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퇴와 섬멸의 대상, ‘왜’

고구려는 백제와 왜(일본)를 공동의 적으로 규정했지만, 왜는 백제와 달리 격퇴와 섬멸의 대상으로서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은 16일 동 재단 대회의실에서 광개토왕 1600주기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이날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난 고구려의 남방 세계관’이라는 주제에서 “비문에 나타난 왜는  ‘왜적퇴倭賊退’ ‘왜궤倭潰’ ‘왜구궤패倭寇潰敗’와 같이 격퇴와 섬멸의 대상이었다. 백제나 신라, 임나가라와 같은 항복, 복속의 맹서도 보이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연 위원은 고구려가 백제나 신라 등은 항복이나 복속과 같이 고구려적 천하질서의 일원으로 생각한 반면, 왜에게는 고구려의 영토 밖의 존재로서 인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화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와 왜를 공동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백제에게는 ‘잔殘’이라는 멸칭(잔이란 의義를 해친다는 뜻)을 사용하였지만, 왜에 대한 특정된 적賊(도둑 적), 구寇(노략질을 일삼는 도적)와 같은 적대용어는 적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연 위원은 “이것은 내부와 타자의 차별성을 나타낸 것이다”며 “왜가 고구려의 동류의식으로부터 벗어난 이질적인 존재로서 인식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당시 광개토왕이 추구하고자 했던 국가적 과제는 백제, 신라, 가야 등과의 전쟁을 통해 고구려 중심의 중화사상, 천하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특히 북방전쟁에 비해 5배 이상 남방전쟁을 기록한 것에서 고구려의 남방에 대한 강한 관심을 알 수 있다. 이는 장수왕의 평양천도와 그 후의 남방으로 팽창정책에서도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응징은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세력권 내에 편입시켰다는 주장이다. 즉 복속의례를 통한 정치적 상하관계를 맺고 조공(朝貢), 논사(論事)를 받는 것이다.

연 위원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주변제국에 대한 천하질서의 구현과 나아가 고구려의 한반도 남방에 대한 통일적 공동체의 실현이 국가적 지향점이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왜는 백제와 함께 고구려에 대항했다!

 
▲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 요코하마시립박물관 연구원(왼쪽)

이에 대해 일본 고대사의 권위자인 요코하마시립박물관의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 연구원은 “왜는 고구려에게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적대의 존재였다”라며 비문에 나타난 신묘년 기사를 근거로 내세웠다.

그는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를 파하고 신라를 □해서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 □는 훼손된 글자)고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다.

스즈키 연구원은 “이 조문의 왜 기사에 의해 광개토왕비는 중요 사료로서 간주되어 왔다”며 “백제와 신라는 원래부터 고구려의 속민이고, 고구려에 조공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왕의 즉위한 영락원년, 391년)으로부터 이래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를 파破하고 신라를 …해서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된다.”고 말했다.

그는 "「신민臣民」도 국과 국(민족) 간의 지배, 예속관계를 가리킨다. 신(臣)은 주군(主君)에 대한 말이기 때문에 왜는 신민을 통치하는 왕을 갖고 백제, 신라에 우월해 고구려에 대항하는 세력으로서 비문을 쓴 사관 등에게 인식됐다"고 해석했다.

스즈키 연구원은 391년부터 407년에 걸쳐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 있어서 고구려 중심의 국제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어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해 왜는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며 백제와의 통일적인 공동전선을를 펼쳤다는 것. 이 움직임에 대해 백제가 주도하고 왜가 추종하는 형태일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