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단군이 나라를 세운 지 4345년 되는 해이다. 그야말로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배달겨레의 후손이 서양문화에만 빠져있지 말고 우리문화를 더욱 사랑하고 즐기는 그런 겨레로 거듭 태어나길 간절히 바란다. 그런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는데 이 책이 작은 굄돌이라도 된다면 글쓴이로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최근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이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 서울문화 이야기(얼레빗)>를 펴내면서 밝힌 소감이다.

김 소장은 “세계적인 성악가가 내한하여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하는 공연에 66,000석이 넘는 경기장의 좌석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찼다. 그러나 얼마 뒤 국립극장에서 열린 국립창극단 공연은 기립박수를 칠만큼 수준 높고 멋진 공연이었지만, 427석밖에 안 되는 객석이 겨우 1/3만 차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얼레빗)

그는 한국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 같지만, 실제 나라 안 사정은 그렇지 않다면서 지난 2010년 서울문화 강좌에 대한 인기에 힘입어 책을 펴내게 되었다고 밝혔다.

조선의 비틀즈, ‘임방울’을 아시나요?

책의 첫 장은 비틀즈와 파바로티에 열광하는 국민에게 밀리언셀러 임방울 명창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조선과 일본과 만중에서 판소리 음반 120만 장을 판 사람이다.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는 당시 대일항쟁기에 비참한 민족현실과 가난에 대한 한스러움을 춘향의 신세에 견주어 울분의 소리로 토해낸 것이다.

이어 자신의 귀를 자른 화가 고흐는 알면서 조선시대 자신의 눈을 찔렀던 자존심의 화가 최북을 아느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어느 날 권세있는 사람이 와서 강제로 산수화 그림을 그리라고 하자 최북은 못 그린다고 했다. 권세 있는 사람이 닦달하자 문갑 위에 있는 필통에서 송곳을 꺼내 자신의 눈을 찌르면서 나 자신을 해칠지언정 남에게 구속받지 않겠다고 외쳤다고 한다.

김 소장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던 우리 화가 최북은 모르고 남의 나라 고흐만 알아도 될까?”라고 묻는다.

경복궁은 자금성에 비하면 화장실이라고

모두 11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한양을 중심으로 한 도성이야기를 비롯하여, 한양 풍속은 물론 환구단터, 심우장과 같은 역사적인 공간, 송파산대놀이와 추임새 문화, 조선그림의 비밀, 궁궐음식과 백성음식, 명절과 24절기를 쉽게 풀어내고 있다.

서울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여행서도 되겠지만, 외국 여행을 다녀와서 한국의 문화유산에 대해 폄하하는 사람들의 인식도 바로잡아준다.

중국 북경에서 자금성을 구경한 사람은 그 규모에 놀라면서 경복궁은 자금성의 화장실 정도라고 말한다.

책에선 경복궁과 자금성을 크기로만 견주는 것은 천박하다며, “자금성은 엄청난 크기, 엄격한 대칭, 깎아지른 직선으로 삼엄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지만, 경복궁은 열린 구조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을 궁궐로 이끌어오고 어디에서나 문을 열면 그 문을 마치 한복의 동양화를 걸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라고 설명했다.

경복궁이란 정도전이 지은 이름으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에서 딴 것이다. 백성과 임금이 모두 잘 사는 태평성대를 꿈꾼 이름이다. 반면에 자금성의 자(紫)는 하늘의 천제가 사는 ‘자궁(紫宮)’을 뜻하고 금(禁)‘은 금지구역을 뜻한다. 즉 하늘의 아들 황제가 사는 곳으로 일반 백성은 감히 들어올 수 없는 금지된 성이라는 뜻이다.

경복궁은 임금이 백성과 함께 복을 누린다는 것이지만, 자금성은 황제와 백성 사이에 커다란 벽이 존재한다.

▲ 김영조의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 서울문화 이야기'(=얼레빗)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

명륜동 성균관 정문에서 성균관을 안고 부엉바위 쪽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샛길이 있는데 그 이름이 ‘정(情)고개’였다. 그 정고개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와 비교될 수 있는 이야기가 서려있다.

조선 7대 세조 임금의 외딸 의숙공주의 종에게 예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성균관에서 과거를 준비하던 선비 안윤이 그 종의 딸을 사모하게 된 것이다. 어쩌다가 그 둘이 동거한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이에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상전은 종에게 가문형(家門刑)을 내렸다.

가문형은 스스로 자결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타살인데 목을 매 죽이거나 치마에 돌을 안겨 깊은 연못 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결국 이 종은 억울하게 가문형으로 죽었고 안윤도 그 처자를 그리면 고갯길을 오르내리다 실성하여 죽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 가엾은 연인들의 비극에 공감하여 고개 이름을 ‘정고개’라고 붙여준 것이다.

한편, 과부들을 위한 풍속으로 ‘보쌈’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조선 광해조 문인 유몽인이 지은 <어유야담>에는 과거를 보러 왔다 기이한 일을 겪은 선비 이야기가 있다. 인적이 끊긴 종가(현재의 종로)에서 장정 네 명에게 보쌈을 당한 일이다. 어딘지도 모르게 끌려가 예쁜 여인과 동침할 수밖에 없었던 선비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과거를 보러 한양에 왔다가 밤마다 그 종가를 서성거렸다고 한다.

이러한 풍속은 조선시대 때 과부가 된 여인은 죽을 때까지 개가를 못한다는 법으로 발생하게 된 것이다. 보쌈에는 여자 집에서 외간남자를 보(褓)에 싸서 잡아다가 강제로 동침시키는 경우와 남자가 과부를 보에 싸서 데려오는 ‘과부 업어가기’가 있다.

선정릉에 홀로 묻힌 중종, 그 이유는?

중종이 홀로 외롭게 묻힌 정릉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역 이름에 선릉역이 있는데, 실제로 선릉과 정릉을 합하여 선정릉이었다. 선릉엔 조선 제9대 성종과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가 묻혀있고 정릉엔 11대 중종이 홀로 묻혀 있다.

그 이유는 중종의 셋째 왕비 문정황후의 질투심이었다. 현재의 선릉자리가 풍수지리상 좋은 땅이라는 이유를 들어 중종 무덤만 옮기게 했던 것이다. 둘째 왕비 장경왕후와 중종이 나란히 묻힌 것이 싫었던 문정왕후는 중종을 홀로 옮긴 뒤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힐 속셈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여름철 홍수 때면 한강 물이 재실까지 차올라 다시 땅을 북돋아야 했는데 그때마다 큰 비용을 쏟아 부어야만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문정왕후는 자신의 바람대로 중종 옆에 묻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중종은 모두 11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결국은 홀로 외롭게 묻히게 되었다.

김영조,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 서울문화 이야기’, 얼레빗 2012년, 값 1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