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서울현충원은 ‘백산 지청천 장군 56주기 추모식’이 오는 10일 오전 11시 현충원 내 임시정부요인묘역 15호에서 한국광복군 동지회 주관으로 거행한다고 9일 밝혔다.

이번 추모식에는 유가족,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원, 광복회 회원, 추모객 등 7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지청천은 1888년 1월 25일 서울에서 태어나 69세인 1957년 1월 15일 서울에서 별세했다. 1994년 4월 14일 임시정부요인묘역 15호에 안장됐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그는 1906년 서울 배재학당,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191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등을 졸업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했다. 1920년 중·소 국경지대인 밀산에 모인 독립운동단체들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자 지청천은 부사령관에 임명돼 소련(러시아)령인 ‘이만시’로 이동했다.

이후 1921년 일르크츠크시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소련정부의 협조를 받아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간부급 인재를 양성했다.

소련정부가 고려혁명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자 이에 항전하던 중 체포됐다가 임시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석방됐다.

그는 1925년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 정의부를 조직했다. 이어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에 취임해 국내까지 대원을 파견한 뒤 일제의 각종 기관을 파괴하고 일본 관헌을 주살했다.

1930년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하자 지청천은 같은 해 7월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한국독립군 총사령에 취임했다.

1933년 10월 하남성에서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창설하고 상해, 남경, 천진, 만주 등지에서 애국청년 90여 명을 모집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1935년에는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9년 10월 사천성 기강에서 열린 의정원 정기의회에서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으로 선출됐다. 11월에 국무회의에서 군무장으로 선임돼 입법·행정·군사에 대한 제반사항을 처리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총사령으로 임명되자 지청천은 1941년 지대를 편성했다.

중국 중앙군, 주중연합군 등과 긴밀한 연락과 협조를 취해 항일전을 전개하고 국내 진입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했다.

그는 귀국 후 1948년 제헌국회의원, 정부수립 후 초대무임소장관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