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수학능력시험일은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라 할 수 있다. 수험생이 시험장을 가는 시간에는 군부대는 이동을 멈추고, 직장인들은 출근시간이 10시 이후로 미뤄진다. 시험장 주변 공사장, 쇼핑몰 등에서는 수능 날 만큼은 소음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듣기 평가가 이루어지는 시간대에는 비행기와 공군 등 모든 비행물의 이착륙, 시험장 근처에서 경적 등의 소음 원인물 사용이 금지된다. 이날만큼은 수험생이 왕이다.

이 같은 처사(?)에도 국민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건 초중고 12년 동안 얼마나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는지 알기 때문이다. 올해 수능은 약 67만 명이 응시한다. 자신의 인생이 걸린 이날을 67만 명이 기다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어땠을까?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에는 '과거'라는 시험제도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관리가 되려면 과거 시험을 거쳐야 했다. 과거 시험은 천민을 제외하고 누구나 볼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반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통로가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인재등용에 있어서 중국과 우리나라만이 시험제도가 있었다고 하니 과거는 시험으로 인재를 뽑았다는 점에서 아주 선진적인 제도였다.

수능과 비교를 거부한다! 과거시험 경쟁률 3000:1

2013학년도 대학입시 수시모집에서 가장 높은 경쟁률을 보인 학과는 보컬학과였다.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을 열풍이 그대로 반영되어 단군대 천안캠퍼스 생활음악과 보컬 전공은 3명 모집에 1,378명이 몰려 경쟁률 459대 1을 기록했다. 연세대, 고려대 등 서울 주요 10개 대학들이 지난 9월 발표한 수시지원 평균 경쟁률은 22.8대 1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높아도 조선시대 과거 앞에 수능 경쟁률은 명함도 못 내밀 듯 싶다. 총 33명을 뽑는 과거 시험의 응시자는 평균 6만 3천 명으로 약 2천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과거 시험의 꽃이라는 대과(문과)에서는 성적순으로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등 모두 33명을 뽑았다. 나라에서 과거 시험을 실시하면 전국에서 수천, 수만 명의 선비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보통 5세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30~35세쯤 되어야 과거에 급제했다고 하니, 그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이 간다. 대과는 모두 3번의 시험을 치른다. 첫 번째 시험인 초시에서 200명을 뽑고, 그중에서 복시를 치러 최종 합격자 33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시험 전시는 임금 앞에서 합격자의 순위를 매기는 시험으로, 임금이 최종 합격자 ‘장원급제’를 결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일생을 걸었지만 그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고종 때 사람인 박문규다. 그는 1887년(고종 24년) 개성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83세였다. 고종도 그의 급제에 깜짝 놀라며 특별히 정3품 당상관인 병조참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평생 과거 공부에 온힘을 쏟은 탓인지, 다음 해에 가선대부, 용양위호군에 오른 뒤 세상을 뜨고 말았다. 

▲ 서울 종로구 운형궁에서 매년 열리는 과거시험 재현 행사 (사진제공=한국의 장)

 
수능은 골고루 잘, 과거시험은 길게 또 길게

현대의 수능에서 수험생들은 언어 영역, 수리 영역, 외국어 영역, 탐구 영역(사회/과학/직업 탐구 중 하나의 영역을 선택), 제2외국어 영역의 5개 영역 중 하나 이상을 자유롭게 골라서 응시한다.

반면 과거시험의 문제는 요즘으로 본다면 논술형이라 할 수 있다. 장원급제자들의 답안지는 평균 길이가 10m로 앞면은 물론 뒷면까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 답안지 중 가장 긴 답안지는 12m에 달했다.

명종 때 식년문과에 '하늘의 변화는 어떠한 이치에 따르는가?'라는 문제가 나왔다. 장원급제자의 답안은 이러했다. '사람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이니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게 된다. 임금이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해 조정을 바로잡으면 천지의 기운도 바르게 된다' 이러한 답변을 낸 장원급제자는 바로 율곡 이이였다. 그는 과거시험 역대 최대 합격자이기도 한데 22세부터 과거시험에 9번 응시하여 9번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將元公) '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정행위는 기상천외하게 이루어져

2012학년도 수능 시험 도중 한 학생이 트위터로 수능을 생중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수험생은 “시험장에 들어가서도 트위터를 계속 할 겁니다. 지켜봐 주세요”라는 글을 시작으로 “헐, 언어 듣기 나온다” “아직 반 밖에 못 풀었는데”라는 글을 연이어 게시했다. 2교시 수리영역 시간엔 “마킹은 다 하고 자겠습니다. 주관식 두 번째 답은 14”라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경찰 조사결과 수험생은 실제 휴대폰을 시험장에 가져오지 않고, 집에다 두고 자동예약전송 프로그램을 사용해 부정행위로 적발되지는 않았다.

지난해 수능 부정행위자 적발건수는 ▲휴대폰 소지 77명 ▲MP3 소지 10명 ▲기타 전자기기 소지 7명 ▲4교시 선택과목 미준수 62명 ▲종료령 이후 답안 작성 9명 등으로 총 171명이 시험성적 무효 처리를 받았다.

▲ (사진제공=한국의 장)

과거 시험에서도 부정행위는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447년(세종 29년) 3월 16일 의정부에서 과거시험의 부정행위에 대해 세종에게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신하들이 벼슬길에 나설 때에 먼저 속임수를 쓰면, 양심을 저버려 아무짝에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과거 시험장에서 남의 재주를 빌려 답안을 쓰거나 남을 대신하여 답안을 써 주는 사람, 중간에서 서로 통하게 하는 사람은 곤장 백 대와 징역 3년의 엄벌에 처하십시오. 그리고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 주는 등 부정행위를 돕는 관리도 똑같이 엄벌에 처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처벌을 강화해도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남몰래 책을 들고 들어가 베껴 쓰는 사람, 옛날 사람이 지은 글을 표절하는 사람,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사람, 예상 답안을 종이에 미리 적어, 그 종이를 콧구멍이나 붓대 끝에 숨기는 사람, 글 잘 쓰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 대신 답안을 쓰게 하는 사람, 시험 제목을 가시 울타리 밖에 알려 다른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한 뒤, 시험장의 군졸을 매수하여 그 답안을 가져오게 하는 사람, 남의 답안지를 자기 답안지와 맞바꾸는 사람, 시험관과 짜고 자기 답안지를 시험관이 알아보도록 암호를 표시하여, 합격자 명단에 끼워 넣게 하는 사람 등등 선비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수법을 동원했다.

그러자 영조 때는 부정행위를 한 사람들의 합격을 막아 보려고 이런 방법을 쓰기까지 했다. 합격자 발표 다음 날 합격자들을 대궐에 불러들여 자기 답안지를 외우게 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답안지를 외우지 못하면 남이 써 준 것으로 보고 합격을 취소했다.

조선 후기 북학파의 학자였던 박지원은 자신의 글 <하북린과>에서 "과거장에 들어가려니 응시한 사람만 수만 명인데 과거장에 들어갈 때부터 서로 밀치고 짓밟아 죽고 다치는사람이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수만 명의 답안을 서너 명의 관리가 채점하다 보니 늦게 제출하는 사람의 답안은 사실상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과제를 빨리 확인하고 재빨리 답을 써 내기 위해 서너 명이 조를 짜서 전쟁 치르듯 과거 시험에 응했다고 한다. 먼저 하인들이 몸싸움을 불사하며 좋은 자리를 잡아내면 좋은 글귀로 글 짓는 사람이 글을 짓고 함께 온 대필가가 글씨를 써서 제출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사실상 대리 시험이 성행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과거만이 가문을 일으키고 인간다운 인간으로 대접받으며 사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기에 과거에서 부정행위가 빈번히 일어나 과거가 취소되는 일이 많았다. 결국 과거 제도는 조선 왕조 500년 동안 1만 5137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던 과거 시험은 848회를 채우고 1894년 갑오개혁 때 결국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