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전라남도 진도군 오류리 해역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끈 해전 당시 사용되었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소승자총통(小小勝字銃筒)발견되었다. 오류리 해역은 1597명량대첩(鳴梁大捷)있었던 울돌목 인근이다. 소소승자총통은 기록에도 없는데 실물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번 발굴이 유물로서도 가치가 높지만, 그보다도 이순신 장군과 인연이 있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하다.
 
기사를 접하고, 오랜만에 이순신 장군의 자취를 만날 있는 충청남도 아산시의 현충사를 찾아 가 보았다. 현충사는 아산시 염치면 방화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 이곳은 1706숙종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업적과 순국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이순신 장군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현충사는 퇴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일본에게 나라는 빼앗겼지만, 민족의 정신만은 바로 세우겠다는 마음들이 일어났고, 1932 국민의 성금이 모아져 현충사가 중건되기에 이른다. 광복 이후, 1967년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현충사를 성역화하는 사업이 진행되었고,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충사는 본전(本殿), 구본전(舊本殿), 고택(古宅), 활터, 정려(旌閭), 이면()묘소 등이 자리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작년 봄에 개관한 '이순신 기념관'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기념관은 건축가 이종호가 설계한 작품으로, 자연 지세를 최대한 살리면서 현충사의 경관을 거스르지 않는 형태로 지어졌다. 마치 커다란 언덕 안에 기념관 건물이 안겨 있는 듯한 모습이다. 기념관 뒤쪽에서 바라보면, 전시관이 아닌 거대한 왕릉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념관에는 충무공 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해전 사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이 7간의 임진왜란 기간동안 전장에서 겪은 일들을 기록한 '난중일기(국보 76)' 앞에는 관람객들이 북적인다길이가 거의 2m가까운 충무공의 장검도 눈길을 모은다. 검은 전장에서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죽으려면 살고, 살려면 죽는다(필사즉생필생즉사 必死則生必生則死).’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고자  장군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본전까지 오르는 길에는 기기묘묘한 형태의 소나무들이 신령스럽게 서 있다. 소나무들의 모습이 장군의 충정과 기개를 상징하는했다. 사당 안에 모셔진 영정은 장우성(張遇聖) 화백이 그린 표준 영정으로, 관광객들도 이곳에서는 매무새를 가다듬고 경건하게 인사를 드린다.
 
이순신 장군의 고택으로 향했다. 고택은 단아함이 돋보이는 한옥으로, 집 편에는 이순신 장군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있다. 사당은 본전과 별도로후손들을 위한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장군이 순국한 날이면 전국에서 모여 후손들이 이곳에서 함께 제를 올린다고 한다. 고택 바로 옆은 활터다. 활터에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 그루가 있다. 오랜 세월, 나라를 위하는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후세에 전하는 늠름하다. 현충사 경내에 있는 묘에는 충무공의 셋째 아들인 이면이 잠들어 있다임진왜란 당시 21세였던 그는 왜군을 막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한다.
 
현충사 관광으로 아쉬울 때에는 예산 추사고택을 일정에 넣어 코스를 짜는 것도 좋다. 추사고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집으로, 그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이기도 하다.
 
 
추사 김정희의 명성도 유명하지만, 그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한신과 증조 할머니인 화순옹주(영조의 )이야기도 깃든 문화 유적이다. 이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서울 적성동에 있던 집을 뜯어다가 현재의 위치에 재건립한 것으로안채와 사랑채 2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18세기 중엽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화순옹주는 남편인 김한신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슬픔으로 식음을 전폐하여 남편의 뒤를 따른 여인이다. 영조는 화순옹주가 식음을 전폐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만류하였으나, 옹주가 끝내 말을 듣지 않고 사망하자 딸에 대한 서운함에 열녀비조차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추사고택은 김정희와 그의 선조들의 흔적이 남겨진 집인데도 불구하고 후손이 끊긴 까닭에 한동안 타인에게 매매되었던 안타까운 과정을 거쳤다. 다행히도 1976충청남도가 이곳을 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본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충청남도는 조선시대 유학이 피었던 지역으로, 양반의 고장,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시작될 겨울방학 동안,  아이들과 함께 조선시대 선비들의 숭고한 마음과 아름다운 이야기가 살아 있는 곳으로 여행을 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