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학예팀장이 21일 국학원 정기학술회의에서 '조선 초기 <동국사략>의 고조선 인식'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강만금 기자]


1403년(태종 3) 태종의 명으로 권근ㆍ하륜ㆍ이첨이 편찬한 《동국사략東國史略》은 상고사부터 고려 이전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편년체의 사서이다. 그 목적은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었지만, 여기에는 고조선 이후 삼국 이전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삼국 이전의 東國史를 정리한 최초의 관찬사서라는 점에서 그 의의는 분명하다. 아울러 그 인식론이 이후 편찬되는 《三國史節要》와 《東國通鑑》에 그대로 반영되어 우리 상고사 인식의 토대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 내용이 극히 일부만 전하여 체재와 내용을 모두 파악할 수 없어 아쉬움을 더한다.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는 고조선을 어떻게 보았을까.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학예팀장은 21일 국학원이 개최한 제28회 사단법인 국학원 정기학술회의에서 '조선 초기 《동국사략》의 고조선 인식'이라는 발제를 통해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삼조선 인식론의 확립"이라고 보았다. 김 팀장은 고려말 고조선 인식과 권근의 고조선 인식, 이첨의 고조선 인식을 검토하고 이를 반영한 《동국사략》의 고조선 인식을 검토하였다.  김 팀장의 발표 내용을 요약한다.

조선 초기 고조선에 대한 이해는 《三國遺事》와 《帝王韻紀》의 출현 이후 정리된 고려 후기의 인식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그 핵심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三朝鮮 인식이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고조선[왕검조선]․魏滿朝鮮, 《제왕운기》의 전조선, 후조선, 위만조선의 인식론을 구체화한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고조선'은 1392년 건국한 조선에 앞선 '조선'이란 의미로 삼조선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의 '고조선'은 위만조선에 앞선 '조선'이란 의미로, 조선 초기의 그것과는 인식체계가 다르다. 따라서 고조선에 대한 조선 초기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제왕운기》의 그것을 계승하고 있다. 전조선을 단군조선으로, 후조선을 기자조선으로 대체하여 역사적 위상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려는 결과였다고 보인다.


삼조선 인식은 이후 한국사 체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물론 이후 여러 양상의 인식론이 나타나고, 단군조선에 대한 이해의 확장으로 단군의 고조선 건국만을 고조선의 범주로 이해하고자하는 경향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초는 삼조선 인식체계에서 있었다.

 삼조선 인식론의 확립

《동국사략》과 《삼국사절요》,《동국통감》은 조선 전기에 편찬된 대표적인 관찬사서이다. 이 자료들에서 확인되는 고조선의 인식론은 최소한 조선 왕조의 고조선에 대한 공식입장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삼조선 체계의 인식이었다.


이미 고려 후기부터 단군에서 출발하는 고조선[전조선]은 자국사의 출발로 인식되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해당 항목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檀君記》나 《檀君本紀》의 명칭이나 하백녀와 부루로 설정된 가족과 계승 관계, 우임금의 도산(塗山) 조회에 단군의 아들 부루의 참석에 관한 전승에서 이미 일찍부터 역사인식론의 측면에서 고조선의 이해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고조선[전조선]에 대한 불신론도 있었을 것이다. 부루의 아들인 금와金蛙의 전승이 황당하다는 민사평(閔思平, 1295~1359)의 언급에서 고조선 건국신화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추측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동방의 역사가 중국 요임금 무진년에 출발하여 기자가 이를 계승하였다고 수차례 밝히고 있으면서도, 그 출발을 단군으로 확정하는데 주저하면서 ‘朝鮮氏’를 고집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단군부터의 歷年 설정은 구체화되어 이승휴는 이미 《제왕운기》에서 단군 원년 무진부터 왕건이 ‘삼한일통’을 이룬 태조 18년(918)까지를 3,288년으로 이해하였고, 전조선 이후 여러 나라가 모두 단군을 계승한 것으로 인식론의 체계화를 이루었다. 또 백문보白文寶는 1363년(공민왕 12) 흥왕사의 난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그 대처 방안을 제시하면서 주기설周期說을 토대로 단군에서 이때까지의 역년을 3,600년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상소를 올린 때의 역년을 이승휴의 이해 방식으로 적용하면, 3,717년이다. 120여년의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또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고기》를 인용하여 제시한 ‘요임금 즉위 50년 경인’과도 80여년의 차이를 보인다. 백문보가 제시한 단군 역년은 일연이나 이승휴, 그리고 《고기》의 이해와도 다른 것이다.
단군과 기자를 함께 편재하여 고조선[왕검조선]과 魏滿朝鮮으로 이루어져 있는 《삼국유사》와 전조선, 후조선, 衛滿朝鮮으로 구성된 《제왕운기》와 달리, 《동국사략》에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정리되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제왕운기》의 인식론을 수용하고 있지만, 위만조선과 비교되었던 전․후 조선을 단군․기자 조선으로 구체화하여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식을 더욱 공고하였다. 삼조선 체계의 역사인식론을 확정한 것이다. 이 같은 인식론은 동국 역사의 출발 단군조선, 敎化受命의 기자조선, 찬탈과 절거의 위만조선이라는 토대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인식론은 이미 고려 말부터 성리학을 수용한 사대부 계층에게서 확인된다. 전, 후조선과 위만조선으로 구성된 《제왕운기》의 조선역사인식은 이후 성리학을 수용한 사대부 계층에 의해 단군, 기자, 위만의 삼조선 체계로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위만조선과 같이 전, 후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좀더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한 방법에서 이루어졌다.
조선 건국을 주도하고 그 체제를 정비한 정도전(?~1398)의 《朝鮮經國典》(1394)에서의 삼조선 인식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정도전은 조선이란 국호의 久遠함으로 건국의 당위성과 향후 국정의 운영방향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그는 해동에서 조선을 일컬은 것이 단군ㆍ기자ㆍ위만 셋이라고 밝혔다.


 1396년 권근의 《응제시》와 고조선

權近(1352~1409)은 1396년(태조 5) 이른바 表箋 문제로 명나라 사행을 자처하였다. 이때 명 태조의 명으로 그는 《응제시》 24편을 지어 바쳤다. 여기에는 대명 사행이 지니는 목적에 충실하게 사대의식이 배어있다.

《응제시》에서의 조선은 기자의 유업을 계승한 의미로서 강조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권근은 기자에 앞서 단군조선이 동국 역사의 출발이었음을 표방하고 있다. 〈옛날 처음 개벽한 東夷王〉이 그것이다. 특히 역시 9월 22일 내린 명제 10수 중 이를 가장 처음 응제함으로서 단군조선이 진한ㆍ마한ㆍ변한에 앞선 동국 상고사의 출발이었음을 드러냈다.

〈옛날 처음 개벽한 東夷王〉[옛날에 神人이 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사람들이 임금으로 세 우고 檀君이라 불렀다. 때는 唐堯 원년 무진이었다]

단군의 출생을 중심으로 다양한 신화를 정리할 때 《응제시》 유형으로 분류되는 고조선 건국신화이다. 이 유형의 특징은 ‘壇君’이 아닌 ‘檀君’을 수용하면서도 신화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황당한 이야기를 대부분 걷어내고, 지극히 합리적인 이해의 틀 속에서 고조선의 건국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전거에서는 분명하지 않아 “ 들려오는 이야기에[聞說]”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권근이 고조선 건국신화를 소개하고 있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그리고 그 자료들에서 인용되고 있는 《魏書》, 《古記》, 《本紀》 등의 자료를 취신하고 있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서도 건국의 시기는 요임금 원년인 무진년이었다. “요와 같은 때[與高同時]”의 《삼국유사》의 기록보다 “요의 출발과 같은 무진년[並與帝高興戊辰]”이라는 《제왕운기》의 이해와 가깝다. 단군조선의 건국 시기와 달리 그 傳世에 대해서도 권근은 알 수 없다고 밝히는 한편, 역년은 천년이 넘었다고 읊고 있다.

권근에게 신왕조 조선은 단군과 기자를 모두 계승한 나라였다. 기자 이후의 산만하던 기강은 삼국과 고려를 거쳐 명 태조의 고명을 받은 신왕조에 와서야 비로소 바르게 되었다고 읊고 있다. 그는 고려 말에 행향사로 단군이 제천했던 곳으로 알려진 참성단에서의 초제 醮祭를 주관한 바 있고, 그 청사에서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그 행사가 단군의 그것을 잇는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음에서 더욱 그러하다. 《응제시》에서 단군이 조선 역사의 출발로서 요임금 원년 무진에 건국했음을 분명하게 하면서도 단군과 기자의 관계 속에서 신왕조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정도전의 그것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1396년 명 사행에서 권근이 명 태조의 명으로 지은 《응제시》에는 명과 조선의 관계적 친연성을 역사 전통 속에서 찾아 조선이 명의 번방이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기자의 유풍은 강조되고, 시 전편에 사대의식이 짙게 배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기자에 앞선 동국의 역사로서 단군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이를 시로 읊어 자국의 자존의식을 드러냈다. 그런데 권근이 인식하고 있던 상고사 인식 중 단군에 대한 것은 《삼국유사》, 《제왕운기》에서의 그것과는 다른 인식론을 보여주고 있다. “단목 아래로 내려온 단군이 요임금 원년 무진에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조선을 건국하여 천 여 년을 넘게 역년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의 이 같은 인식은 이후 조선시대 사류층의 단군조선 또는 단군 인식에 전범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응제시》에서의 상고사에 대한 이해는 1403년 제진되는 《동국사략》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었을 것이다.


 1396년 이첨의 동국사 정리와 고조선

신왕조의 건국에 반대했던 李詹(1345~1405)은 1396년 태조의 부름을 사양하였으면서도 한양에 머물며 《삼국사기》를 읽고 이를 3권으로 축약하였다. 그가 편찬한 사서의 체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편년을 중심으로 한 강목법을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이후 편찬되는 《동국사략》,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등의 체제와 비교할 때, 그렇게 추측된다. 이때 단군, 기자, 위만 조선 등 삼국 이전의 상고사 부분은 外紀로 편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동국 역사의 출발을 삼조선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서의 삼조선은 《제왕운기》의 전, 후 조선과 위만조선이 아닌 단군, 기자, 위만 조선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1396년 저술된 이첨의 사서에서는 삼국 이전의 상고사는 《삼국유사》, 삼국시대의 역사는 《삼국사기》를 토대로 고조선 이후 고려 이전까지의 동국사를 정리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첨의 삼조선 인식은 《제왕운기》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삼국유사》의 내용을 절충한 새로운 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가 편찬한 사서에서의 상고사 인식체계가 최소한 《제왕운기》를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우선 이첨이 이해하고 있던 고조선은 《삼국유사》에서 지칭하는 역사적 개념의 왕검조선을 지칭하고 있지 않다. 지리적 개념이 보다 강하다. 특히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서술은 魏滿朝鮮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이첨은 사서를 편찬하면서 단군조선의 역사성을 담보하기 위해 여러 자료들에 대해 많은 검토를 하였다. 이 사서를 편찬하던 1396년 경 이첨은 아직 조선에 출사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태조의 부름을 받고 지방에서 올라와 한양에 머물고 있었으며, 그해 겨울 명나라 사행을 함으로서 신왕조의 적극 참여하였다. 따라서 이첨의 동국사 편찬은 앞서 신왕조의 개창에 반대하였던 입장에서 선회하여 그 건국의 정당성을 역사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이 점에서 이첨과 함께 《동국사략》의 편찬에 참여했던 권근과 하륜 역시 같은 성향의 인물들이었다는 점은 참고할 수 있다.


이첨의 상고사 인식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위서》를 인용하여 2천년전인 요임금과 같은 때에 아사달산에 도읍하고 조선을 개국했다는 ‘단군조선’의 서술이다. 이 기록의 출발은 《삼국유사》이지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첨이 이것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연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위서》의 존재를 주목했고, 이를 魏滿朝鮮의 역사서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기자조선’조에서는 물론, 위만의 한자 표기를 ‘魏滿’으로 사용하고 있음은 이를 의미한다. 이렇게 했을 때, 《삼국유사》 ‘고조선[왕검조선]’조의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역사적 사실로서 한층 합리적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그는 간파하고 있었다. 그것은 더 나아가 《삼국유사》에서 위만조선에 앞서 있던 고조선의 존재를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근거와 함께 삼조선의 인식체계를 확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1403년 《동국사략》의 고조선 서술과 인식

1402년(태종 2) 6월 왕명으로 좌정승 하륜(河崙, 1347~1416), 참찬 권근, 지의정 이첨은 《동국사략》을 편수하여 1403년 8월에 완료하였다. 이 사서는 일명 《三國史略》으로도 불리는데, 조선 건국 후 고려 이전의 동국사를 강목법을 이용하여 편년체 형식으로 정리한 최초의 관찬사서라는 점, 여기서의 역사인식이 《삼국사절요》, 《동국통감》을 통해 보완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자국사 이해에 대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후일 이 사서는 왕의 경연에서 활용되었고, 신료들에게도 하사되어 私處에서의 보관도 가능하였으며, 전강(殿講)의 자료로 활용되는 한편, 《삼국사기》, 《高麗全史》, 《고려사절요》, 《高麗史全文》, 《삼국사절요》 등과 함께 왕실에서 수장할 가치가 높은 책으로 인정되었다.


《동국사략》은 당대에 학문으로 명성을 떨친 세 사람이 편찬에 참여했지만, 권근에 의해 작업이 주도되었다. 그렇다고 다른 두 사람이 편찬 작업에 전혀 참여하지는 않았겠지만, 단연 권근의 역할이 뛰어났다. 특히 고조선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권근, 이첨과 함께 하륜 역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랜 옛날 檀君氏가 처음 천명을 받아 단군조선을 열었으나, 기록이 없어 상고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또 위만에 대해서는 연로(燕虜)로 폄칭하여 유교적인 역사관이 투영되어 있다. 이런 인식은 1412년(태종 12) 국가제사에서 동방의 시조인 단군과 기자를 한 廟에 合祀하려는 논의와 결과를 도출하기도 하였다.
현재 《동국사략》은 완질이 아닌 권3~4의 영본만 전해지고 있어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특히 이 글의 주제인 고조선이 서술되었을 권1도 그 범위에 속해 있다. 권근은 이의 편찬을 마무리하면서 그 서문과 왕에게 바치는 箋文을 썼는데, 이를 통해 먼저 여기서의 고조선 서술의 문제를 검토하기로 한다.

"우리 해동에 나라가 생긴 것이 맨 처음에 단군조선부터 시작하였는데, 그때는 까마득한 옛날이라 민속이 순박하였고, 기자가 封함을 받아 八條之敎를 행하였으니, 문물과 예의 의 아름다움이 실제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위만이 탈취해 점거하고 한 무제가 군사 를 일으켜 무력을 남용한 이후부터는 혹 四郡도 되었다가 혹 二府)도 되어 여러 번 병란을 겪어 文籍이 전해지지 못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

… 바다 모퉁이에 있는 우리나라는 실로 하늘이 마련한 땅입니다. 단군이 개국한 때부 터 천 년을 서로 계승하였고, 기자가 봉함을 받게 되어서는 八條로 정치를 하였으나, 연대가 이미 멀고 문적도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四郡은 오이쪽처럼 되어 형세는 오래 제어하기 어려웠고, 삼국은 솥발같이 대치하여 힘으로는 능히 합병할 수 없었으며, 날 마다 전쟁이 계속되어 당시에는 겨우 《國史》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설을 기록하는 것은 흔히 황당 괴이한데 흘렀고, 본 것을 적는 데도 자세하고 명백함을 다하 지 못하였습니다. "

편년체로 강목법을 적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동국사략》에서 동국 상고사가 어떤 편재에서 어떻게 서술되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서문에서 단군, 기자, 衛滿의 삼조선을 거쳐 4군 2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삼조선에 대한 평가는 홍황鴻荒의 때 민속이 순박했던 단군조선, 8조의 가르침으로 문물, 예의의 미덕에 토대를 마련한 기자조선, 竊據하여 한 무제에게 평정을 당했던 위만조선 등으로 간략하지만, 기본적인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인식론은 《동국사략》을 바치는 전문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천 여 년을 역년한 단군조선, 8조의 가르침으로 다스린 기자조선, 그리고 4군에 대한 서술이다. 위만조선은 아예 언급조차 없다. 동국사의 역사계승인식에서 위만조선은 한 발 비켜 있었다. 이것은 고려 후기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의 인식과 사뭇 다르다.
여기에서 1396년 권근이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지은 《응제시》에서의 단군 인식과 이첨이 《삼국사기》를 축약하는 과정에서 정리한 삼조선에 대한 인식을 재언급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동국사략》의 편찬에 참여하였지만, 그 인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조선 건국신화에 대한 불신론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 점에서는 우선 권근이 삼국의 건국신화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다음의 이해를 참고할 수 있다.

공자가 詩書를 산삭할 때 唐虞로부터 끊어 버렸으니 대개 당우 이전은 世道가 홍황하여 가히 다 믿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당우 이후는 중국의 서적에 괴이한 일들이 이미 없 다. 삼국 시조의 출생은 모두 漢과 같은 시기인데 어찌 이와 같이 괴이한 일이 있겠는 가. 오직 시조만 그런 것이 아니라 閼英과 脫解의 출생 또한 모두 괴이하고 일반적인 것이 아니니, 어찌 그 초기에 바닷가에 있던 곳에 있는 백성들이 순박하고 무지하여 그 중에 한번 詭說을 하는 사람이 있어 모두 이를 믿고 神으로 섬겨 후세에 전한 것이 아 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 괴이함이 많을 수 있겠는가.

《동국통감》의 이 사론은 삼국의 건국신화에 대한 권근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삼국 시조의 출생신화는 물론 알영과 탈해의 출생담까지 괴이한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중국과 떨어진 해우海隅(바닷가) 백성들의 무지함에서 비롯한 것이라 판단한다. 그랬기 때문에 누가 궤변을 늘어놓자 이를 믿고 나아가 神으로 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조선 건국신화에 대한 이해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소재의 고조선 건국신화에 주목하지 않고, 檀木 아래로 내려온 단군이 나라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건국하였다는 것으로 개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건국 연대는 요 원년 무진년이었고, 역년은 천 여 년이 넘는다고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고조선 건국신화에 대한 불신론은 하륜이나 이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유사》 찬술이후 그 기록을 처음 인용한 것으로 확인되는 이첨에게도 《고기》의 고조선 건국신화는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삼국유사》를 적극 활용하여 《魏書》의 고조선 건국 사실을 서술한 그는 《고기》의 내용을 불신하였다. 그러면서도 魏滿朝鮮의 사서로 이해하였던 《위서》를 통해 단군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권근과 이첨은 기자에 앞서 단군조선이 동국 역사의 출발이었음을 확고하게 인식하였다. 그때는 ‘요 원년 무진’ 또는 ‘요와 같은 때’였고, 천 여 년 넘게 역년하였다고 이해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사뭇 다르다. 먼저 도읍에 대해 권근은 《응제시》에서 언급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것은 시라는 한계에서 비롯한 것으로, 〈고려 고경〉과 〈대동강〉 등에서 기자와 평양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단군조선의 도읍을 평양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에 비해 이첨은 단군의 도읍을 아사달산으로 인식하였다. 물론 이 역시 《삼국유사》의 인식론에 기초한 것이다. 특히 그는 평양에 대해서는 “평양에 도읍하고 백악산으로 옮겼다고도 하지만 옳고 그름을 알 수 없다”고 하여 불신의 입장이 강하다. 단군조선의 인식과 관련해서 두 사람에게 보이는 첫 번째 다른 점이다.


두 번째 다른 점은 자료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두 사람이 《고기》나 《본기》 등의 국내자료를 불신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여기에도 온도 차이가 있다. 국내 자료에 대해 권근은 궤변을 늘어놓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이해하였을 것이지만, 이첨의 경우는 《위서》에 대한 취신론의 입장에 있다. 그렇다고 그가 동국 역사의 하나로서 위만조선을 긍정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서》를 위만조선의 역사서로 파악하여 단군조선의 역사적 근거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들려오는 이야기[聞說]”에 기대고 있는 권근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그런데 단군조선을 비롯한 삼조선에 대한 이첨의 이해와 저술은 《동국사략》에 채택되지 못했다. 물론 그가 《동국사략》 찬술의 명을 받고도 명나라 사행을 떠나 그 작업에 적극 참여하지 못한 것에 원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선적인 이해 방식에 불과하다. 그는 명으로의 사행을 떠나면서 이미 그가 작업한 상고사와 관련한 내용을 권근에게 전달하였다. 그렇다면 삼조선에 대한 수찬 역시 이첨이 담당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점에서 《쌍매당협장집》의 삼조선에 대한 서술은 당연히 주목된다. 1396년 《삼국사기》를 3권으로 정리하면서 상고사 부분 역시 정리되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때 정리된 이첨의 삼조선에 대한 서술이 1402년 《동국사략》 찬술의 명으로 정리한 삼조선 서술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차이가 없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이 채택되지 못하고, 권근의 인식론이 반영되었다. 이것은 《위서》에 대한 자료로서의 불확실성과 위만조선에 대한 상이한 견해, 단군조선의 도읍지에 대한 입장 등이 원인이었다고 추측된다.


이후 단군조선에 대한 권근의 인식은 조선시대 인식론의 주류가 되어 《동국사략》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추진된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의 〈단군조선〉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 대략은 “처음 君長이 없던 동방에 神人이 檀木 아래로 내려와 나라사람들의 추대로 군장이 되었으니, 이가 단군이다. 국호를 조선으로 하였는데, 요임금 무진년이다. 도읍은 평양으로 하였다가 후에 白岳으로 옮겼다. 상나라 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맺는 말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찬술로 고려 후기부터 단군에서 출발하는 고조선[전조선]은 자국사의 출발로 인식되었다. 이에 단군의 御國․理․享國 역시 구체적으로 제시되었고, 단군부터 고려 후기 당대까지의 역년도 설정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것은 고조선[전조선]이 고려 역사의 출발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인식론에서는 고조선[왕검조선]ㆍ魏滿朝鮮의 체계(《삼국유사》)와 전조선, 후조선, 衛滿朝鮮(《제왕운기》)의 체계가 있었다.


고려 후기 성리학 수용자들은 대체로 이 중에서 《제왕운기》의 삼조선 인식론을 수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색에게서 확인되는 것과 같이 단군의 존재를 확정하지 못하고 ‘조선씨’로 특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위만조선과 달리 전ㆍ후조선의 인식론은 역사적 실체를 드러내는데 한계가 있어 그 건국의 시조를 특정함으로서 전조선은 단군조선, 후조선은 기자조선으로 하여 위만조선과 함께하는 삼조선 인식론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羅繼從에게서 보이는 바와 같이 (1339~1415) 고려 말부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말 성리학 수용자들의 동국 상고사 인식은 앞 시대의 그것보다 진전되어 있었다. 또 조선 건국 후 1394년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에서 언급하고 있는 단군ㆍ기자ㆍ위만의 삼조선 인식론은 그 연장선에 있다. 동국 역사의 출발 단군조선, 敎化受命의 기자조선, 찬탈과 절거의 위만조선이라는 토대가 그것이다.


1402년(태종 2) 6월 왕명으로 고려 이전의 역사를 찬수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동국사략》이 그것이다. 하륜․권근․이첨이 참여한 이 작업은 이듬해 8월 완성된다. 1년 2개월만이다. 그 와중에 하륜과 이첨은 1402년 10월 명나라 사행을 가서 이듬해 4월에 귀국하여 《동국사략》의 수찬은 거의 권근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런데 권근의 삼조선 인식, 특히 단군조선에 대한 인식은 앞서 1396년(태조 5) 명나라 태조의 응제 명에 의해 제진한 《응제시》에서 그 대략을 읽을 수 있다. 또 이첨의 인식론은 역시 같은 해 《삼국사기》를 3권으로 축약한 사서에서 확인된다.


《삼국사절요》나 《동국통감》에 반영되었을 권근의 인식과 이첨의 그것은 차이를 지니고 있다. 고조선 건국신화에 대한 불신의 입장은 두 사람 모두 같았지만, 권근은 《제왕운기》의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반면, 이첨은 《삼국유사》의 인식론을 비판 수용하고 있다. 그들에게 고조선은 동국 역사의 출발로 자각되었지만, 도읍지나 위만조선에 대한 이해 방식은 달랐다. 권근은 단군의 初都地를 평양으로 보고 있으나, 이첨은 아사달산으로 보았다. 단군조선의 존재에 대한 전거 역시 권근이 “전해오는 이야기[聞說]”에 기대고 있다면, 이첨은 魏滿朝鮮의 사서라고 파악한 《魏書》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고조선 건국신화의 이해에서도 권근은 “檀木 아래로 내려온 神人이 중국 요임금 원년인 무진년에 나라사람들의 추대로 왕이 되어 단군으로 불렸다”는 《응제시》 유형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지만, 이첨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들 모두 《古記》,《本紀》 등의 자료를 불신하고 있었지만, 《魏書》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견해를 보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단군과 기자의 관계를 적극 수용하여 신왕조 ‘조선’의 역사적 전통이 두 개의 조선 모두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동국사략》을 수찬할 때 삼국 초기 이전 부분은 이첨이 담당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그는 앞서 《삼국사기》를 정리하면서 상고사 부분 역시 별도로 정리하였고, 《동국사략》의 편찬에 그 자료를 활용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은 채택되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권근의 인식론이 반영되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위서》에 대한 자료로서의 불확실성과 위만조선에 대한 상이한 견해, 단군조선의 도읍지에 대한 입장 등이 원인이었다고 추측된다. 이후 단군조선에 대한 권근의 인식은 조선시대 인식론의 주류가 되어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의 〈단군조선〉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면서도 후자의 자료들에는 새로운 내용과 인식들이 추가되었다. 이 문제는 향후 검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