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 미국 마천루의 상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두 대의 여객기가 충돌했다. 빌딩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2011년 5월 2일 새벽 파키스탄에서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라고 지목한 사람이 미군 특수부대(NAVY SEAL)의 작전에 의해 사망했다. 그가 바로 9ㆍ11 테러의 배후로 알려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이다. 미국 CIA는 그를 잡기 위하여 수십 억 달러를 쏟아부으며 편집증 환자처럼 매달렸다. 그 10년 동안의 여정(旅程)을 담은 영화가 바로 ‘제로 다크 서티’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 그래서 자칫 진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제로 다크 서티(Zero Dark Thirty)’는 자정이 지난 오전 12시 30분을 가리키는 군사용어다. 하루 중 가장 어둡기 때문에 군사작전이 가장 용이한 시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2011년 5월 미군 특수부대가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을 한 시간이기도 하다.

 두 가지 관점에서 이 영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테러라는 악(惡)에 대한 응징 내지 근절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세계무역센터를 비행기로 들이받아 수많은 국민들을 죽게 만든 극렬테러분자에 대한 미국의 보복으로 보는 것이다.

 첫 번째 관점으로 볼 경우, 미국이라는 지구를 대표하는 거대 선(善)에 대한 악(惡)의 도전으로 보는 것이다. 과연 미국이 거대 선인가. 굳이 이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을까. 전세계가 자국의 이익과 자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시한다는 것은 굳이 사회교과서의 내용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명하다.

  우선, 미국의 현대사를 살펴보자.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늦게 참전했다. 1941년 12월 7일 발생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누구의 말마따나 '잠자는 사자'를 깨웠다. 그전까지 불개입 원칙을 천명하던 미국은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명분을 얻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미국은 전쟁중 무기판매로 막대한 이득을 챙기면서 지구상에서 초강대국으로 등장하게 된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전후 질서의 재편을 위하여 미국 주도로 UN이 만들어지고, 미국은 전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주도권을 행사한다.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국가나 단체에 대해서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라는 이름으로 가차없이 응징이 가해졌다. 폭력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폭력을 사용하였다. 전쟁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벌였다.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은 결정적으로 많은 중동 이슬람국가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국 경제를 움직이고 있는 핵심세력이 유대인들이니,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유대인의 로비 단체는 AIPAC(미국-이스라엘 공적위원회 / American-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이다. 이 단체는 이스라엘에 유익한 일은 무조건 지지하며, 이의 실현을 위하여 미국 정부나 국회의원들에게 압력을 행사한다. 활동의 주요 내용은, 군사ㆍ경제적 원조를 통한 이스라엘 강화, 이란의 핵무기 프로그램 반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인 예루살렘의 보호 등이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들은 유대인들의 눈치를 극심하게 보는데, 그들이 빼놓지 않고 참여하는 행사가 바로 AIPAC에서 주최하는 행사다.

 오사마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富豪)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파이잘 국왕 당시 공공사업부 장관을 지낼 정도로 명문 집안이었다. 그의 극렬 반미투쟁의 결정적 원인은 미국의 친(親) 이스라엘 정책에 있다. 그리고, 미국이 왜 친 이스라엘 정책을 펴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설명하였다.

 오사마 빈 라덴은 2011년 5월 사살되었다. 그러면 미국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겼다고 할 수 있을까. 단연코 아니다. 좀 더 돌직구스런 표현을 사용하면, 오사마 빈 라덴 한 사람이 죽었을 뿐이다. 그가 테러를 감행한 근본적인 원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제2, 제3의 오사마 빈 라덴은 계속 출현할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그를 '악(惡)의 화신'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이슬람권 사람들에게 그는 '영웅(英雄)'이고 그의 죽음은 '순교(殉敎)'다.

 또 하나의 관점. 극렬테러분자에 대한 미국 CIA의 보복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폭력에 대하여 폭력으로 응징한 폭력영화다. 다만, 신출귀몰하는 폭력의 대상을 찾기 위하여 온갖 과학적 수단과 인맥 동원, 인질에 대한 고문 등이 사용된 것뿐이다. 이 관점에서는 테러의 원인이니, 악의 화신이니, 영웅이니 하는 것들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냥 복수(復讐)하는 영화다. 단지, 그 복수의 기간이 10년에 걸쳐 이루어졌을 뿐이다. 하긴 평생을 두고 복수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깟 10년 세월이면 결코 길다고도 할 수 없다.

 테러를 응징하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누구나 이렇게 이야기할 수는 있다. 테러를 응징하기 위한 또다른 폭력은 바람직한 해결방법은 아니다라고. 나 역시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윤리교과서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범죄자의 인권을 극도로 중요시하는 사람이 "범죄자는 고문이나 협박이 아니라 대화와 설득으로 그들을 감화시켜야만 범죄예방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라고 말했을 경우, 현실적으로 그 말에 대하여 납득할 사람은 별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현재 우주선을 띄워 달을 탐사하고 인터넷을 통하여 전세계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수준은 폭력을 분쟁해결의 유용한 수단으로 믿고 의지하는 미개(未開)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도덕적ㆍ윤리적 문제는 차치하고, 현실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테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테러에 대응하는 폭력이 현재의 수준에서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목적에 일치하는 최소한의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미국이 비난을 받았던 이유 중의 하나도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많이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전쟁을 하다보면 무고한 희생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행계획을 꼼꼼하게 검토해서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원론적인 주장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테러에 대응하여 사용된 폭력의 정당성을 평가함에 있어서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을 확인하고서 허탈한 표정으로 비행기에 오른다. 왜 주인공은 기쁜 표정이 아닌 허탈한 표정으로 비행기에 올랐을까. 감독의 의도는 무엇일까. 사실 ‘허탈한 표정’이라기 보다는 ‘공허(空虛)한 표정’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주인공의 대의명분은 '테러와의 전쟁'이었고, 거대 악을 몰아내고 거대 선을 쟁취하여 자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목표는 점점 더 미궁속에 빠지고 그 대상은 마치 유령처럼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그 와중에 사랑하는 CIA 선배가 테러범들의 자살폭탄테러로 목숨을 잃는다. 이제 주인공에게는 오로지 독기만 남는다. 그리고, 그 목표는 아주 단순하고 분명해졌다. 그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다. 그것이면 된다. 나머지 것들은 단순하고 분명한 한가지 목표에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은 미국 입장에서 보면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며, 악의 화신을 없애버린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 입장에서 본다면 사랑하는 선배를 대신하여 복수를 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즉, 선배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누구나 오매불망 원하던 일을 달성하고 나면 얼마간 공허한 감정이 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더군다나 주인공이 고등학교 졸업 이후 CIA에 들어와 10년을 밤낮으로 쫓아다닌 대상이라면 그 공허함은 훨씬 더 클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한다면, 나를 영화가 주는 거창한 메시지를 무시하고, 한낱 이 영화를 복수극으로 전락시켜 버렸다는 비난을 할 것인가.

 주인공의 마지막 표정을 보면서 한가지 분명하게 떠오른 것이 있다. 미국은 겉으로는 만세를 부르면서 그의 죽음을 자랑스럽게 전세계에 알렸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또다른 오사마 빈 라덴의 출현을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그 속내가 주인공의 표정에 잘 드러나는 것같아 한참동안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