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숨은 이야기, ‘고대일록’에 주목해야
임진왜란의 숨은 이야기, ‘고대일록’에 주목해야
  • 윤관동 기자
  • kaebin@ikoreanspirit.com
  • 승인 2013.03.08 1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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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덕기 청주대 교수, 9일 한일관계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

“일기는 비망록입니다. 동시에 작성자의 후손 등 특정인에게만 열람할 수 있도록 쓰인 것입니다. 이러한 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중앙 차원의 기록에서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 밝혀질 가능성이 큽니다. 정경운의 <고대일록>은 임진왜란기 개인적이고 현장의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민덕기 청주대 교수는 9일 경기대에서 한일관계사학회가 주최하는 제144회 월례발표회 앞서 이같이 밝혔다.

경상우도인 함양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인 고대(孤臺) 정경운(1556~?)은 1592년(선조 25년) 4월 23일부터 1609년(광해군 원년) 10월 7일까지 임진왜란, 정유재란 전후의 참상과 현실비판을 기록한 <고대일록(孤臺日錄)’>을 남겼다.

이 기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황윤석의 <이재난고>, 오희문의 <쇄미록> 등과 함께 임진왜란 무렵의 상황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이날 민 교수는 임진왜란을 두고 <고대일록>과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의 기록에서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를 주목한다.

▲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 우리나라 기록화(사진제공=독립기념관)

고대일록 VS 조선왕조실록…속보력에서 ‘차이’

민 교수는 <고대일록>이 기록한 정보가 중앙에서 파악하여 기록한 실록보다 빨랐다고 분석했다.

<고대일록>엔 김시민이 1592년 6월 3일(신묘)에 등장한다.

“적이 와서 진주의 남면南面을 침범했으나,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판관 김시민이 능히 한 지방을 통제하고 있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목사牧使 이경이 병으로 피신처에서 사망하니, 김시민이 진주 지방의 사민士民을 규합하여 성벽을 고치고 병기를 수리하여 방어할 계책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반면 <실록>은 50여 일 늦은 7월 26일에 등장한다.

비변사가 “진주 판관 김시민의 사공事功은 전후의 장계에 의하면 매우 뛰어납니다. 급히 벼슬을 올려 격려함으로써 권장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라는 것이 그것이다.

속도만이 아니다. 제1차 진주성 전투에 대해 김시민, 송상현 순국에 관해서는 진주 백성의 눈으로 본 것처럼 구체적이다.

“진주 목사 김시민의 품계가 통정대부로 올랐지만 이날 밤 관아에서 사망했다. 김시민은 통판通判으로 재직할 때부터 사졸을 휴양休養하여 하나같이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진주 사람들이 부모와 같이 사랑했다. 위아래가 혼연일체가 되어 전혀 갈등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전쟁에 동원해도 이기지 않음이 없었고, 성을 지키게 해도 수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간성干城의 장수로 간주했다. 하지만 큰 승리를 거둔 뒤에 적의 총탄에 맞은 곳이 날로 더욱 심해져서, 그 정신이 혼미하고 어지러워져 사람들이 모두 대단히 걱정하였다. 21일 머리를 빗고서 옷을 갈아입으니 병이 약간 나은 듯했으나, 다음 날 병이 심해져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진주 사람들이 어른 아이 모두가 통곡하여 밤까지 이어졌으니, 마치 자신의 부모님 상喪과 같이 하였다. 백성의 마음을 깊이 얻지 않았다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다만 대의大義에 힘쓰지 않고 작은 은혜를 베푸는 데 한결같이 힘썼으니, 사론士論은 그를 기국器局이 적다고 여겼다.”

이처럼 <고대일록>은 구체적으로 기록했지만 <실록>은 별도로 김시민의 사망 소식을 싣지 않았다. 1592년 10월 1일에 한 줄도 안 되는 글로 남긴 것이 전부다.

왜적에게 투항한 기록, ‘실록’은 없다

무주군수 김종려는 왜적에게 투항했다고 <고대일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록>은 그가 전공을 세워 속죄했으니 복직시켜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적에게 투항한 전력은 감춰진 셈이라는 것이 민 교수의 분석이다.

<고대일록>은 1592년 7월 8일 전북 무주에 사는 전 군수 김종려金宗麗가 왜적 진영에 들어가 투항하여 왜적의 옷을 받아 입고 농사를 지으면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어 “이증李增은 왜놈에게서 받은 짐을 지고, 김종려는 적의 소굴에서 호미질이나 하면서 호령을 달게 받아들이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국가의 은혜를 저버리고 절의의 규칙을 무너뜨려, 도리어 견마犬馬만 못하니 애통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라고 탄식하고 있다.

이와 관련 민 교수는 “<실록>으로 보면 이증의 경우, 1592년 11월 초 사간원이 피난 간 임금을 제때 호종하지 않고 뒤늦게 나타났다고 그의 파직을 요청한 기사가 보일 뿐으로 부왜附倭(:왜국에 빌붙어 나라를 해롭게 하는 사람) 여부는 언급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김종려의 경우는 선조25(1592)년 9월 29일(병술)조에 비변사가 아뢰기를, “충청 감사 윤선각의 장계를 보건대, (전략) 전 군수 김종려와 전 찰방 남경성 등은 한명윤과 함께 의논하여 직접 정예병을 거느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결전을 하였으니 역시 가상합니다. (중략) 종려는 속죄하여 복직시켜 주고 경성은 기부起復하여 서용하소서.”라고 있다.

민 교수는 “여기서 김종려가 속죄했으니 복직시켜 주라는 것이 주목된다. 아마도 7월까진 부왜附倭했던 자로 알려진 그가 9월엔 전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복직되는 듯하다.”라고 설명했다.

▲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을 공격하는 일본군(사진제공=독립기념관)

도주한 백사림에 관한 기록도 엇갈려

백사림은 정유재란기 황석산성에서 도주했던 김해부사를 말한다.

<고대일록>에 따르면, 1597년 8월 말 백사림은 왜군으로부터 산성을 방어하는데 자신이 거느린 김해의 군사만으로 족하다고 큰소리를 친다. 막상 왜군이 공격을 가하자 사림은 밤중에 도주하고 관준(안음현감)이 오히려 죽게 된다. 그로부터 1월 후인 9월 말엔 성을 수비하는데 노약자는 성 밖으로 나가라는 도체찰사 이원익의 분부를 백사림은 감춘다. 정작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두 첩을 몰래 성 밖으로 내보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양정이 백사림에게 속임을 당하여 흉측한 칼끝에서 헛되이 죽었으니 애달프기 짝이 없다. 사림은 일찍이 성안에 있으면서, 노약자는 성을 나가게 하라는 도체찰사의 전령을 숨겼다. 또한 남몰래 자신의 어머니와 두 첩을 내보내고도, 안음과 거창의 두 관아에는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마음 쓰는 것이 왜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1597년 9월 27일(을묘)”

“하성원ㆍ문군변ㆍ류임가 등 여러 형이 열읍列邑에 통문을 돌렸다. 백사림이 사람들을 속이고 패군敗軍한 죄를 장차 상소를 올려 드러내고자 하였다. 백사림은 많은 사람 앞에서 큰소리치면서 말하기를, “비록 함양ㆍ거창ㆍ안음 등 세 읍에 군사가 없다 하더라도, 나 혼자서 김해 사람들과 함께 산성을 지킬 것이다.”라고 했다. 왜적이 침입해 오던 날에 자기가 먼저 도망가서는, 항복한 왜놈 한 명과 함께 산골짜기에 숨어서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집 식구들을 보전했으며, 곽양정에게 해를 입게 하여 사람들이 한결같이 이를 갈았다. 그래서 대론臺論이 일어나 왕명으로 그 죄를 다스렸다. 그러나 도리어 죄를 면하려고 죄 없는 사람을 언급하여 연루시키니 사론士論이 원통하게 여겼다. - 1599년 2월 17일(정묘)“

“백사림이 풀려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아! 유일은 죄를 받고 사림은 석방되었으니, 형벌의 적절하지 않음이 극도에 다다랐구나! - 1604년 6월 9일(무자)”

민 교수는 “백사림의 행위에 대해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를 검토해보면, 1597년 9월까지는 구체적인 실정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라며 “오히려 항왜 사백구의 도움을 받아 백사림을 탈출시켰으니 표창해야한다는 김응서의 제안까지 더해지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특히 노약자는 성밖으로 나가게 하라는 도체찰사 이원익의 전령을 백사림이 숨겼다는 내용, 백사림의 두 첩도 도주했다는 내용 등은 실록에선 나타나지 않는다.

1598년 1월에 이르러 백사림에 관한 처벌은 백의종군으로 이미 판결나게 된다. 그 배경엔 미리 도주한 것이 아니라 함락 직전 도주한 것이기 때문이라 하고 있다. 그 후 백사림이 왜적 7명을 참획하여 속죄했음을 1598년 9월의 의금부 보고를 통해 알 수 있다.

민 교수는 “1599년 5월 이후 사헌부가 나서 처벌을 요구했으나 선조는 일단 내린 석방령을 철회하지 않았다. 1609년 11월 광해군은 속죄조건으로 공을 세우라고 했다. 결국 백사림은 처형되지 않고 생을 마감한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9일 월례발표회는 민덕기 교수외에 김시덕 고려대 교수가 ‘징비록과 동아시아’를, 현명철 무학여고 교사가 ‘1872년 화륜선 입관에 대하여’를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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