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스피릿 특별연재-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찾아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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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거석문화의 중심, ‘고인돌’

우리나라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 ‘고인돌’은 세계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기념물이다.

세계적으로 고인돌은 아시아와 유럽, 지중해 연안, 인도, 동아시아 등에 분포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전 세계에 약 7만기의 고인돌이 있고 이 가운데 3만 개 이상이 우리나라에 있다.

특히 전북 고창, 전남 화순, 인천 강화 지역 고인돌은 지난 2000년 12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에 등재됐다.

고인돌이란 명칭은 큰 돌을 받치고 있는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고여 있는 돌’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영어로는 Table Stone이라고 한다. 켈트어로는 탁자라는 뜻의 Dol과 돌이란 뜻의 Men을 합해서 Dolmen(돌멘)이라고 한다.

▲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고인돌. 지난 2007년 시내 구산지구 택지개발사업 과정에서 발굴된 국내 최대 규모의 고인돌인 지석묘(支石墓)가 경남도기념물 제280호로 지정됐다. 상석 규모가 길이 10m, 폭 4.5m, 높이 3.5m에 이르며 무게는 350t에 달한다.[연합]

고인돌은 한반도와 현재 중국의 랴오닝(遼寧) 지역을 중심으로 3만여 기(基)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보통 중국 랴오닝 지역의 랴오허(遼河), 북한의 대동강, 남한의 한강과 영산강 등 큰 강을 따라 인접한 평야와 낮은 구릉에 위치한다.

하문식 세종대 교수는 <고조선 사람들이 잠든 고인돌과 동굴 무덤>이라는 논문에서 “고인돌 분포 지역이 고조선을 대표하는  표지(標識) 유물인 비파형동검 분포권과도 거의 일치한다”며 “고인돌의 분포를 통해 공통문화를 가진 고유한 집단이 있었다는 뜻으로 고조선의 실체를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고 밝혔다.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 학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20세기부터 기원전 3~2세까지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고인돌에서 수십 톤에 달하는 덮개들을 어떻게 옮겼을 까라는 의문이다. 단순히 사람의 노동력만을 이용했다고 가정하면, 한 사람이 끌 수 있는 돌의 무게가 120~160㎏ 정도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사람이 통나무와 밧줄로 30t의 덮개돌을 끌려면 약 200명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5인 가족을 기준으로 1~2명이 동원됐다고 하면, 약 30t의 덮개돌이 얹힌 고인돌을 만든 집단의 인구수는 1,000명 이상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고인돌을 만든 집단은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 한 분업화된 전문 장인과 조직을 통해 자연광물에서 청동을 뽑아내고 칼을 만들었다. 이는 정착생활과 농업경제의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비파형 동검과 함께 고인돌은 당시 고조선의 국력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인돌의 정체…무덤, 제단 그리고 천문과학의 결정판

그렇다면 고인돌은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는가? 이에 대해 일본인 학자들은 사람 뼈가 출토된 것을 바탕으로 ‘무덤’이 아니겠느냐고 판단했다.

하지만 부장품이 출토되지 않은 고인돌도 적지 않아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학자들은 고인돌이 종교 또는 신앙 행사에서 제단으로 사용되었거나 묘역을 상징하는 기념물 또는 묘역을 표시하는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 이맥이 쓴 <태백일사>에서도, “옛날에 사람이 죽으면 향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합쳐서 한군데에 매장하고 표시하여 지석이라 하더니, 뒤에는 변하여 단을 만들고 지석단이라 불렀다. 또, 제석단이라고도 했다. 산의 꼭대기에 있으면 산을 파고 성단을 만들어 천단이라고 했다”며 고인돌의 기능을 제단으로 밝혔다.

▲ 경남 의령군 가례면 일대에서 발견된 2천 500년 전 고인돌이다.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한 것은 별자리로 알려진 성혈(性穴)이다. 그동안 다산이나 부를 상징하는 원시종교의 표식으로 해석됐지만, 이를 별자리로 해석해 고조선 시대 천문학이 존재했음이 밝혀지고 있다.[연합]

특히 고인돌에 새겨진 성혈(性穴)에 주목해 이를 천문과학으로 봐야 한다는 연구성과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동안 ‘성혈’은 말 그대로 ‘성’의 ‘구멍’으로 다산, 부를 바라는 기호를 나타내 민간신앙이나 원시종교의 표식으로 해석했다.

이에 대해 처음으로 북한학계는 1997년 <조선기술사>에서 고인돌 덮개돌에 구멍들이 별자리라고 주장했다. 이어 국내에서는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1997년 <별자리형 바위구멍에 대한 고찰>이라는 연구논문을 통해 돌판의 구멍들이 별자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 1993년 <한국상고사학보>에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과학적 검증’이라는 논문으로 역사학계에 충격을 줬던 박창범 전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 또한 고인돌은 단군조선의 유물이자 별자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용복(서울교육대), 이융조(충북대)와  공동으로 2001년 <한국과학사학회지>에 <충북 청원 아득이 고인돌 유적에서 발굴된 별자리판 연구>이라는 논문을 통해 과학적 검증에 나섰다.

논문은 “아득이 돌판의 별그림을 좌표변환(확대, 축소와 회전)하면서 BC 500년의 실제 별들의 분포와 최대 상관을 이루는 경우를 찾아 별자리를 동정하였다. 컴퓨터가 객관적 기준으로서 두 분포 사이의 상관함수가 최대가 되는 때를 이용하여 수행한 동정 결과가 별자리의 모양을 비교하여 시각적으로 동정한 북두칠성 용자리 작은곰자리 등과 같았다.”고 밝혔다.

박창범 교수는 “천문지식은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과 그 현실적 응용(정치, 종교, 농경)이라는 측면에서 당시의 가장 중요한 과학의 하나이다.”며 “우리나라 천문지식에 관하여 그 기원을 삼국시대, 특히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약 400년간에 전래 된 중국의 천문학 등으로만 볼 수 없고 선대의 고유한 천문지식의 발생과 전승이 있었을 중요한 근거가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반전된 아득이 고인돌 돌판 별그림(왼쪽)과 서기전 500년 북극 근처에서 4.5 등급보다 밝은 별의 분포(오른쪽). 2001년 박창범 교수 공동 연구팀은 <충북 청원 아득이 고인돌 유적에서 발굴된 별자리판 연구> 논문에서 별자리 모양을 컴퓨터로 비교한 결과 북두칠성, 용자리, 작은곰자리가 같았다고 밝혔다.

이종욱 박사(한국과학기술인협회 부회장)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의 책 <세계 최고의 우리문화유산>에서 고인돌에 나타난 별자리를 통해 한반도가 고대 천문학의 발상지라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에 있는 외새산에서 발견된 10호 고인돌 뚜껑돌 겉면에 80여개의 구멍이 있는데, 홈구멍의 배열 상태를 조사한 결과 이 구멍들은 별자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연대는 측정 결과 적어도 기원전 2000~3000년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10호 고인돌은 세계 천문학계에서 고대 천문학의 발상지로 인정하는 기원전 1200년쯤의 메소포타미아 지역 바빌로니아 토지 경계비보다 1800~2800년이나 앞선 셈이 된다”고 했다.

고인돌 연구가 변광현 씨도 고인돌이 한반도를 비롯한 극동 지역에서 기원한다고 봤다.

이러한 주장은 ‘청동기 문명이 시베리아에서 시작되어 유럽으로 전파됐다’는 핀란드 학자 아스페링의 주장, 스톤헤지 주변의 묘지에서 발굴된 유골의 주인공이 아시아 계열로 청동기 문화를 수반하고 영국에 들어왔다는 연구결과들이 근거가 되고 있다.

4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