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리안스피릿 역사 기획-위당 정인보의 얼
[1편] 일제 단군조선 부정론을 비판한 위당 정인보(클릭 )
[2편] <조선사연구> 한글판을 역주한 문성재 박사

최근 위당 정인보의 <조선사연구> 상하권이 한글로 완역됐다. 연세대 국한문판 이후 30년 만이다. 책은 1,800여 쪽에 달한다. 두 손으로 들기도 벅찬 무게다.
 
책을 번역하고 꼼꼼히 주석한 문성재 박사(49)를 지난달 22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문 박사는 1997년 중국 난징(南京)대와 2002년 서울대에서 고대 중국 희곡과 초기 백화 연구로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주변국의 역사왜곡에 대처할 처방은 위당 정인보의 얼 사관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우리얼찾기국민운동본부 100만 서명 달성을 높히 평가했다.

- 지난해 11월 상권, 올해 4월 하권이 완역됐다.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 위당 정인보의 <조선사연구>를 역주한 문성재 박사
“상하권 합쳐서 1,800쪽이나 되는 방대한 거작이 아니겠나? 농담 삼아 ‘3년 만에 벽돌 2장을 찍었다’ 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참 대견하다 싶다. 역주라는 작업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열정을 가지고 내용을 풀이하고 주석을 달다 보면 어느덧 저자의 감정에 이입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맡은 일이니까 한다는 정도의 감회밖에 없었다. 그런데 역주를 시작하고 위당을 조금씩 공부하면서 뭐랄까 사명감이 생겼다. 그 많은 분량을 세 번씩이나 새로 번역하면서 이렇게 잘 마무리됐다. 정말 감개가 무량하다. 소중한 기회를 주신 우리역사연구재단의 이세용 이사장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 독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위당을 잘 아는 어르신들이 반길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의외로 20~30대 젊은 세대가 관심이 많았다.한 군인은 휴가기간에 우리역사연구재단을 찾은 적이 있다. 귀한 책을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또 온라인 역사 카페 운영자는 대학시절에 연세대본을 펼쳤는데 ‘에라, 모르겠다’라고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제서야 위당의 역작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됐다며 즐거워했다.

독자들에게 주문하고 싶은 점은 책이 방대한 분량이라 호흡을 길게 잡고 읽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각주와 색인이 상당히 잘 갖춰져 있어서 위당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가능하면 서울신문본이나 연세대본과 비교해서 읽다 보면 70년 전 우리말까지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 위당의 어투와 문체가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를 바로잡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밝혔다.

“<조선사연구> 역주를 맡을 때 각오 단단히 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래 봤자 한국말인데 얼마나 어렵겠나. 나도 한문 꽤나 한 사람이니까 1년이면 작업 다 끝날 걸?’이라고 생각해 겁없이 맡았었다. 그런데 웬 걸, 중국 정사 ‘24사’와 ‘사고전서’는 기본이고 불교경전에 양명학에 온갖 분야의 책들을 두루 섭렵해서 ‘한국학의 독보적 거성’으로 추앙받던 위당에 비하면 나는 하룻강아지였다.

위당이 평생 갈고 닦던 학문과 열정이 모두 응집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어렵겠나! 그 뿐이 아니었다. 이전의 판본들은 해방 전후의 열악한 출판환경 때문에 약간 과장하면 편집, 교열, 재판, 인쇄의 과정에서 오독, 오식, 탈자, 누락이 한 줄 건너 하나씩 나올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위당의 언어가 더욱 난해하고 괴벽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 위당은 <조선사연구>에서 단군조선 이래로 한민족의 역사를 ‘얼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어려서부터 양명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에게 ‘얼’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그는 ‘얼’이야말로 주체적인 자아이자 보편적인 인간 존재의 ‘고도리’(본질)이며 가치의 척도라고 보았다.그는 역사 연구를 ‘얼’을 탐구하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5천년 한민족 역사에서 민족의 ‘얼’을 찾아내고 가려내어 외세로부터 자아를 지킬 역량으로 승화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 낱낱의 역사적 자취를 탐구하여 역사의 골간을 이루는 ‘얼’의 큰 줄기를 찾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자의 소명이라고 여겼다.

위당이 일제 강점기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 집필과 신문 연재, 역사 강연 등을 통해 일제의 역사왜곡으로부터 우리의 역사, 우리의 ‘얼’을 지키고자 진심으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한 것도 바로 그같은 인식에 따른 실천이었던 셈이다. 지금 이 순간 이웃 나라는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라거나 “독도가 일본 땅이다”라는 식의 강변을 서슴지 않고 있다. 위당으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이웃나라의 역사 왜곡으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얼’을 지키기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 위당 정인보의 <조선사연구>를 한글로 완역한 문성재 박사

- 그런 점에서 지난해 11월 우리얼찾기국민운동본부는 ‘대한민국 얼찾기 운동’을 전개했다. 단 13일 만에 100만 서명을 돌파했다. 이러한 시민운동을 어떻게 평가하고 싶나?

“예전에는 가난해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찬사를 받을 정도로 남을 배려했다. 요즘은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것은 물질문명에 찌들고 경쟁사회가 되면서 그런 것이 아니겠나? 그런 점에서 우리얼찾기국민운동은 시의적절한 캠페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몇 번 관련 기사를 접한 적이 있는데 단 13일 만에 1백만 명의 서명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서명에 동참했다는 것은 그만큼 ‘대한민국 얼찾기 운동’에 공감하고 그 필요성을 느끼는 분들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대한민국 얼찾기‘가 더욱 많은 분과 공감대를 형성해서 지속적으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중국 지안에서 발견한 고구려비가 위작이라고 처음으로 제기하지 않았나? 올해 4월 중국학자들이 방한한 한․중 학술회의도 열렸다.(클릭 ) 그러나 현재 5월에야 한국인에게도 박물관이 공개됐지만, 1m 밖에서 관람하게 돼 있어 비문(碑文)은 거의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조선사연구>의 정무론 부분을 보면 위당은 일제의 유물 조작 가능성을 이렇게 경계하고 있다.

 ‘사방팔방으로 나가서 그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 언덕이나 고랑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그 속에 위조물이나 조작거리를 슬쩍 끼워 놓은 다음 자기 궤변을 합리화하려고 든다. 심할 때에는 일부러 그런 것들을 묻어 놓고 남들이 발굴하게 하기도 하고 일부러 그런 것들을 버려 놓고 남들이 발견하게 하기도 한다. 또, 어떨 때에는 일부러 그것에 묻은 흙을 털고 닦은 다음 그 글귀를 판독하는 척하다가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정말 이 땅에서 이런 물건이 나왔네?’ 하고 떠들어 댄다. 그렇게 하면 그 광경을 보는 사람은 청동기나 비석 따위가 줄줄이 쏟아지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아무리 ‘안다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전혀 의심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중략) 불순한 목적으로 그런 짓을 벌이다 보니 오로지 자신의 그런 목적을 이루기에만 바쁠 뿐 옳고 그르고는 아예 따지지도 않는 것이다.'(조선사연구 하권, p842-p843)

이 발언은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이웃나라의 역사왜곡 유물조작 사건과 연관시켜 보면 위당의 선견지명에 새삼 고개를 숙이게 된다.

최근 중국을 다녀온 분의 전언에 따르면 “정묘년” 부위가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훼손된 것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광개토대왕 생시에 만들어진 현존 비석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해온 마선비(문 박사는 실체가 밝혀지기 전에는 어떠한 의미 부여도 하지 않을 생각으로 발견지만 따서 호칭했다)는 위각이거나 일부 조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반증일 것이다. 중국 학자들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서 얼마나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셈이다. 위당이 70년전에 〈정무론〉에서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화된 느낌이다.

지난 4월 학술회의까지 일련의 역사논쟁을 겪으면서 새삼 느낀 거지만 우리나라의 인문학적 토대가 너무도 취약하다. 명색이 한 나라의 자존심이라 할 역사학계가 자기 목소리는 낼 엄두도 못내고 하나에서 열까지 중국 학자들의 입만 바라보면서 동북공정의 논리를 오히려 거들고 있으니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학문을 학문으로 목적으로 여기지 않고 그저 철밥통이나 수단으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앞으로 우리나라 인문학은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게 될 것이다.

- 이번에 나온 하권에서는 광개토대왕과 그 능비에 관한 내용이 집중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어떠한 점이 도움이 될까?

▲ 위당 정인보의 <조선사연구> 하권을 들고 있는 문성재 박사
“위당은 단재 신채호 이후로 유일하게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우리 역사 왜곡․조작에 맞서 일련의 논문을 집필하여 반론을 제기한 학자이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한․중․일 세 나라에서 광개토대왕과 그 능비에 대한 연구와 비문 해석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양적․질적으로 많은 진전이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는〈고구려의 패업과 영락태왕〉과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에서 특기할 만한 내용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지금에 와서도 주목할 만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 석략〉의 경우 그동안은 순한문체여서 이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는 분들을 위하여 읽기 쉽게 역주해 놓았다. 또, 원전에는 없지만 새로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릉 비문〉을 추가하되 그동안 정치사·전쟁사적 측면에서 조명했던 광개토왕비문을 언어학·어원학이라는 또 다른 시각에서 조명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

- 마지막으로 청소년 역사인식이 낮아지고 있다. 수능시험에서 국사가 선택 과목으로 바뀌었고 오히려 방송국 예능 프로그램이 ‘역사를 배우자’고 나서는 형국이다. 이에 대해 한마디를 해달라.

“얼마 전에 TV에서 뉴스를 보는데 안중근 의사를 아느냐고 물으니까 “무슨 과 의사에요?”라고 반문하지를 않나 “야스쿠니 신사가 누구에요?” 하면서 동문서답을 하더라. 남의 나라 역사도 아니고 (우리나라 역사인식) 이 정도였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었고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좌절하고 억압받던 동포에게 자기 ‘얼’을 다잡고 ‘나 자신’을 알자면서 역사교육운동을 전개했던 위당이 지금의 현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싶다. 위당이 일생동안 보여주고 실천한 업적과 족적들을 살펴보면 이것을 단순히 식민사관의 극복과정이나 일제와의 투쟁사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위당이 얼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병법가 손자(孫子)는 “나를 알고 난 연후에 남을 알면 백번 싸워도 절대로 위태로운 꼴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을 이기거나 내가 성공하고 싶은가? 그러면 나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 역사를 먼저 배워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