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와 서구화 바람에 날려가 버린 우리의 토종 과실들이 한둘이겠는가마는, 그 가운데 앵두는 이름도 그렇거니와 그 앙증맞은 크기와 빛깔, 생김새가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정겨운 우리 벗이었다. 그렇기에 '앵두 같은 입술'이니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하는 말과 유행가가 나왔을 터이다. 앵두를 입에 물고 자랐으면서도 그 앵두의 정서를 탈색당한 '이농 1세'들은 보리가 익어가는 이 무렵 보리내음 타고 빨간 얼굴로 다가오는 앵두의 자태를 못잊어 얼마나 가슴을 태우고 있을까.

 앵두나무는 시골집 뒤란을 차지하고 장독대 위에 빨갛게 처진 가지를 걸치지만 그 수많은 열매를 물로 살찌우기 위해 흔히 우물가에 터를 잡기도 한다. 보리가 누룻누룻해질 무렵 그 앵두는 샘물 위에 빨간 입술을 한껏 내비치니 빨래하러 왔던 동네처녀들은 앵두나무 가지에 올라타고 앵두를 훌훌 훑어 욱신욱신 먹어대곤 했다. 그래도 못 다 먹은 앵두는 가지째 꺾어서 흙담 용마름 위에 걸어두기도 하고 허리춤에 차고 나무하러 가면서 쉴참으로 먹기도 했다.

▲ 고창 옥앵두

그 무렵이면 또 애잔하게 들려오는 뻐꾹새 소리가 동네처녀들로 하여금 앵두색깔 바른 입술을 뾰족 곤두세우고 '밤 봇짐'을 싸게 했을 법하다. 초여름 얼씬거리는 더위를 밀쳐내면서 동네처녀들의 가슴을 방망이질해 주었던 그 앵두와 '앵두의 추억'을 다시 만나볼 수는 없을까?
 

 충남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 전북 고창 선운사 일대, 부안 계화면 장금마을,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 그리고 서울의 비원에 가면 지금 갖가지 앵두를 만나볼 수 있다. 앵두, 보리앵두, 옥앵두, 물앵두... 등 곳에 따라 각각 다른 종류의 앵두가 있어 앵두와 가슴 뿌듯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서산 초록마을에 들어서면 집집마다 가족 수보다 많은 앵두나무가 뒤란에 서 있다. 초록 마을의 앵두는 보리앵두라고 하는데, 보통 앵두보다는 열매자루가 길다. 이것은 꼭 벚나무 열매인 버찌를 닮았으나 버찌가 검붉은 색 인데 비해 선홍색이어서 색깔로 구별된다. 맛은 버찌가 씁쓰름해서 먹기가 어려운데 보리앵두는 보통 앵두와 꼭 같은 향기에 무척 단 맛을 낸다. 그러나 올해는 전국에 두루  앵두가 흉년이어서 초록리의 보리앵두도 예전처럼 풍성하지는 않다.

▲ 옥앵두

전북 고창 선운사에 가면 '앵두 숲'에서 앵두에 파묻혀 볼 수 있다. 선운사는 동백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앵두가 더 명물이다. 선운사 동백은 철망으로 가려서 일반인이 접근할 수도 없고 꽃이 피자마자 쉬 지기 때문에 감상할 겨를도  없다. 선운사의 앵두밭은 대웅전과 동백꽃 단지 사이, 대웅전 뒤쪽 처마밑에 약 200m의 길이로 펼쳐져 있다. 10~20년 된 앵두나무 100여 그루가 봄엔 하얀 눈밭처럼 현란하게 꽃을 피우고 이맘때쯤 그 꽃자루에 새빨간 열매를 무리로 앉힌다.
선운사의 보통 앵두와 달리 선운사 앞 마을 선운리에 가면 우리나라에 몇 그루밖에 없는 '옥앵두'가 있다. '질마재 마을'이라고도 하는 선운리는 시인 서정주의 고향인데, 그의 생가 옆에 서씨의 아우인 서정태(76)씨가 세칸짜리 양철지붕집을 사서 '우하정'(又下亭)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서정태 할아버지는 우하정 마당에 온갖 과실수를 들여앉혔는데, 그 가운데에 10년전에 마을에서 얻어다 심은 옥앵두 나무가 끼어있다. 옥앵두는 꽃 색깔에서부터 열매의 때깔과 맛에 이르기까지 보통 앵두와는 아주 다르다. 보통 앵두가 꽃 이파리에 붉은 기운이 도는 데 비해 옥앵두는 꽃과 열매의 색깔이 완연한 옥색이다. 특히 열매는 익어도 빨갛지 않고 해맑은 옥색이어서 차마 입에 넣고 깨물기가 아까울 정도로 고상하다. 연록색에 반들반들한 피부를 알알이 드러내놓고 가지에 달려있는 옥앵두는 정말 실로 꿰어서 목에 걸고 다녔으면 좋을성싶다. 옥앵두는 맛과 향기도 보통 앵두보다 훨씬 진하다.

▲ 고창 옥앵두.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 2구 마을에 가면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물앵두가 있다. 물앵두는 옥앵두보다 더 말갛게 개어서 투명하게 보이므로 '물앵두'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투명한 볼에 위 아래로 몇 가닥 줄무늬를 걸치고 있어서 그래도 꽤나 치장을 부린 과실이다.
 

이밖에 서울 비원 인정전 오른쪽 옆길 통로 담벼락에는 10여년 된 앵두나무가 요즘 빨간 열매를 달고 줄을 서 있으나 대부분 방문객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친다. 또 전북 부안군 계화면(옛 계화도) 장금마을 바닷가 주변 야산에는 야생 앵두가 지천으로 깔려있어 새들의 맛있는 군것질거리가 되고 있다.

  복분자술에 곁들인 풍천장어 고창서 맛보는 또다른 즐거움

고창 선운사 주변 식당들은 주로 풍천장어 요리를 판다. 풍천(風川)이라는 말은 강 하구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을 일컫는 보통명사이다. 그곳은 바닷물이 밀물 때 바람을 동반하므로 그렇게 부른다. 또 그런 곳은 밀물과 갯물이 만나는 지점이어서 강과 바다 양쪽을 오가며 사는 장어가 많이 잡힌다.
그러나 요즘엔 자연산 장어 어미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풍천' 주변에서 잡은 실장어(새끼 장어)를 양식해 기른 것을 가져다 쓴다.
이 풍천장어 요리를 안주로 해서 마시는 술이 '복분자술'이다. 복분자(覆盆子)는 '산딸기'의 한자 이름으로서, '요강을 넘어뜨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복분자술은 일종의 '정력제'인 셈이다. 선운사 일대에서는 복분자를 밭에서 길러 술을 담근다. 복분자술은 설탕이나 소주를 일절 넣지 않고 복분자 자체만으로 발효시킨 것이어서 맛이 순수하고 뒤끝이 좋다.

 

■찾아가는 길

## 고창서 선운사까지 25분 장수강변 풍광 취할 때쯤 질마재마을 문턱 도착 ##

서울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정읍인터체인지로 들어간다. 톨게이트를 벗어나자마자 유턴하여 22호 국도를 타고 25분을 가면 고창읍이 나온다. 고창읍에서 선운사까지는 25분을 더 가야 한다.
선운리(질마재마을)는 선운사에서 나와 좌회전하여 장수강변을 타고 내려가다가 선운교 다리로 우회전하여 5분을 더 가면 나온다. 숙식시설은 선운사 관광단지가 좋다. 호텔 한 곳과 5곳의 여관, 10여곳의 민박집이 있다. (063)63-8878(서정태 씨).

 전 한겨레신문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