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기원은 어디인가. 신용하 울산대 석좌교수는 지난 8일 서울시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열린 국학원 제114회 국민강좌에 초청되어 '한민족 한강기원설'을 주장하여 눈길을 끌었다.  사단법인 국학원이 주최하고 서울국학원이 주관한 이날 국민강좌에는 시민 100여 명이 청강을 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이날 강연 제목은 '고조선국가와 고조선문명의 형성'.

신 교수는  기존학설에서 주장하는 한민족 기원에 대한 접근은 과학적으로 검증해 본 결과 근거를 찾기가 어렵고,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기초 위에서 한민족 기원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 신용하 교수(울산대 석좌교수)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야기하는 한민족 기원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신 교수는 '한강문화론'을 제시했다. .

 지구는 구석기 시대에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 약 5만년 전부터 빙기와 간빙기가 수 차례 교차하면서 약 1만 5천년 전에 가장 혹독한 '최후의 빙기'를 맞이하여 지구상에 인종과 동물의 약 99%가 절멸하였고 나머지 1%만 살아 남았다. 최후의 빙기의 영향으로 <북위 40도선 이북>의 생물은 식물, 동물할 것 없이 절멸하였다. 반면 <북위 40도 이남>은 식물은 살아 남고, 동굴을 찾아서 동굴 속에 거주지를 확보한 구석기인들만 살아 남았다.

이런 상황을 통해 유추해 볼 때 "<북위 40도 이북>에서 문명과 민족이 형성되어 현대의 민족을 만들었다"라는 이론에서 한민족의 기원을 찾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고 신 교수는 주장했다.

 이에 동굴이 제일 많은 지역이 어디일지 찾아 보니 뜻밖에도 <북위 40도 이남>인 한반도였고 약 2천여 개가 있었다고 한다. 

빙기를 피해서 남하하던 구석기인들이 석회암 동굴에 들어가 간신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가 B.C 12,000 ~ B.C 10,000년경 후기에 오늘날과 같이 기후가 따듯해지면서 동굴 밖으로 나와서 강가에 자리를 잡아 초막을 짓고 채집경제뿐만 아니라 농업경작을 시작하면서 신석기가 시작되었다. 그 증거로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신석기 유적, 제주도 고산리 유적, 경상북도 청도군 오진리 암음유적(신석기시대 전기)을 들 수 있다.

 이 유적들을 통해서 볼 때, 기존학설이 주장하고 있는 종래의 한반도에 B.C 6,000년경 신석기 시작설은 B.C 10,000년경으로 수정이 필요하다고 신 교수는 말하였다. 

 
“소로리 볍씨 유적이 갖는 의미는…”
 
구석기인들이 강가에 자리를 잡고 채집경제와 농업경작을 시작하면서 신석기 농업혁명의 시작과 미곡 식문화가 나타났다. 이를 뒷 받침하는 증거로 남한강 상류와 금강 상류 사이 청원군 소로리에서 B.C 10,550년경의 볍씨 18톨이 발견되었다. 그 볍씨의 종류는 14톨은 단립벼, 1톨은 장립벼, 1톨은 자연벼, 2톨은 파손된 벼였다. 
 
세계학회에 보고된 벼의 기원은 B.C 9,050년경 중국 양자강 상류 호남성 옥섬암에서 발견된  장립벼로 보고 있다.
반면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는 B.C10,550년경이고 단립벼이다.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는 양자강의 볍씨보다 무려 1,500년을 앞선다. 이것을 바탕으로 신 교수는 단립벼의 기원은 한반도 한강문화(남한강 및 금강상류)가 기원이고 장립벼의 기원은 중국 양자강 상중류에서의 기원이라는 세계 벼재배의 2개의 기원설을 정립해 말하였다.
 
이는 남한강 유역과 금강상류에서 시작된 단립벼, 밀, 보리 재배가 비롯한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동아시아 최초의 시작”설을 정립할 수 있는 의미를 갖는 소로리 볍씨는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한강문화로 보고, 이 한강문화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을 시작하여 전파시킨 문화라고 말하였다.
 
“신 교수가 말하는 고조선 건국학설...”
 
이때 한강문화권에 살고 있는 다수의 씨족들이 서로(한강, 금강, 한탄강, 임진강, 영산강, 낙동강…등) 결합하여 '한' 부족의 형성되었다. '한'부족은 한강유역에서 신석기시대 말기에 이미 군장사회를 형성했으며 '한' 부족 군장의 여러 아들들 가운데 하나(환웅)가 북방으로 무리를 이끌고 이동하여 대동강 중상류에 정착 하였고 이들은 후에 고조선 건국시 “왕”을 배출하였다.
 
이에 고조선 건국에 대하여 살펴보자면 기존 학설은 ① '예맥' 1부족설(이병도 교수) ② '예' 부족과 '맥' 부족의 2부족 결합설(김상기 교수)가 있다. 그러나 신 교수는 이러한 기존의 고조선 국가 건국의 학설에서 벗어나 '한' 부족과 '맥' 부족과 '예' 부족의 3부족 결합설을 주장하였다.
 
신석기시대 "홍산문화" 등(중국에서 말하는 요하문명)을 창조한 "맥" 부족은 여족장 지배와 여신을 숭배하는 모계부족사회였고 고조선 개국 때 왕비를 내는 부족으로 "한" 부족과 혼인동맹의 방법으로 고조선 개국에 참여하였다.
“맥” 부족은 여성중심의 부족으로 “칼”(군사력)을 활용하지 않으므로, 사회학적으로는 부계사회의 부족과 결합하지 않는 한 고대국가 건국을 주도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북방으로 무리를 이끌고 이동하던 “한” 부족이 청천강, 대동강 유역에서 “맥” 부족 및 “예” 부족을 만나게 되자, “한” 부족이 왕을 내고 “맥” 부족이 왕비를 내어 혼인동맹으로 결합하고, “예” 부족은 자율권을 가진 후국족으로 결합하여, “한” “맥” “예” 3부족 결합에 의한 고대국가 “고조선”이 개국되었다고 3부족 결합설을 주장하였다.
 
“한” “맥” “예” 3부족의 연맹에 의하여 먼저 “고조선” 국가를 수립하고 고조선 국가의 통치를 받은 “한” “맥” “예” 3부족이 하나의 문화공동체로 결합되고 융합됨으로써 “고조선민족”이 형성되었고 “고조선민족”이 한국의 “원민족”이며 “한국민족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3부족 결합설을 통하여 보자면 고조선민족은 한강문화, 대동강문화, 요하문화를 통합하여 "고조선문화"를 창조하고 후국들의 문화를 포함한 “고조선문명”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기존의 많은 학설이 있지만 신 교수의 과학적 검증을 통한 학설을 통하여 보자면 고조선 국가의 수립 및 문화가 바로 한국민족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민족 기원 역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