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2위의 경제 강국이라지만 내수 부문은 보잘 것 없다. 글로벌 경쟁이 격화되지만, 우리 경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 같은 총체적 위기상황을 타개할 묘안은 무엇인가? 우리의 준비역량을 어디서 나와야 할까? 이 같은 문제에 대한 해법은 오랜 한민족의 DNA를 형성해 왔던 끈질긴 ‘끈기’에서 나온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은 <2012년에 주목할 한국문화유전자>로 ‘끈기’를 꼽으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 1편에서 강병호 배재대학교 한류문화산업대학원장은 ‘역동’을 통해 해방 이후 단기간에 이룩한 경제성장을 이야기했다.(1편 기사 바로가기 클릭) 

반면에 전 소장은 “1960년대 국민소득 79달러라는 최빈국에서 90년대 완제품 시장으로 진출한 쾌거는 이미 과거의 성과에 불과하다”며 “그간 우리의 주종 산업이었던 반도체, 정보통신, 가전, 자동차, 조선 등 주력산업이 크게 힘을 잃어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한민족의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끈기'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조선을 기아에서 구한 ‘조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고구마를 들여온 이는 조엄(趙曮, 1719~1777)이다. 당대 최고 관료집안 출신이자, 풍양 조씨 문벌가였던 조엄은 왜 고구마에 그토록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이는 조엄이 살던 당시의 식량 사정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조엄이 일본에 파견되는 대일(對日)통신사 최고책임자로 발탁된 해는 1763년이다. 이 해를 전후로 해서 조선 각처는 극심한 기아에 시달렸다고 한다.

전 소장은 "사료를 살펴보면, 조정이 권농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흉년이 계속 들고, 자연재해까지 겹쳐 농민들의 삶이 극한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엄은 첫 기항지인 대마도에 도착하자마자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기막힌 해법을 목격하게 된다. 바로 고구마였다.

그는 일본열도로 통신사행이 떠나기 전에 사스우라(佐須浦)에서 급히 비선을 띄워 고구마 종자를 부산으로 보낸다. 그때 종자만 보낸 것이 아니라 보관, 재배, 증식법에 관한 자료를 함께 보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식량 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조엄이 시작한 '고구마 프로젝트'는 뒤를 이어 수많은 혁신가들에 의해 종자와 지식이 동시에 전수되고 퍼지며 누적의 힘을 발휘한다.

전 소장은 "시간이 갈수록 지식이 퍼져가고 자발적 참여로 집대성되며 매우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구휼 수단이 되어간 점은 끈기의 힘을 엿보게 한다. 그 결과 조선의 오랜 기근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솔루션으로 자리 잡아 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일본 도요타 자동차 원류, 문익점의 ‘목화씨’?

문익점의 목화씨가 일본 도요타 자동차를 만들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발표문에 따르면 조선으로부터 일본에 목화와 직기류가 전래되고, 그 후 일련의 기술 변천사에서 등장하는 기업이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전신인 도요타자동직기주식회사라고 밝혔다.

이 회사는 직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 인력직기를 동력직기로, 동력직기를 다시 자동직기로 발전시키고, 또 평면직기에서 환상(環狀)직기를 개발해냈다. 그 결과 도요타는 마침내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기에 도요타자동차를 출범시켰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와 직기, 새로운 직기 기술이 일본에 넘어가 자동차 사업의 원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문익점의 목화씨에는 어떤 ‘끈기’가 담겨있을까?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 온 것은 1364년(공민왕 13) 또는 1367년(공민왕 16)으로 보인다. 사행사로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은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마다하고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는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목화씨 10매를 배양했는데, 오직 1매만이 살아서 그 해 종자 1백 매를 얻게 된다. 이후 이 종자를 거듭 파종하고 번식시켜 3년 만에 드디어 목화종자를 다량 수확하게 된다.

목화 종자는 삼남(三南)지방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는데, 이때 확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들이 주변의 향리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목화는 급속도로 확산의 임계치에 도달하게 된다. 나아가 우리 풍토에 적응하고, 무명 직조에 성공하게 된다. 그 결과 배양에 성공한 지 10년도 못 되어 삼남지방에서부터 황해도ㆍ평안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전 소장은 이들의 성공요인을 "끈기의 릴레이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가 의(衣)혁명을 이뤄낼 수 있었던 힘은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지식과 기술을 확산시키고, 끈질기게 이를 퍼뜨려 나갔던 끈기에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방이 아니라 더 큰 유를 창조한 ‘세종’

어떤 역경과 난관이 있을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내 이루어낸 불퇴전의 정신은 ‘끈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세종이다.

전 소장은 세종이 이슬람 과학문명의 유산을 벤치마킹해서 조선에 맞게 독창적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이는 단순 모방한 것이 아니라 유에서 더 큰 유를 창조하는 ‘본유(本有)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낮과 밤에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인 <일성정시의>는 이슬람 기술이다. 세종은 장영실을 시켜 우리만의 독창적인 시계인 '옥루'를 만들어낸다. 이는 중국 송ㆍ원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이슬람의 모든 물시계에 대한 문헌을 샅샅이 연구한 끝에 창조적 혁신을 통해 우리 것으로 재탄생시켰다.

또한 세종은 조선의 농업 생산력 향상을 담은 <농사직설>을 만들기위해 3년 동안 전라, 충청, 경상도에서 농사를 가장 잘 짓는 농부들을 찾았다고 한다.

이밖에 32년 재임동안 세종이 추진했던 사업은 단기간에 이뤄진 것은 없었다. 공법(貢法)은 그 확정에만 26년이 걸렸고, 법전 정비에는 17년, 오례의(五禮儀) 정리에는 30여 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또 <훈민정음> 창제에 십 수 년, <고려사>편찬에 30여년, 6진 개척에는 10여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23전 23승의 쾌거, 이순신 장군의 힘

마지막으로 조선의 최대 국란을 극복한 이순신 장군의 힘 또한 ‘끈기’에 있었다고 전 소장은 주장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기 위해 한 곳이 아닌 세 군데 선소에서 진행했다. 그 세 곳은 전라좌수영 본영 앞 선소, 돌산 방답진의 선소, 쌍봉 선소를 말한다.

여기에는 숨겨진 이유가 있는데, 우선 목재 등 자원 채취의 용이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거북선 건조에는 수많은 조선 소나무가 목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원재료 조달 차원에서 세 군데에 조선소를 운영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또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적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동시 다발로 거북선 제작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선소를 각기 분리해 운영한 것이다.

또 다른 목적으로는 건조 지역의 제 조건이 반영되었고, 거북선 건조 프로젝트 관리상의 백업시스템 차원 등에서 운영된 것이다.

이에 대해 전 소장은 "요즘 경영 용어로 ‘제작 포트폴리오’를 분산해 위험요소를 줄이고, 효과성을 높인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 이순신 장군이 건조했던 거북선. 그의 끈기어린 혁신은 조선의 위기를 구하게 된 원동력이었다. 사진은 전남도가 개최하는 명량대첩축제에서 해전 재현에 등장한 거북선.<사진=(재)명량대첩기념사업회.

이순신 장군이 적에게 완패를 안겨 줄 수 있었던 것은 '무(無)시차 경영' 때문이었다. 이순신식(式) 함포 발사 방식은 적의 조종 사격 방식인 1선에서 발사할 때 2선, 3선은 장약을 채워 넣는 제사방식을 더욱 정교하게 아군에 적용해 함포 발사시 배를 리볼버 총처럼 360도 회전하여 가며 화포 사격을 가한 것이다. 그 때문에 조선 수군은 시차 없이 100% 효율성을 올리는 함포 발사 프로세스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순신 수군의 '360도 경영'은 해전에서 막강한 프로세스 혁신을 가져오며 전과를 거두었는데, 예컨대 왜군의 발사법이 흔들리는 바다·전함·사수·조총이라는 4가지 불확실 요소가 작용하고 있는 것에 반해, 거북선과 판옥선의 경우에는 움직이는 해상에서 배와 화포가 일치되어 불확실성의 요소가 2개로 줄어들며 상대적으로 훨씬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건립한 세 곳의 거북선 선소와  360도 회전의 화포사격 '무시차 경영'을 통해 혁신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가운데 무결점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3편 <예의>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