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운 날에는 손이 모두 얼어버려요. (제가) 장갑을 끼고 있으면 사람들이 불편해서 서명을 받지 못했어요. 쉬었다가 하기도 하고, 눈이 오는 날에는 전북도립미술관 들어가는 길목에서 서 있다가 받기도 했어요.“

지난해 11월 17일부터 올해 2월 17일까지 1만 명의 시민에게 얼찾기 서명을 받은 성장경 씨(62세, 전주시)의 말이다.

우리얼찾기서명운동본부(이수성 명예위원장)는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의 문제가 물질문명 속에서 우리의 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운동본부는 도덕과 양심, 조화와 상생이라는 우리의 얼을 되찾아 모두가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우리얼찾기 범국민운동을 전개한다.

전국에서 최초로 1만 서명운동을 받은 성장경 씨는 2월 18일 코리안스피릿 국학신문사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서명운동은 자존심이 강했던 나를 바꿔놓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김해에서 부동산협회장을 5년 근무하고 건설회사 CEO로 활동하다가 얼마 전 퇴직했다. 지난 10월에 전주시로 이사와 전라북도 선도문화연구원의 회원이 되었다.

▲ 전국에서 최초로 1만 서명을 받은 성장경 씨(제공=전라북도 선도문화연구원)

“육십 평생 살아오면서 제 영혼이 기뻐하는 일이 많지 않았어요. CEO로 돈 벌려고 살아왔는데, 그 기쁨이란 게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서명운동 취지를 읽는데 공감이 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모두를 위한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바꿔나가는 그 내용에 공감이 되었던 거죠. 또한 중국의 역사왜곡으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 우리 국민을 보면서 얼을 깨우고 우리의 것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11월 17일 전북 선도문화연구원 사무실에 회원들이 모였다. 연구원은 서명운동을 전개한 지 1주일 만에 1,070명을 달성하고 있었다. 이날 회의에서 2013년 2월까지 1만 장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들이 나왔고 성 씨는 ‘내가 1만 장을 받겠다’고 그 자리에서 말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성 씨는 매일 오후 1시 30분부터 5시까지 서명운동에 모든 것을 걸었다. 많이 받는 날에는 200장을 받았고 적게 받는 날에는 100장은 받았다. 중요한 것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의 굳은 결의다.

“저는 서명 나갈 때 어깨띠를 하고 나갔어요. 왜 했느냐? 얼찾기 서명운동하는 어깨띠를 두르지 않으면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처음 갈 때부터 정신무장을 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조금만 장애가 있어도 포기하게 됩니다. 오늘 반드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서명을 받겠다고 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대학생, 직장인, 학부모, 노인 등 그가 서명을 받은 사람도 다양했다. 성 씨는 거리를 바쁘게 지나가는 시민의 마음을 10초 만에 잡을 수 있는 멘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취향과 관심사가 다르죠. 그에 맞게 말을 하고 공감을 이끌어내야 서명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머니들은 좋은 학교를 만들자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 공감대가 만들어집니다. 대학생에게 직업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40~50대 남자들은 우리 역사를 주제로 이야기합니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가 모두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아리랑, 가야금, 태권도 등도 우리 것인데 중국에서 유네스코에 자국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거나 시도하고 있는데 찾아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성 씨는 서명을 받을 때, ‘이 사람은 되고 저 사람은 되겠다’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 서명은 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중요한 것은 서명을 받기 위해 ‘꼭 받는다’는 신념화가 되어야 한다.

“그 분의 가슴에 와 닿는 말을 해줘야 합니다. 가슴을 녹여내야만 서명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 모악산 입구에서 거리 서명을 받고 있는 성장경 씨(제공=전라북도 선도문화연구원)

매일 하다 보니 노하우도 생겼다.

“5~6명에게 다가가 서명을 받았습니다. 2명이 서명을 하고 있으면, 나머지는 기다리는 게 지루해서 가버려요. 서명판이 3개라면 6명이 있어도 2번만 하면 되잖아요. 시간도 절약하고. 그때부터 3개씩 가지고 서명을 받았습니다.” 

서명을 받는 그에게 시민은 사탕이나 과자를 건네며 격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곤경에 처할 때도 많았다.

“70대 되시는 분들이 5~6명이 담론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서 설명했죠. 그런데 한 분이 우리 회의하는데 방해하고 서명을 받느냐고 화를 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떡합니까? ‘미안합니다. 이야기하십시오’라고 돌아선 경우도 있습니다.”

그도 처음부터 서명을 잘 받은 것은 아니었다. 2011년 단기연호 부활 서명운동에도 참여했지만 그때는 많이 받지는 못했다.

“그때는 제가 자존심 때문에 10명도 서명을 받지 못했어요. 남해고속도로에 있는 진영휴게소에 갔을 때였어요.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남에게 굳이 고개를 숙여야 할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사명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어깨띠만 두르고 홍보활동이나 하겠다’라고 말하고 이틀 정도 하다가 말았어요.”

성장경 씨를 서명운동의 달인으로 만든 것은 바로 뇌교육 명상이었다.

“아침과 저녁마다 수련을 합니다. 서명을 안 해주고 돌아가는 사람에게 웃으면서 인사할 때, 신기하게도 무겁던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거예요.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못하는 ‘자만심’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저에 대한 와칭(Watching: 명상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된 것이죠. 세상 사람에게 얼을 전하겠다는 저 자신을 보며 놀랄 때가 참 많습니다.“

화도 많이 내던 그의 성격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의 표현으로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이 내공으로 쌓였다고 했다.

“서명운동은 제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한 축복입니다. 서명을 받기 위해 몰입하다보면 세상에 힘들고 어려운 것도 잊어버려요. 제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 힘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육십이 넘은 나이지만 어떤 어려운 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건설회사CEO로 살았던 그는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얼찾기 서명운동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얼찾기 서명운동은 우리 사회문제를 국민에게 알리고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또 서명은 적극적인 사회계몽운동입니다. 앞으로 많은 사람에게 국학을 알리고 얼을 알리는 강사로서 활동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