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태어나서 한국으로 귀화한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과거 침략사를 반성하지 않는 모국을 향해 ‘용기와 양심이 없는 나라“라고 말했다.

우당기념사업회(회장 홍일식)은 7일 오후 2시 독도문제 전문가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를 초청,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독도문제와 한일관계’로 제14차 우당역사문화강좌를 개최했다.

이날 250여 좌석을 가득 메운 청중은 호사카 교수의 용기 어린 강연에 박수로 화답했다.

그는 “일본은 제국주의적인 팽창 시기에 아시아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만큼의 큰 피해와 고통을 주었다”라며 “수십만 명의 한국인들, 아시아인들이 일본군의 전쟁수행을 위해 전쟁터, 탄광 등에서 노예노동을 강요당했다. 일부는 일본군 731부대의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가장 잔혹한 것은 아시아의 많은 여성을 성노예로 삼아 모성과 인권을 철저히 유린한 사실이다.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태국, 필리핀 등 많은 국가에서 여성들이 군대위안부로 끌려가 노예와 같은 치욕 속에서 일본군의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인생을 유린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러한 과거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 우당기념사업회(회장 홍일식)는 7일 오후 2시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제14차 우당역사문화강좌를 개최했다. ‘독도문제와 한일관계’를 주제로 강연하는 호사카 유지 교수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호사카 교수는 2003년 한국체류 15년 만에 귀화했다. 그의 독도 연구는 1998년부터 현재까지 14년을 이어오고 있다. 처음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할 때 한 학생으로부터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호사카 교수는 “그들은 일본에서 온 내가 어떤 답을 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나는 그때 답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많은 일본인들처럼 나는 당시 독도에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학생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독도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

“나는 독도를 객관적으로 연구했다.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진실을 탐구하려는 마음이 강한 연구자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호사카 교수는 4년간의 연구결과,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는 은폐와 왜곡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토대로 2002년 ‘독도영유권문제의 미해결문제고찰’이라는 논문이 나오게 된 것이다.

논문은 1870년과 1877년에 당시 일본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태정관이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의 부속, 일본영토 외의 섬들이라고 결정한 공문서를 은폐하거나 심하게 왜곡하고 있는 사실을 담았다.

▲ 우당기념사업회(회장 홍일식)는 7일 오후 2시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제14차 우당역사문화강좌를 개최했다. ‘독도문제와 한일관계’를 주제로 강연하는 호사카 유지 교수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 일본의 미래는?

흥미로운 점은 일본 정부와 달리, 교사들은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하는 성명을 잇달아 내놓았다.

2008년에는 북해도 사회과 교원노조가 “독도는 한국인들의 주장처럼 한국영토”라고 성명을 냈다. 이어 2011년 9월에는 도쿄도 사회과 교원노조가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증거가 없다”는 성명을 냈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의 사회과 교사들은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기재된 일본의 사회과 교과서로 독도문제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독도에 대한 한국 측 주장까지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많은 사회과 교사들이 독도는 한국영토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들이 내놓은 증거는 1870년과 1877년의 태정관 지령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8월 24일 노다 총리는 일본 국회에서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망언했다. 이 장면은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일본으로서는 최대의 홍보효과를 노린 국회 생중계였으나 그들의 논리적 한계를 드러냈다는 것이 호사카 교수의 말이다.

1696년 1월 일본의 사무라이 정권 에도막부는 당시 울릉도와 독도를 왕래했던 돗토리번(현, 돗토리현) 영주에게 울릉도뿐만이 아니라 독도에 대해서도 질문을 했다. 이때 에도막부는 ‘울릉도 외에 돗토리번과 관련이 있는 섬이 또 있느냐’라고 질문한 것이다. 즉, 에도막부는 독도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에도막부의 질문에 대해 돗토리번은 “송도(松島 : 당시의 독도의 일본명)라는 섬이 있지만 이것도 우리의 영지가 아닙니다. 울릉도에 가는 길목에 있는 섬입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지방도 이 섬을 영유하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즉 독도는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답변이었다.

이런 고문서들은 현재 돗토리 현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의 이런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해서 하달된 공문서가 1870년과 1877년의 태정관 문서인 것이다.

▲ 우당기념사업회(회장 홍일식)는 7일 오후 2시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제14차 우당역사문화강좌를 개최했다. 호사카 유지 교수의 강연을 듣고 있는 청중.

1870년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 속에서 일본 외무성은 “원록(元祿)년간(1688-1704)에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부속이 되었다”라고 명기했고 17세기말에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한 사실을 확인했다.

1877년 ‘공문록’ 속에서 일본 중앙정부 태정관은 “원록 5년(1692) 조선인 입도 이래 울릉도와 그 밖에 있는 한섬(=독도)의 지적편성의 건은 한일 양국의 문서왕래가 끝나 두 섬은 드디어 일본과 관계가 없는 섬이 되었다. (중략) 울릉도와 그 밖에 있는 한섬은 본방(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고 하여 17세기 말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것이 된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즉 17세기 중반에 일본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일본 측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 허위이고 진실은 ‘17세기말에 일본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이 한국(조선)에 있다고 인정했다’ 는 데 있다.

호카사 교수는 “일본의 주장이란 어느 정도 사실로부터 시작되지만 100% 진실을 말하지 않고 도중에서 심하게 왜곡시키는 수법을 항상 사용하고 있다. 100% 진실을 추구하면 독도가 한국영토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일본이 인문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진실을 추구하는 국가가 되지 않는 한 아시아나 세계의 지도국가가 된다는 그들의 꿈은 그냥 꿈으로 끝날 것이다. ”라며 강연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