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을 대로 익은 봄은 자연의 색깔을 터질 듯한 생명감으로 칠해 놓는다. 그래서 들녘에 서면 왠지 마음은 들떠 기쁘고 몸은 한없이 날고 싶어진다. 그만큼 순수한 자연은 우리에게 활력을 준다는 사실을 봄날의 산과 들이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요즘 대부분 들녘은 전봇대와 비닐하우스가 숲과 강을 이루고 있어 우리의 향토색 짙은 서정을 들춰내 주기는 어렵다.

▲ 해남 황토밭
     
 

이맘때 노랑나비를 쫓아 들판을 뛰어다니던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은 어디 풀내음 상큼한 밭둑 풀섶에 한나절쯤 푹 파묻혀 봤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할 것이다. 보리밭 두렁에서 종다리 노래를 자장가 삼아 거나한 봄 낮잠을 즐겨보는 일은 꿈으로나 가능한 것일까? 남도의 들녘, 황토색 듬성듬성한 전남 해남의 보리밭길에서 우리는 꿈에 그리던 봄날의 서정을 만나볼 수 있다. 그곳엔 지금 순수한 연록색이 얼마나 청초한가를 말해주는 보리밭이 한창 일렁이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는 유채꽃보다 해맑은 노랑색의 배추꽃이 만발해서 보리밭과 서로 상대방을 부추겨주고 있다. 또 보리밭과 배추꽃 색조에 완결미를 더해 주는 귀한 꽃도 한 가지 볼 수 있으니, 이 무렵 남도에서만 피는 탱자꽃이 그것이다. 그들이 모두 안개빛 달마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 운치가 극치를 이룬다.

     
 
▲ 탱자 꽃

해남은 높은 산은 적고 곳곳에 뒷동산만한 야산들이 넘실대고 있어서 대부분 밭으로 개간됐다. 그 밭에는 배추, 무, 보리, 밀, 고구마 같은 작물을 주로 심는다. 해남의 땅은 황토흙이어서 이 농산물들을 퍽 깊은 맛이 나게 길러낸다. 그래서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 '해남배추'는 그 아삭아삭하는 맛을 들어 최고로 쳐 준다. 배추는 대개 가을에 거두어 시장에 내지만 씨받이를 위해 겨울을 난 배추가 요즘 꽃을 피워서 씨를 맺을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배추꽃은 그 흔하디 흔한 유채꽃과는 격이 다르다. 유채꽃이 기름용 씨앗을 얻을 목적으로 배양된 잡종인 데 비해 배추꽃은 순 우리 토종이어서 더 정이 느껴진다. 유채꽃은 냄새가 자극적이고 색깔이 약간 푸르스름한 데 비해 배추꽃은 샛노란 색에 은근한 냄새로 살며시 다가오는 품새가 시골 처녀의 순수함과 수줍음을 닮았다.
 

황토벌 위에 배추꽃이 한층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갓 모가지를 내밀기 시작한 보리밭이 청초한 연두색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연두색! 정말 우리는 이때까지 여느 감각 뛰어난 화가나 사진작가의 작품에서도 구경할 수 없었던 고운 연두색을 해남의 항토벌 보리밭에서 지금 만날 수 있다. 해남의 보리밭은 바다를 가까이 두고 있어서 살랑 갯바람이 불어오면 일렁이는 녹색 '파도밭'이 된다. 그 꿈틀거리는 보리밭은 우리 추억의 한 자락을 들춰내준다. 그것은 예전 이맘때 시골 들녘을 기차로 지날 때 마주쳤던 정겨움이다. 또 학교갔다 오는 길에 보리 모가지를 뽑아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던 추억도 해남의 보리밭은 일깨워준다.
 

지금 해남의 보리밭 하늘은 생명의 탄생을 흥분에 젖어 외쳐대는 종다리의 노래로 가득하다. 종다리 노래는 새소리 가운데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 종다리는 하늘에 떠서 "쫑알 쫑알~ " 한 번 울어대기 시작하면 5분이건 10분이건 그치지 않는다. 보리밭에 새끼를 까 놓고 그러는 것이다. 20~50여m 높이의 하늘에서 가만히 선 채 날개만 팔랑거리며 "ㅉ ㅇ~, ㅉ ㅇ~, ㅉ ㅇ~, 쫑알~ 쫑알~ " 하염없이 울어대던 종다리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별 일 없겠다 싶으면 보리밭 고랑으로 곤두박질한다. 그 광경을 밭두렁 밑에서 숨죽이며 지켜보다가 종다리가 들어간 대목으로 슬금슬금 기어가서 "쮸~, 쮸~ " 유혹하면, 종다리 새끼들은 이내 밥 달라고 "끼길~ 끼길~ " 아우성을 친다. 학교 갔다 오는 길의 그 '새집찾기' 추억은 고향을 보리밭 사잇길에 묻어두고 온 사람들의 가슴을 지금쯤 퍽 아리게 할 것이다.
 

해남 황토벌의 봄잔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보리밭 사잇길 곳곳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탱자꽃이 한창 만발해서 멋을 더하고 있다. 탱자나무는 남녘에서는 일찍이 집이나 밭의 울타리로 써 왔다. 울타리로서 효용이 없는 겨울엔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지만, 지금부터 탱자나무는 잎과 꽃을 피워 본격적인 울타리 구실을 다하려 한다. 집안에서 등목하는 사람들의 알몸도 가려주고, 들녘에서는 수박밭이나 오이밭을 막아주기도 한다. 해남 들녘의 탱자나무들은 모두 밭과 밭 사이에 울타리로 심어진 것이다. 탱자숲의 길이가 긴 것은 500m 가까운 것도 있다. 탱자꽃은 진초록 가시가 얽혀있는 사이사이에 연록색 가냘픈 이파리와 함께 함초롬히 피어오르는 모습이 예쁘다. 탱자꽃은 벚꽃에 배추꽃의 노랑 꽃가루가 날아와 앉은 듯한 색조를 띠고 있다. 은은한 향기는 가시를 감춘 꽃 특유의 강한 유혹이다.

해남읍서 완도쪽 달리다보면 자운영꽃 장관 중리 1km 떨어져 대섬...하루 두 번 바닷길 열려

목포에서 새로 난 영암 삼호방조제를 타고 산이면을 거쳐 해남읍에 이른다. 그 중간에 마산면 금자리 탱자나무숲을 볼 수 있다. 해남읍에서 13번 국도를 타고 완도쪽(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남창에 닿기 전 813번 지방도로 접어들어(우회전) 해안도로를 타고 해남 땅끝쪽으로 가면 북서쪽에 달마산을 배경으로 보리밭, 배추꽃밭이 나타나고, 곳곳에 펼쳐진 논에는 연보라 자운영꽃이 도배를 하다시피 한껏 피어있다. 이 길 중간에 있는 사구미해수욕장은 보길도를 저만치 앞에 둔 한적한 노송숲과 부드러운 모래밭이 걸어볼 만하다.
해남 땅끝에 들렀다 나와서 송지해수욕장을 지나 해남읍쪽으로 언덕을 하나 넘어서면 송지면 중리마을이 나온다. 중리 앞에는 바다쪽으로 1km쯤 거리에 대섬이 있다. 중리에서 대섬까지의 바닷길은 하루에 두번씩 꼬박꼬박 열린다. 이 바닷길에는 파래가 무성하고 바지락이 많다. 대섬에는 시누대가 숲을 이루고 있다. 대섬 앞 개펄에는 우리나라에 몇 개밖에 남아있지 않은 전통 물고기잡이 '독살'(석방렴)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숙식은 해남읍으로 나와야 편하다. 해남읍 천일식당은 각종 젓갈 등 20여 가지의 반찬이 나오는 떡갈비(1인분 1만5천원)로 유명하다.

묵은 김치+삶은 돼지고기+홍어 세겹 쌈 '삼합'에 막걸리 곁들이면 '삼탁' 
 

어떤 유명한 고미술학 교수는 그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해남 천일식당 젓갈이 짜다는 지적을 했다. 그런데 그 식당 뿐만 아니라 전라도 음식 가운데 특히 젓갈은 짠 게 특징이요 미덕이다. 젓갈은 오래 두고 먹기 위해 소금을 많이 넣고 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전라도 음식 맛의 원천이기도 하다. 짭짤하고 곰삭은 젓갈은 저절로 밥을 부르게 되고 밥을 많이 먹게 되는 반찬이니 맛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전라도 음식이 맛 있는 이유는 산, 들, 강, 바다에서 나는 풍부하고 싱싱한 물산과 그것을 잘 조리해내는 전라도 여인네들의 손끝 정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음식은 자신이 먹거나 먹는 일로 남을 대접하는 데 쓰이는 물건이므로 가장 인간적인 정성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외식산업이 발달한 오늘날 외식업을 하는 사람들은 전라도 음식의 인본주의 정신을 배워볼 만하다.

여름이 오기 전 전라남도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간혹 삶은 돼지고기를 묵은 김치에 싸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묵은 김장김치는 군둥내와 짜릿할 정도의 신 맛이 나서 버리기 일쑤지만 젓갈이 많이 들어간 전라도 김장김치는 묵을수록 깊은 맛(개미)이 난다. 이것으로 삶은 돼지고기를 싸 먹으면 돼지고기의 노린내와 느끼한 맛을 중화시켜 감칠 맛을 더해 준다. 여기에 흑산 홍어라도 한 점 있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이다. 예로부터 전라도에서는 묵은 김치에 삶은 돼지고기와 흑산홍어를 세 겹으로 싸 먹는 것을 삼합이라 하여 즐겼다. 이 안주에 술을 마다할 수 있으랴. 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 '삼합에 탁주, 즉 삼탁'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