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지배 사회에서 여성은 ‘두문불출’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돼 왔다. ‘밖’은 여성들에게 부정적이고 위험한 공간으로 존재하는 곳이었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순한 일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집안에서 조신하게 앉아 아버지-남편-아들에게 의존하는 삼종지도의 예와 덕을 실천하는 여성들을 최고의 여성으로 꼽는 사회다. 그러나 가믄장은, 오히려 ‘밖’이라는 공중으로 나와 ‘지 까짓 게, 이 정도쯤이야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어’라면서 정면으로 돌파하고 부딪치는 자세를 취한다. 우리는 제주도의 많은 여성에게서 여신 가믄장아기를 만날 수 있다.”

김정숙 제주신화 연구가는 10일 서울대 수의대 스코필드홀에서 열린 ‘대륙간 여신 학술회’에 참석해 새로운 여성상을 제주 여신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와 마고아카데미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날 행사는 국내외 여신 관련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제주의 여신을 주목하라!

▲ 10일 서울대 수의대 스코필드홀에서 ‘대륙간 여신 학술회’가 열린 가운데, 김정숙 제주신화연구가가 발표하고 있다.
이날 김정숙 제주신화 연구가(애월고등학교 교사)는 “제주 1만 8천위의 신 중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한 생활력과 도전 정신을 가진 신들이 대부분”이라며 “그중 여신이 75%로 남신보다 월등히 많다”고 말했다.

그는 제주도를 창조하고 육지까지 다리를 놓으려 한 창조의 여신 설문대할망, 농경신 자청비, 운명을 개척한 전상신 가믄장아기 등을 소개했다. 제주신화의 이공본풀이에 등장하는 전상신 가믄장 아기를 만나본다.

가난한 집의 자식으로 막내로 태어난 가믄장아기는 ‘가난’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결핍된 존재다. 그런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가믄장아기는 경제력과 독립의 성취를 위해 매진한다.

어느 날 부모는 딸 셋에게 ‘누구의 덕으로 먹고사느냐’ 묻는다. 첫째와 둘째 딸은 ‘하늘과 땅 덕이요, 아버님 어머님 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믄장아기는 ‘하늘과 땅 덕이요, 아버님 어머님 덕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배꼽 아래 선그믓(陰部) 덕으로 먹고 입고 행동한다’고 대답한다.

이 대답으로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적이었던 언니들은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한 가믄장아기는 방 밖으로 내쫓기는 벌을 받는다.

이에 대해 김 연구가는 “가믄장은, 오히려 ‘밖’이라는 공중으로 나와 ‘지 까짓 게, 이 정도쯤이야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어’라면서 정면으로 돌파하고 부딪치는 자세를 취한다. 그래서 ‘난 잘 못하겠다’-모른 척 함, 못하는 체함, 약해 보임, 움츠러듦, 소극, 숨김, 양보, 포기, 조신함이 아니라, ‘이 정도쯤이야’-해 보려 함, 덤빔, 드셈, 극복, 도전, 적극, 용감 등의 자세를 선택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제주도의 많은 여성들에게서 여신 가믄장아기를 만날 수 있다. 여신 가믄장아기가 늠름하듯, 가믄장을 닮은 제주여성들은 늠름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귀여운 여인의 역할을 하는 것을 스스로 우스꽝스럽다고 느낀다.”라며 “험한 세상사에 대한 적극적 도전과 성공, 현실적인 감각, 실용적인 태도, 자아 지향적인 욕구,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강한 희구 등은 많은 제주의 가믄장아기 여성들이 가진 특징이다”이라고 설명했다.

바리데기는 구원의 여신

신동흔 건국대 교수는 무신으로 알려진 바리데기가 부모를 살릴 약수를 찾아 저승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우주와 소통하면서 합일해나가는 초극의 과정으로 해석했다.

한국 신화에서 바리데기는 무당의 조상신으로 모셔지는 존재이며, 또한 죽은 사람의 넋을 저승으로 천도하는 존재이다. 바리데기는 버림받은 존재로서 자기를 버린 세상을 구원하는 대샤먼적 존재로 이해되었다. 망자의 죄(罪)와 한(恨)을 씻어내 저승의 안식을 베푸는 영혼의 수호신 내지 생명의 여신으로 이해되었다.

신 교수는 바리데기가 보여주는 구원의 힘에 주목했다.

바리데기는 태어나자마자 바다 또는 산에 버려진다. 바다와 산은 대자연의 표상이라는 것. 바리데기는 절대적 고독 속에 광활한 대자연을 홀로 움직이는 가운데 자연의 신령한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면서 존재의 근원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근거는 동해안 <바리데기> 신화에서 바리데기가 산신령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이후 바리데기는 부모를 살릴 약수를 찾아 서천서역 저승을 향해 나아간다. 이에 대해 신 교수는 “그 여정 또한 대자연 속에서 우주와 소통하면서 합일해 나가는 초극의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라며 “그를 통해 바리데기는 죽음을 삶으로 바꾸는 힘(약수)를 얻을 수 있었으며, 자기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 빛과 생명과 전하는 구원의 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 10일 서울대 수의대 스코필드홀에서 열린 ‘대륙간 여신 학술회’. 왼쪽부터 영화제작자 김반야, 마고문화연구가 황혜숙 박사, 류정희 한국 브라마쿠마리스협회장, 미술가 리디아 루일, 조승미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 김선자 연세대 교수, 김봉준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 신동흔 건국대 교수.

조승미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는 ‘미륵은 어떻게 여신이 되었나? 한국불교 문화 속의 여신신앙 탐색’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조 교수는 “조선 후기에 등장한 미륵할미는 여신을 섬기는 고대 여신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땅에서 솟아나는 형태인 미륵할미는 고려 말기에 행해진 매향 풍습, 물을 섬겼던 용신앙에서도 그 흔적은 발견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선자 연세대 교수는 “동아시아 지역의 신화에서 여신은 그저 대지모大地母의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신의 역할을 하면서 위대한 창세여신으로 등장한다.”라며 “생명을 탄생시키는 온화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단호하게 응징하고, 때론 세상을 어둠과 악으로 뒤덮으려는 신과 목숨을 건 싸움을 하기도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창세여신들 본래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 동아시아의 ‘여신 벨트’를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마고문화연구가 황혜숙 박사는 ‘동아시아 마고의 형상들’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황 박사가 지난 12년간 모은 작품 60여점을 소개했다. 한국과 중국, 일본, 미국 등 전세계의 마고 관련 그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