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원래 이름은 '추모(鄒牟)'이다. '주몽’이 아니다. '광개토대왕비'에  '시조 추모왕(始祖鄒牟王)'이라고 기록한 대로 '추모(鄒牟)'라고 불러야 옳다."

최기호 몽골 울란바타르대학교 총장은 24일 서울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국학운동시민연합이 주최한 '한국인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초청강연회'에 초청받아 '고구려강역의 진실과 한반도의 미래'라는 강연을 했다.

이날 강연회에서 최 총장은 고구려 시조에 대해 잘못 알려졌다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원래 이름은 '주몽'이 아니고 '추모(鄒牟)'이다. '광개토대왕비'에 '시조 추모왕(始祖鄒牟王)'이라고 기록한 대로 '추모(鄒牟)'라고 불러야 옳다"고 강조했다.
 

▲ 최기호 몽골 풀란바타르대학교 총장이 24일 서울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초청강연에서 '고구려 강역의 진실과 한반도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최 총장은 " 추모왕의 이름이 '추모(鄒牟), 추몽(鄒蒙), 주몽(朱蒙) 중모(仲牟)' 라는 여러 이름은 '광개토대왕비'에 있는 '추모(鄒牟)'왕을 여러 문헌에 한자로 전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 총장에 따르면 1145년 고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주몽'이라고 기술하였고 13세기 말(1281)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주몽(朱蒙)'이라고 기술했는데 이는 김부식이나 일연이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광개토대왕비의 존재를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김부식이나 일연은 중국 사서를 보고 '주몽(朱蒙)'이라고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  이 비석은 고려 시대나 조선 후기까지 존재를 몰랐다. 그러다가 청나라가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1908년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다. 
 

▲ 최기호 몽골울란바타르대학교 총장.

 주몽의 의미는 중국사서 <논형>과 <위서>에서 '부여어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부여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고 기록하였다.

최 총장은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이름 '추모' 는 몽골어 ‘촐몽’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몽골어 '촐몽'은 '동명성, 샛별, 금성'을 뜻하는데 '추모(鄒牟)'와 음운구조나 의미가 같기 때문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추모왕의 시호가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 

 5세기 초(414)의 <광개토대왕비>에는 추모왕을 '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6세기 중엽의 중국 사서인 <위서(魏書)>에는 '해의 아들(日子)'이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중국 사가들이 고의로 천제의 아들 추모왕을 낮춰서 '해의 아들'로 기술한 것이다.

최 총장은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는 [고구리]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햇다. 원래 추모왕이 졸본부여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구리(句麗)[고리/구리]’라고 하였다. 코리(호리) 부리야트와 ‘구리(句麗)[고리/구리]의 관련성도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연구할 과제라는 것. 

최 총장은 또 " 몽골 알랑고아 신화와 고구려의 추모왕 신화는 그 내용과 구성이 같으며, 햇빛 임신신화 형태도 같다. 알랑고아는 몽골 민족의 조상여인으로 여기서 ‘고아’는 ‘곱다’는 뜻이 있다.
알랑고아의 아버지는 코릴라르타이 메르겐이다. 몽골어 ‘메르겐’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단어로서 부여어 ‘주몽을 선사자(善射者)’라고 하는 어휘와 일치한다."고 말했다.

그는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엄리대수(奄利大水)'에 대해서도 지금의 '아무르 강'으로 본다고 했다.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피난하는 동선이나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에서 개국하는 것으로 보아 엄리 대수는 지금의 ‘아무르(Амур)강’이라고 본다. 

추정 근거는 이렇다. <삼국사기>나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추정하는 '엄리대수(奄利大水)'의 위치로 보아도 아무르강과 일치한다. 그리고 [엄리(奄利)-]의 음운구조와 [아무르(Амур)]의 음운구조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아무르(Амур)]를 한자로 전사한 것이 [엄리(奄利)-]이다. 대수(大水-)는 큰 강물을 이르는 보통명사이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추모왕이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하였다고 하였다.(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위서(魏書)>에서는 ‘홀본(忽本)’ 대신에 ‘흘승골(紇升骨)’이라고 기록하였다. <주서(周書)>에는 흘두골성(紇斗骨城)이라고 기록하였다. 추모왕은 흘승골에 이르러 홀본부여를 개국한다. 추모왕은 BC 37년에는 흘승골 비류에 홀본 부여를 개국하고 이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 서기 3년(유리왕 22)에는 도읍을 졸본성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다.

최 총장은 " 흘승골(紇升骨)’은 지금 동몽골 도르너드아이막의 ‘할힝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비류수(沸流水)’나 ‘보술수(普述水)’도 할힝골의 ‘부이르’호수와 할힝골을 지칭하는 한자 전사이다.  그러니까 홀본부여를 환인의 오녀산성에서 개국한 것으로 보는 기존의 가설은 수정되어야 한다. 추모왕은 고구려를 지금의 동몽골 도르너드 아이막의 할힝골 부이르 호수 부근에서 개국하였으므로 고구려의 강역도 달라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고구려의 최초 수도가 몽골에 있었다는 것. 

▲ 최기호 울란바타르대학교 총장이 강연이 끝난 후 국학원 장영주 원장대행(오른쪽)과 기념촬영을 했다.

최 총장은 이같은 연구 결과를 밝히며 "한국과 몽골의 역사적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깊이 있는 학제 간의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동몽골 지역을 대대적으로 학술 조사해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