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왕검(檀君王儉)의 역사-

[순(舜)의 천자(天子) 자리 찬탈(簒奪)]

서기전2284년 정사년(丁巳年)에 단군조선 땅에도 대홍수가 우수주(牛首州)를 중심으로 발생하여 치수(治水)에 여념이 없던 틈에, 천자(天子) 요(堯)의 섭정(攝政)이던 순(舜)이 자신이 계획해 왔던 일을 실행하기 위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순(舜)은 서기전2284년에 118세이던 요(堯)임금을 유폐(幽閉)시키고 드디어 천자(天子) 자리를 빼앗았다. 이때 순은 60세였다.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는 요순의 교체를 요순(堯舜)의 선양(禪讓)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실상은 순이 요임금의 천자 자리를 찬탈하였던 것이다.

서기전2324년에 유호씨(有戶氏)가 요임금을 토벌하러 갔을 때, 요임금은 곧바로 천사(天使) 유호씨에게 굴복하여 정식 천자(天子)로 인정받았던 것이나, 순(舜)은 허락이나 윤허를 받지 않은 찬탈자(簒奪者)로서 자칭 천자였지 인정받은 천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천사(天使) 유호씨(有戶氏)는 이러한 날이 올 줄 미리 예견하고 있었다. 그동안 순의 소행으로 보아 충분히 이러한 결과가 있을 것을 알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단군왕검 천왕(天王)께 미리 강구(講究)토록 고(告)하였던 것인 바, 서기전2311년에 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하고, 10년후인 서기전2301년에 요중(遼中) 12성(城)을 완전히 축조(築造)하여 놓아, 만반의 대비를 해 두었던 것이다.

서기전2284년에 순(舜)이 요임금으로부터 강압적인 선양을 받아 천자(天子)로 스스로 즉위하던 날, 유호씨는 순(舜)의 초청을 받아 참석을 하면서 순의 소행을 관찰하였다. 유호씨가 자칭 천자가 된 순(舜)의 앞에 등장하자 순(舜)은 천사(天使)이자 아버지인 유호씨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그냥 의례적인 인사로만 대신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행동이 떳떳하지 못한 것임을 내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요임금이 도(道)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였다면 순(舜)의 찬탈행위가 정당화 되었을지 몰라도, 이미 순이 섭정(攝政)으로 정치를 대신하고 있었던 상황에서는 순(舜)의 일방적인 권력욕(權力慾)에 의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즉 순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유호씨는 순(舜)의 이러한 불충(不忠)한 소행(所行)을 단군왕검 천왕(天王)께 모두 보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단군왕검 천왕은 “사람은 누구나 일시적인 욕심에 가려서 도(道)를 어길 수 있는 바, 반성하고 스스로 고치는 기회를 주는 것 또한 홍익인간의 실현에 해당하는 것일 것이니, 그대의 아들인 순(舜)이 정치를 어떻게 하는지 좀더 지켜보시라”고 조서를 내렸다. 이에 유호씨는 순(舜)을 감시하는 선에서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유호씨는 단군조선의 천사(天使)로서 단군왕검 천왕의 명을 받아 순(舜)의 소행을 지켜보기로 하였는 바, 이에 따라 순(舜)은 상국(上國)인 단군조선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반역자도 아니고 정식 천자로서 공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묵시적 천자로서의 모호한 상태에 있게 되었다.

[순(舜)의 3주(州) 추가 설치]

서기전2284년에 스스로의 결단하에 찬탈하여 천자(天子)가 된 순(脣)은 이전에 요임금이 설치하였던 9주(州)에 다시 욕심이 더하여 3주(州)를 추가로 설치하였다. 병주(幷州)와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였다.

병주는 요임금이 설치하였던 태원(太原) 북쪽의 기주(冀州)의 동쪽이며, 유주는 병주의 동쪽으로서 지금의 북경(北京)과 천진(天津)을 포함한 일대의 지역으로서 발해만 서쪽 지역이다. 영주는 산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 번한관경 내 남국(藍國)의 서편에 위치한 땅으로서 유주의 동남쪽에 해당하고 산동지역의 서쪽에 위치하였다.

순(舜)의 이러한 무례(無禮)한 소행에 대하여 유호씨는 더욱 긴장하며 대책을 강구하였다. 여차하면 순을 토벌할 기세였다. 그러나, 단군왕검 천왕께서 이미 순을 지켜보라는 명을 받은 터라 감시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삼랑성과 마리산 참성단]

서기전2283년 무오년(戊午年)에 단군왕검 천왕(天王)께서 운사(雲師) 소속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설치하고 마리산(摩璃山)에 제천단(祭天壇)을 쌓게 하였다.

이에 제1대 마한(馬韓) 웅백다(熊伯多)는 단군왕검 천왕의 명을 받아 마한 땅의 장정 8,000명을 선발하여 삼랑성과 참성단을 축조하였다.

혈구는 지금의 강화도(江華島)이다. 삼랑성은 정족산(鼎足山)에 축성되었으며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마리산 정상에 산머리를 깎고 쌓은 제천단이 참성단(塹城壇)이다. 참성단은 글자 그대로 산머리를 잘라 구덩이를 파서 쌓은 제단이라는 말이다. 참성단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모양을 본따 원방각(圓方角, ○□△)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랑성(三郞城)의 역할은 삼신(三神)을 모시는 제천단인 마리산 참성단을 수호하는 것이다. 삼랑(三郞)이란 배달신(倍達臣)으로서 삼신(三神)의 수호를 세습하는 벼슬의 명칭이다. 즉 삼랑은 운사(雲師)에 소속된 벼슬이 된다. 삼신(三神)을 지키고 사람의 목숨을 이치대로 하는 자를 삼시랑(三侍郞)이라 하며 원래 삼신시종지랑(三神侍從之郞) 즉 삼신시종랑(三神侍從郞)의 준말이다. 그래서 삼랑(三郞)은 삼신시종랑(三神侍從郞)의 준말이 되며, 삼랑성은 삼랑시종랑의 성(城)으로서 삼신(三神)을 모시고 지키는 역할을 하는 산성(山城)이다.

일설에는 삼랑성을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 하나, 이는 삼랑(三郞)이라는 말이 잘못 해석되어 와전되어 전한 것이 된다. 삼랑성은 삼신시종랑성(三神侍從郞城)으로서 삼신을 지키고 모시는 벼슬로서의 산성(山城)인 것이며, 이에 따라 삼신(三神)이 계신 마리산 참성단(塹城壇)을 수호(守護)하는 성(城)이 되는 것이다.

마한(馬韓) 웅백다가 참성단(塹城壇)을 완성한 후 3년이 지난 서기전2280년 신유년(辛酉年) 3월에 단군왕검 천왕(天王)께서 친히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하늘에 제(祭)를 올렸다. 3월에는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 : 삼신맞이굿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