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 매화가 벌써 피어 버렸어요. 그것도 홍매화가…. 해마다 이맘때쯤 들려오는 남도의 봄소식이다. 승주 선암사 주지 지허스님이 산중에서 매향을 좇다가 핸드폰으로 탄성을 전해왔다. 겨우내 움츠렸던 머릿속은 짜릿하고 신나는 긴장감으로 꽉 차게 마련이다. 나의 온 신경은 전남 순천 낙안읍성 위 금둔사쪽으로 향한다. 북풍한설 속에 우뚝 신선한 진분홍 홍매화와 매혹적인 그 매향을 그리며….
금둔사 홍매화-이 땅의 토종 꽃 가운데 해마다 가장 먼저 피어나는 것이자 예쁜 자태와 향내에 있어서 뒤이어 피어나는 온갖 꽃들에게 추종을 불허하는 꽃이다. 그 홍매화가 지난 설날 아침 이 땅에 서광을 내리듯 홀연히 피어나 은은하고 감동적인 매향으로 세상을 적셔주고 있다. 지난 해보다 일주일 가량 빠른 일이다.

▲전남 순천 금둔사 홍매화.

금둔사 홍매화는 20년 전 지허스님이 이 절을 지으면서 절 아래 낙안읍성마을 민가에서 씨를 얻어와 심은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 그루가 이제 딱 매화의 진가를 발휘하기에 알맞는 2미터~3미터의 키로 자라 꽃을 피우고 있다.
매화가 눈물겹도록 반가운 것은, 엄동설한이 채 끝나기 전에 우리에게 따스한 봄기운을 전해주면서 삶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미덕 때문이다. 매화는 눈을 이고 피어나기도 하고 핀 뒤에 잔뜩 함박눈을 맞아도 움츠리는 법이 없어 '설중매'(雪中梅)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길래 기품을 중히 여겼던 우리 조상들은 해마다 이 무렵 산중 눈 속에 피는 매화를 찾아나서는 일을 매우 귀한 연례행사로 여겼다. 그리고 매화를 그리고 매향시를 짓는 일을 생활의 큰 즐거움으로 삼았다. 눈 색깔과 같은 백매화나 청매화도 눈을 이고 피어나는 모습이 가상하기 그지없을진대 더구나 홍매화가 백설 속에서 진분홍 입술과 노란 속눈썹을 내미는 자태란 제아무리 시흥이 출중한 선인들일지라도 아예 시 짓기를 포기해 버렸을지 모른다. 설중 홍매화에 대해 읊은 구절이 눈에 띄지 않으니 말이다.

 

금둔사 홍매화는 겹꽃이다. 20~30개의 꽃잎이 겹으로 지름 1cm 안팎의 크기로 열린다. 꽃잎 안쪽에는 20~30개의 노란 꽃술이 돋아있다. 그리고 꽃의 개체들은 서로 2~3cm의 간격을 두고 줄기에 돌아가며 달린다. 매화의 향이나 매실의 약효는 홍매화, 청매화, 백매화 순이다. 따라서 금둔사 홍매화는 가장 먼저 피고 가장 깊고 그윽한 향기를 피워 주길래 겨울 끝자락 이땅에서 이만한 진객이 없다는 것이다. 금둔사 홍매화가 일찍 피는 것은 절이 남서향이어서 햇볕을 많이 쬐고 주위를 겹겹이 둘러싼 산자락이 찬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금둔사에는 대웅전 왼쪽 계곡 옆 낮은 돌담가와 그 안쪽에 각각 한 그루씩의 홍매화가 있다. 또 대웅전 오른쪽 계단 위 샘 오른 쪽 지붕 가에 작은 홍매화나무가 한 그루 있고 대웅전 윗쪽 칠성각 앞에 두 그루의 홍매화나무가 있다. 이들은 지난 설날(12일) 아침 꽃망울을 터드리기 시작해 지난 주말까지 반 정도가 피었다. 매화는 보통 20일 가량 꽃을 피우기에 3월초까지 가면 금둔사 홍매화를 만날 수 있다.
 

금둔사 홍매화가 지면 이어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어 선암사 홍매화와 청매화가 피어난다. 선암사 홍매화는 금둔사 홍매화 보다 약간 옅은 연분홍색이다. 또 선암사 매화 끝머리엔 3월 하순~4월 초 무렵 길 건너 구례 화엄사 흑매화가 이 땅의 진실한 매객(梅客)들을 맞는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금둔사 홍매화, 선암사의 선암매, 화엄사의 흑매는 모두 600여 년씩 묵은 이 땅의 진귀한 토종매의 원조이거나 그 자손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땅은 일제가 들여온 개량종 '왜매'가 '매실 상업주의' 물결로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풍 '매화축제'와 왜곡된 '매실건강 만능주의'는 토종매가 이룩해 놓은 우리의 전통 '매화문화'와 신토불이 건강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매화란

60평생을 토종 선암매와 더불어 온 선암사 주지 지허스님(061-754-5636)의 증언에 따르면, 매화는 겨울이 혹독할수록 향기를 짙게 내는 '군자의 덕'을 지녔다. 꽃봉오리가 얼어서 도저히 꽃이 안 되겠다 싶을 때 더욱 그윽한 향기를 내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이는 부처님이 6년 동안의 설산수도 뒤 도를 이룩한 것이나 스님들이 고통을 감내하며 수행하는 것과 흡사하다. 또 정 다산처럼 선비가 귀양갈 것을 무릅쓰고 직언을 하여 훗날을 위한 업적을 남기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덕성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매화의 덕을 기려 매화(열매가 아닌 꽃)와 그 향기를 가까이 하고 완상하는 것만으로 큰 줄거움으로 삼았다. 비료와 농약을 주는 대규모 매실농원의 매화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매화(매실)에 관한 후세인들의 인식은 크게 오염돼 있다. 오늘날엔 꽃이나 향기의 감상이 아니라 매실의 양과 수익에만 초점을 맞추고 매실음식을 먹는 것으로 직성을 풀려고 한다. 이는 일본의 양산위주 개량매(왜매)가 이 땅에 들어와 저질러놓은 일제 '매실 상업주의'의 노림수이다. 왜매는 꽃과 열매가 가지에 빈 틈 없이 덕지덕지 달린다. 향기는 나는 지 없는 지 모를 정도이다. 이에 비해 우리 토종매는 꽃이 띄엄띄엄 달리고 열매도 작다. 향기는 동구밖까지 퍼진다. 요즘 광양 섬진강가 일대 대규모 매실농장들에 있는 것은 모두 일본매화이다.
우리 조상들은 매실로 오직 '짠 지'(짠 김치) 하나만을 만들어 먹었다. 토종매실의 신 맛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따서 소금물에 한 번 담가 그늘에 말리고, 또 다시 그 소금물에 담가서 그늘에 말려 수분을 제거하며 매실성분을 농축시킨다. 쪼글쪼글해지면 항아리에 `매실-소엽(기관지에 좋은 한약재)-매실-소엽'의 순으로 켜켜이 넣고 소금물을 달여 붓는다. 푸른 빛이 도는 밤색으로 익어 나온다. 이것을 8월초에 담가 한 여름에 '봄 매화'를 그리며 밥 한 그릇에 한두 알을 찬으로 먹는다. 식사 뒤에도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다니다가 매실냄새가 다 가실 즈음 마당 한 구석에 퉤 하고 뱉어버린다. 입맛 없는 시기의 별난 반찬이자 여름철 이질을 막아주는 효과도 있다.

일본의 우메보시는 우리의 매실짠지가 건너가 일본인들 입맛에 맞게 덜 짜고 달게 변형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습한 기후 때문에 장이 약하고 체질적으로 이질에는 치명적이어서 예방효과를 고려해 매실을 좋아한다. 또 날 생선을 많이 먹는 일인들의 식단에서 매실은 비린내를 없애주는 구실도 한다. 이렇게 풍토와 체질이 다른 일본인들이 필요상 매실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개량한 것을 일제때 녹차와 함께 들여와 이 땅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각성없이 오늘날 일본 것과 흡사한 매화축제와 매실음식이 판을 치고 있다. 특히 우려할만한 것은 체질이 다른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처럼 매실음료나 매실음식을 많이 먹어도 되느냐이다. 매실음료는 위나 간이 나쁜 사람에게는 매우 해롭다는 것이  옛 의학서의 가르침이다. 예로부터 매실농사를 많이 짓는 집안에 위암환자나 간장질환 환자가 많이 난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금둔사 가는 길
순천에서 낙안읍성을 거쳐 간다. 낙안읍성에서 위쪽(북쪽)으로 5km 지점에 금둔사가 있다. 금둔사에서 북쪽으로 상사호를 지나 11km 지점에 선암사가 있다. 숙식은 낙안읍성이나 선암사 사하촌 식당가(민박가능)도 좋다. 금둔사 바로 아래에 낙안온천이 있다.
 

전 한겨레신문 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