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 년 고도 경주 속에 오롯이 간직된 한민족 고유의 천손문화를 찾는다!

지난 25~26일, 경주에서는 아주 특별한 문화탐방행사가 있었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의 천손문화연구회가 주최한 '경주 선도문화탐방'이 바로 그것. 선도문화는 한민족 전통의 '하늘문화(제천문화)'로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인 화랑도, 고구려의 조의선인 등이 이 선도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나들었지만, 한민족 고유의 선도문화를 향한 천손문화연구회원들의 뜨거운 열정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그 현장을 기자가 동행 취재하였다.

※ 천손문화연구회 경주 선도문화탐방 기획기사
[1편] 신라건국의 비밀 - 오릉, 알영정, 숭덕전
[2편] 신라의 불교 수용과 한국 선도의 쇠락 - 천경림 흥륜사, 무열왕릉, 서악리 고분군
[3편] 파소신녀의 마음을 느끼며 선도산을 오르다 - 서악리 삼층석탑, 선도산 성모사, 선도산 정상 적석단, 금척리 고분군

# 선도산을 오르며

태종 무열왕릉을 뒤로하고 다음 답사지로 가기 위해 차에 탑승한 기자는 다음 장소인 선도산 성모사를 가려면 한 시간 정도 등산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적잖이 당황하였다. 평소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도착할 때까지 정말  마음의 준비를 많이 해야 했다.

선도산 입구에 도착하니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고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일부 고분은 봉분 위로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기도 하였다. 고분들 사이로 눈에 띈 것은 3층 석탑이었다.

▲ 서악리 삼층석탑. 뒤쪽으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무덤들이 많았다.

탑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탑의 원형이 환웅의 배달국 유적인 홍산문화의 피라미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홍산문화의 피라미드는 무덤이면서 제천단으로 그 역할과 형태가 변형되어 사리를 봉안한 일종의 무덤인 탑이 되었던 것이다. 불교 유적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탑도 환웅의 배달국 유적과 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탑을 둘러보며 정경희 교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산에 올라갈 준비를 하였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하여 이번 답사의 훌륭한 가이드이자, 경주에서 단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 경주 토박이 김의식 회원의 지도에 따라 간단한 기체조를 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장시간 이동으로 몸이 찌뿌둥했던 회원들은 기체조 시간을 매우 반기며 진지하게 따라 했다.

 

▲ '어이 시원하다~' 마치 이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이 기체조를 했다..

▲ 기체조 도중 웃고 있는 천손문화연구회 회원

경주의 서쪽에 있는 선도산은 '산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서라벌에 홍수가 났다'는 김유신의 누이동생 꿈에 나오는 산으로도 잘 알려졌다. 선도산은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파소신녀를 모신 성모사와 적석제천단이 있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 파소신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선도사서 『징심록』의 1장 부도지에서는  박혁거세의 왕호가 거서간(居西干)이 된 이유를 밝혔다. 거서간은 '서방에 의거하여 경계하는 방어장(防禦長)'이라는 뜻으로, '서방(西方)'은 '서침하여 거짓도(詐道)를 행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서쪽의 사도(詐道)를 행하는 무리로부터 파소신녀는 북부여에서 이어온 단군조선의 선도전통을 지키기 위해 경주의 서쪽, 선도산에 올랐으리라.

▲ 선도산을 오르는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 주변의 소나무들과 어울려 마치 선계로 들어가는 듯 하다.

단군조선의 선도 전통이 끊어진 지 어느덧 2000년. 2000년 동안 파소신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선도의 맥을 잇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맥, 그 정신, 그 얼을 잇고자 하는 한마음으로 모인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은 모두 2000년 전 파소신녀가 되어 선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선도산을 오르는 길은 예상외로 평탄하였다. 몇몇 회원들은 선도산의 에너지를 더 가까이 느끼고 싶다며 신발을 벗고 맨발로 산을 오르기도 하였다.

▲ 맨발로 산을 오르는 천손문화연구회의 몇몇 회원들.

한참을 산을 오르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무언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아니, 이곳의 나무들은 왜 잎사귀는 없고 중심 기둥만 뻗어 있는 것이지?

"4년 전인가.. 여기 선도산에서 큰불이 났습니다. 몇 시간을 탔더라.. 엄청나게 큰불이었어요. 이 나무들은 그 때 다 탄 겁니다."

경주 토박이 김의식 회원이 말했다. 장장 6시간에 걸쳐 겨우 진화되었을 정도로 큰불의 발단은 성묘객의 향불이었다는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산에서는 꺼진 불도 다시 보고, 또 보고, 한 번 더 보아야 하는 이유를 선도산의 타고 남은 나무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느꼈다.

▲ 먼저 올라온 회원들이 다른 회원들을 기다리고 있다. 회원들의 뒤쪽을 화마가 할퀴고 간 무시무시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선도산 성모사

산을 오른 지 한 시간. 목적지였던 성모사에 도착을 하였다. 성모사는 선도산 정상에 가깝게 위치를 하였기에 이곳에서는 경주 시내가 고스란히 내려다보였다. 

 

▲ 성모사에서 내려본 경주시내.

성모사 옆의 큰 바위에는 마애여래삼존입상이 있었다. 설명판에 따르면 신라 사람들은 성모(聖母)가 있는 이곳을 서방정토라고 생각하여 아미타 여래상을 새겼다고 한다. 그런데 선도 유래를 간직한 성모사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설명도 없었다. 이곳이 '성모사'라는 것도 전각의 간판을 보고 알았을 뿐, 무엇을 하는 곳인지, 왜 여기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 선도산 성모사 전각 전경. 현재 건물은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증축하였다.

"이곳이 파소신녀를 모신 사당, 성모사입니다."
모두 모이자 성모사 유래를 정경희 교수가 설명을 하였다.

"성모사와 파소신녀에 대해서 『환단고기』와 『영해박씨 세보』에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여기는 지금은 경주시와는 관계없이 박씨족의 개인 사당입니다. 일 년에 한 번 박씨 집안의 여자들만 모여 파소신녀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삼국사기』는 파소신녀에 대해서 '부여 제실의 女'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변질이 됩니다. 바로 '중국 제실의 딸'이라고 표현이 돼요. 선도 전통을 잇고자 한 파소신녀 전승은 '선도산 성모'라 불리며 여러 측면에서 변질이 됩니다. 진평왕 시절, 안흥사라는 절에 지혜라는 비구니가 불사를 하고 싶은데 돈이 없었다고 해요. 그러자 꿈에 선도산 성모가 나와서 도와주었다고 하죠.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전의 신(神)들은 퇴거신이라하여 불교를 도와주는 호법신으로 모양을 바꾸게 되는데 파소신녀 역시 이렇게 변질이 되어 전해지게 됩니다."

어쩐지 성모사에 대한 설명이 없어도 너무 없더라니.. 고개를 끄덕이며 천손문화연구회원들은 더욱 집중 하였다.

 

▲ 성모사 유래를 듣고 있는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

"한민족 선도전통을 잇고 있었던 단군조선이 망하고 2000년이 지나면서 많은 부분이 변질이 되고, 훼손되어 그 원형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누가 『부도지』 전승을 이해하고, 누가 파소신녀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선도전통과 그 맥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천손문화연구회가 이곳에 온 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현재의 성모사 건물은 1970년대 박씨 문중에서 증축한 것으로 원래 성모사 터는 지금의 위치에서 조금 더 산기슭 쪽에 있다고 한다. 지금은 옛터에 담을 치고 유허비를 세워 그곳이 성모사의 옛터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 선도산 정상 적석단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은 발걸음을 선도산 정상을 향하여 갔다. 성모사에서 5분 정도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그리고 사람 키보다 조금 더 큰 3개의 적석단이 있었다.

▲ 선도산 정상 적석단과 명상을 하고 있는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

머무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이든 제천단을 만들어 하늘과 소통을 하고자 했던 우리 민족이었다. 선도산 정상에 있는 3개의 적석단 역시 하늘에 제를 올리던 제천단으로 보여진다. 2천 년 전, 환웅의 배달국에서 단군조선, 그리고 북부여로 이어진 선도전통의 법맥을 잇기 위하여 경주까지 찾아온 파소신녀가 선도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올랐던 선도산. 그리고 그 정상에 제천단을 쌓아 하늘과 통하고,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간절함이 담긴 이곳에서 천손문화연구회는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듯 흐르고 햇볕과 나무의 그림자가 명상을 통하여 내면을 바라보는 회원들과 어우러져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 파소신녀의 마음을 느끼며 명상을 하는 회원들.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명상을 마친 후, 모두가 둥글게 둘러앉아 선도산과 성모사를 둘러보고 이곳에서 명상하며 받은 느낌을 이야기하였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석사과정 김윤숙(59)회원은 "『부도지』나 『환단고기』를 읽어도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파소신녀와 관련이 있는 곳에 와보니 파소신녀로부터 전해지는 역사의 끝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역사가 이어지는 것이 실감이 난다"고 하여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김성규(46, 회계사)회원은 "다가오는 2000년 뒤 우리의 후손은 '우리를 어떻게 평가를 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세월이 한순간이고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남는다. 지금 이 순간 집중해서 우리에게 남겨진 천손문화 부활이라는 사명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해야겠다"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교사인 정부용(45)회원은 "맥박이 고동을 친다""기대감으로 답사를 시작했는데 가슴이 먹먹하다. 늘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물어도 답이 없었는데 이 시간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조심스럽지만 내가 나가야 하는 길을 보는 기점이 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여  모두에게 떨리는 감동을 전해주었다.

우리 민족의 3대 경전 중 하나인 『참전계경』 중 34사 진산(塵山)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티끌이 바람에 날려 산기슭에 오랜 세월 쌓이기를 거듭하며 산 하나를 이루게 된다. 지극히 작은 티끌 먼지가 모여 지극히 큰 산을 이루는 것은 바람이 쉬지 않고 티끌을 몰고 오기 때문이다. 정성 또한 이와 같아서 쉬지 않고 정성을 다하면 정성의 산을 가히 이룰 수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천손문화 부활을 꿈꾸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우주의 티끌과 같이 작은 존재이지만, 이 마음들이 모이고 또 모이면 천손문화의 부활이 이루어 질 것이 믿어 의심치 않는 순간이었다.

# 금척리 고분군

선도산에서 느낀 감동과 사명을 다지며 내려온 우리는 답사의  첫째 날을 마무리할 금척리 고분군으로 이동하였다. 선도산에서의 감동과 체험이 강력하였는지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내내 그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회원이 정경희 교수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선도산이면 보통 신선 선(仙)에 길 도(道)를 쓰지 않나요? 여기는 왜 복숭아 도(桃)를 쓴 건가요?"

"후대 중국 도교의 영향이예요. 각종 도교 전승을 보면 복숭아나무가 불로장생의 상징이죠. 그 의미가 변질이 된 것입니다. "

파소신녀가 중국의 사도로부터 선도 전통을 지켜내기 위하여 경주 서쪽의 선도산에 올랐거늘, 결국 도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많은 부분이 도교와 습합이 되어버린 우리의 정신과 역사를 생각해보면 다시는 이렇게 우리의 정신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10여 분 차를 달렸을까. '금척리'라고 쓰인 이정표를 찾았다. 그리고 도로변에는 족히 20~30여 기는 되어 보이는 고분들이 즐비하였다. 길을 걷다 가도 천 여년 전의 무덤을 아주 쉽게 만날 수 있고, 이렇게 생활 속 깊숙이 무덤과 친근하게 지내는 곳도 세계에서 경주가 유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금척리 고분군 전경. 허벅지까지 올라올 정도로 길게 자란 풀들을 헤지고 들어가야 설명을 볼 수 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금척리 고분군으로 들어갔다. 금척리 고분군은 손질이 잘되어 있는 대릉원이나 계림과 달리 사람의 허벅지까지 길게 자란 풀이 빽빽하게 있어서 우리는 이를 헤치며 금척리 고분군 설명판 앞까지 가야 했다. 이번 경주 답사를 하며 날씨가 매우 덥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반바지를 챙겨온 것이 매우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 금척리 고분군에 대한 설명을 보고 있는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

'금척(金尺)'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꿈속의 신령에게 받은 금자로 병든 사람에게 대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에게 가져다 대면 살아난다는 신물이다. 금척은 왕위의 표식으로 삼국통일 전후 당나라 사신이 가져가려 하자 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현재 금척리 고분군 자리에 수십 개의 무덤을 만들어 그 중 한 곳에 파묻어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숨겨둔 자리를 잊어버려 결국 금척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금척은 후일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금척은 아마 파소신녀가 북부여에서 내려올 때 가져온 신물이었을 것입니다. 파소신녀는 북부여의 신녀집단 중에서 최고위층의 신녀였으니, 아마도 정통성을 계승하는 신물을 접할 수 있었겠죠. 그렇다고 아픈 사람에게 대면 병이 낫는다? 실제 현상적으로 그렇다기보다는 선도문화가 추구하는, 사람 내면의 밝음을 깨우는 것의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진짜 밝은 빛은 수행을 통하여 사람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인데, 사람 내면의 밝은 빛을 추구하는 문화가 사라지고 그 감각을 잊어버리면 어떻겠어요? 눈에 보이는 밝은 빛을 찾게 됩니다. 흉노계통의 김씨 왕족이 금을 좋아하는것도 수행을 하는 선도전통을 잃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밝음을 좋아하는 것이지요. 김씨왕들은 금척(金尺)과 옥적(玉笛)이라는 박씨족 신물을 다른 것으로 대체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당나라에서 달라고 해서 묻어버렸다는 것은 진짜라기보다는 다분히 의도적이죠."

▲ 천년고도 경주의 해가 지고 있다. 금척리 고분군에서 바라본 일몰.

지금 여기 금척리 고분군을 파면 금척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가 곧 접었다. 금척은 사람의 내면의 밝음을 깨워주는 상징적인 존재, 2천 년 전의 신물을 찾기 보다는 이 시대의 금척을 만들어 널리 알리는 것이 이 시대에 태어난 우리의 사명이 아닐까?

어느새 해는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 천손문화연구회 경주 선도문화탐방 네번째 기획기사 ::
[4편] 빛이 내려온 곳 - 밝바위, 광림대, 탈해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