가 됨에 따라 중국의 한나라 무제가 위협을 느껴 고조선을 공격하여 결국 고조선이 멸망하였으며, 한무제는 고조선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한군현의 위치와 연관이 된다. 요즈음은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국내학계에서는 한군현의 위치를 한반도로 보지 않고 있다. 고조선의 중심지역이 요령지방과 대동강 유역이라는 교과서 내용에 따르면 학계의 통설과 상반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중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조선전」의 내용을 고조선, 즉 단군조선으로 이해한 결과이다.

『사기』「조선전」의 내용은 위만조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위만국에 관한 것이다. 고조선의 세력범위 내에 있었던 오늘날의 요서지역에서 고조선이 이동하고 나자 기자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이 국호만 계속 ‘조선’으로 사용하였을 뿐 고조선, 즉 단군조선과는 다르다. 그런데 교과서에서는 위만조선을 고조선의 역사로 보는 이유로, 첫 번째, 위만은 고조선으로 들어 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세 번째, 위만은 고조선 토착민을 높은 지위에 많이 오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이유로 위만을 동이족 계통 혹은 조선인으로 보고, 그가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정도 연관성은 인정되지만 위만조선이 고조선 그 자체임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우리나라 사서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 사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모든 우리나라 사서에 공통적으로 수록된 ‘단군왕검의 건국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홍익인간이라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자 교육이념을 밝혀 주고 있다. 이것이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고조선 이후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동예, 옥저, 삼한 등 여러 나라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고려, 조선,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고 오늘의 대한민국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 즉 역사의 영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마다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저력이고 한류 열풍의 핵심인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교과서도 근대개혁을 위해 등장한 개화기의 근대 역사교과서로부터 오늘날의 현대 역사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제도상이나 형태상의 변화가 주를 이루었고 실질적인 내용의 변화는 미약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고조선의 역사인식과 관련해서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에서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라고 몇 자가 안 바뀌었지만 이것은 큰 변화임에는 틀림없다. 즉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까지 많은 노력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도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대한민국의 뿌리역사인 고조선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이 교과서에 반영되어 대한민국 교육이 진정한 개혁을 통해 올바른 역사의식 함양을 통한 민족적 자존감과 국가적 자부심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교육개혁은 교과서 개혁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하며, 특히 역사교과서의 개혁을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가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