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리안스피릿 역사 기획-위당 정인보의 얼
[1편] 일제 단군조선 부정론을 비판한 위당 정인보
[2편] <조선사연구> 한글판을 역주한 문성재 박사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매년 10월 3일 우리나라 생일을 기념하는 노래. ‘개천절’을 지은 사람은 누구일까? 해방 후 국학대학 초대학장이자 대한민국 초대 감찰위원장을 지낸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3 - ?)이다. 그는 삼일절, 광복절 노랫말도 지었다. 우리는 위당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코리안스피릿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독립운동가 위당 정인보를 연재한다.

1편 일제 단군조선 부정론을 비판한 위당 정인보, 2편 5천 년 한민족 역사를 담은 <조선사연구(상하권>을 30년 만에 한글판으로 역주한 문성재 박사 인터뷰 등을 소개한다.

풍류도는 국학이다

▲ 독립운동가 위당 정인보(=우리역사연구재단)
국학의 뿌리는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찾을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을 세운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에 대해 정인보는 풍류도가 ‘국학’이라고 색다르게 해석하였다. 풍류란 ‘부루’라는 말을 사음(寫音)한 것이고, 부루는 나라(國) 뜻인 ‘벌’의 옛말이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유의 부루 즉 국학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이도흥치(理道興治)’ 라는 말은 홍익인간의 도(道), 즉 단군의 교의대로 다스리라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이에 관해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위당은 단군의 교의(敎義)가 비록 고려시대의 사서인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이르러 나온 말이나 그것이 당대의 민족 공통의 교의가 되기까지는 오랜 뿌리가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천 년 역사는 ‘얼’에서 찾아야

정인보는 조선총독부가 1915년 펴낸 <조선고적도보>라는 역사책을 본 후 분기탱천했다. 1913년 일제의 고적조사단이 평남 용강군 해운면에서 ‘점제현신사비’를 발굴하고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해당 비의 발굴은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증거”라고 강변한 것이다.

정인보는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구나. 깡그리 부숴 버리리라.”고 다짐했다. 그는 1935년 1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 ‘오천 년간의 조선의 얼’이란 제목으로 단군부터 조선까지 5,000년의 역사를 연재한다. 그러나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사진 가운데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동아일보가 강제로 정간되는 바람에 이 연재가 중단됐다.

연재물은 1946년 서울신문에서 단행본 <조선사연구>로 새로 태어났다가, 1983년 <담원 정인보 전집> 중 제3·4권으로 출간됐다. 최근 우리역사연구재단에서 <조선사연구>(상하권)(문성재 역주)를 한글판으로 내놓았다.

▲ 위당 정인보의 개천절 원고(=우리역사연구재단)

정인보는 <조선사연구> 서론에서 역사는 민족 ‘얼’의 발현이라고 보았다.  “사람의 존재라는 것은 단순히 거죽만 사람인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얼’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가리킨다”라고 밝혔다. ‘얼’은 우리가 잘 아는 ‘고도리’(가장 중요한 본질)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관은 얼 사관이다. “우리 겨레의 5,000년 역사에서 ‘얼’이 나타나고 사라지고 펼쳐지고 쪼그라드는 면면을 따져 본다면 그 성쇠와 영욕의 원인을 이로써 깨달을 수 있으리라”라고 설명한 대목이 그것이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정인보의 얼 사관은 가깝게는 박은식의 국혼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신채호의 낭가사상, 안재홍의 민족정기, 문일평의 조선심(朝鮮心)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외친 조선의 얼은 잠자고 있는 우리의 국혼을 불러일으켜 되살리자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정인보는 본론에서 “조선의 시조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라고 시작했다. 일제의 단군조선 부정론에 대항한 것이다. 신화의 영역에 있던 단군을 역사의 연구영역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단군은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천제의 아들로 비견되는 최고 통치자에 대한 존호였다는 것이다.

특히 한사군의 위치가 낙랑은 요동의 험독, 현토는 우북평, 임둔은 초자하, 진번은 대릉하 지역으로 모두 한반도 너머에 있었던 것으로 고증했다. 또  관할 지역이 수시로 변동됐던 한사군에 관해 “이름만 있을 뿐 실체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한사군이 한반도를 400년이나 지배했다는 식민사학자들에 반박한 것이다.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요 쟁점을 이미 1930년대에 고증해 밝힌 셈이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