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고 마사쓰구 리츠메이칸대학 부총장은 9일 국학원 주최로 열린 한․몽․일 국제학술대회에 참석, 일본 하쿠산의 산악신앙이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국학원은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9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동북아 고대사의 공통분모 발굴을 통한 국제네트워크 구축’이라는 주제로 한․몽․일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번 대회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시민협력사업으로 선정되었으며,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을 받았다.

이날 혼고 마사쓰구 리츠메이칸대학 부총장은 ‘백산사상과 단군과 타이쵸(泰澄)-산악신앙의 원류 고찰’이라는 주제로 일본 하쿠산의 산악신앙은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악신앙의 영향으로 지리적인 근접성을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동해안으로 배를 띄우면 해류와 편서풍 관계로 하쿠산이 있는 호쿠리쿠 지역(北陸)에 도착할 가능성이 컸다는 것이다.

“일본해(동해)에 면한 호쿠리쿠 지역은 ‘북규슈(北九州)’와 ‘산인(山陰)’과 더불어 대륙 문화가 일본해(동해)를 건너서 찾아든 정면 현관에 해당하며 당시로써는 실로 최신의 대륙 문화를 마음껏 누리게 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백산에 대한 신앙이 형성되는 과정 또한 조선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전해준 신앙의 영향이 컸다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 일본의 백산이 한국의 백두산과 여러모로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백산이라는 명칭에서도 중국․북한 국경지대에 솟아있는 한민족 발상지라고 전해온다. 백두산도 일본의 백산과 마찬가지로 복수의 봉우리로서 구성되어 있는 연산(連山)이며 그 높이도 백두봉(白頭峰) 2,749미터, 백운봉(白雲峰) 2,692미터, 천문봉(天文峰) 2,670미터여서 백산의 여러 봉우리와 유사하다.

또한, 백두산은 그 중앙부에 천지(天池)라고 하는 화산호가 있는 것과 백산의 선정에 화산호인 료쿠하쿠치(緑碧池)가 있는 것도 공통적이다. 이와 같은 지형적인 공통의 특징을 살피자면 이 백산에 대한 신앙이 실은 한반도로부터 이 지역으로 건너와서 정주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들의 고향의 신앙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고 본다.“

[전문]


  백산사상과 단군과 타이쵸(泰澄)―산악 신앙의 원류 고찰    


산악신앙에 대하여 
 
백산(白山, 하쿠산. 기후현과 이시카와현 경계의 신앙의 산. 2702m)-그 신비한 모습에는 지금도 이 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다. 게절에 따라 바뀌는 그 모습이 때로는 어머니처럼 따사로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감싸주는가 하면 또한 때로는 마왕과도 같은 두려움으로서 사람들을 부들부들 떨게도 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산이 어째서 계절에 따라 모습이 변하며 또한 어떤 경우에 어떤 이유에 의하여 위험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은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상식이 되었다. 백산 그 자체가 우리들처럼 어던 의지를 지닌 생물로서 그 의지를 바탕으로 하여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며 또한 우리들에게 때로는 은혜를 베풀어주며 때로는 위해를 가해준다고 하는 그런 관념을 가진 사람은 상당히 신심이 깊은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적어도 에도시대(1603~1867)까지 살아 있었던 우리들의 선조는 백산을 신(神)으로서 부처(佛)로서 숭배하며 그 은혜나 위해를 신의 의지에 따른다고 생각하였다. 과학이 상당히 발전한 현대에 와서도 자연을 거스른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노릇이며 등산하는 등산가가 생명이 위태로운 처지에 빠지기도 한다는 사태를 생각하여 본다면 과학적인 지식을 방패로 삼아 옛사람들의 감각이며 행동을 조소하고 있는 현대의 우리들보다 에도시대 이전의 조상들 쪽이 훨씬 더 진리를 깨닫고 있었다고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과연 어떨 것인가.

산이다 강이라고 하는 자연 만물에도 영혼이 깃드려 있다고 상정하고 의지를 가지고 있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형태를 애니미즘(精靈 崇拜)이라 한다. 고대 일본 역사책 [고사기](712)며 [일본서기](720)의 신화에는 수많은 신이 나타난다. 본래 이들 신은 각기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인근의 자연물이며 그런 현상을 자신들 집단의 신을 삼아서 그 의지에 따라서 생업(生業)의 성과가 좌우된다고 간주한데서부터 유래했다고 본다.

오늘날 「신(神)」이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 이익을 베풀어주는 존재로서 비교적으로 가깝게 친근감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으나 고대 사람들이 상정했던 신의 모습은 결코 일방적인 혜택만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니고 오히려 신의 노여움에 의하여 엄청난 재해를 가져다준다고 하는 외포의 대상이었다. 그런 까닭에 어떻게 한다면 신의 마음씨를 건드리지 않고 대처할 것이냐 또한 일단 건드린 비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 그 집단의 중요한 과제여서 우선 신의 마음씨를 여쭈어 그 의향을 파악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겠끔 되었다.

신은 똑같은 장소에서 언제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때문에 우선 먼저 신이 기꺼히 찾아와 주실 수 있는 장소와 환경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신이 강림(降臨)하는 장소, 즉 좌정하시기에 어울리는 장소에 시선이 쏠리게 된다. 모양 좋은 나지막한 산, 그 기슭은 울창하여 신비한 분위기가 감도는 숲, 오랜 세월의 고목, 신이 앉을 수 있는 바위터――마을 인근의 산줄기는 신을 우럴으기 좋은 장소로서 여겨왔다. 특히 삼각추(三角錐)가 갖춰진 형태의 낮은 산이야말로 실로 신이 좋아하는 장소로 간주되어 ‘칸나비산(神奈備山)’ 등으로 이름을 불러왔다.

그런데 산이 신이 오시는 장소, 나아가서는 산 그 자체가 신의 몸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사람들의 생업과 관계가 있다. 선토기․조몬시대(B.C. 3.C 이전의 아득한 고대)라고 하는 사냥과 물고기잡이만으로서 먹을 것을 채집하던 시대를 지나 B.C. 3C경에 와서는 벼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생산 경제 단계, 즉 야요이시대(B.C. 3.C~A.D.5.C 이후 7.C경까지도)  를 맞이한다. 사람들의 생활의 사이클이 크게 변천했다는 것은 말할 것 없으나 으늘날까지도 그렇듯이 벼농사에는 물의 확보가 중요한 과제이다. 

그 물은 산으로부터 흘러내려 수많은 논밭을 적셔주고 드디어 바다며 호수로 흘러들어 간다. 즉 산은 물이 태어나는 장소에 불과하며 벼농사의 성과는 실로 산을 거느리는 신의 손에다 맡긴다고 생각하여 왔다. 마찬가지로 산에 대한 신앙이라고 하더라도 마을 인근의 수백 미터짜리 낮은 산은 백산처럼 3천 미터 가가운 고도를 가진 산악의 경우에는 그 이미지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생각이 들게 된다.

야마토분지(나라현)의 중앙에 자리하는 미와야마(三輪山)는 천황가의 발상지 근처로서 ‘미모로의 칸나비산’ 내지는 ‘미모로야마’ 등으로 불리우는 신의 산(神山)이다. 현재도 산 그 자체를 어신체(御神体)로 삼아 ‘오미와진자(大神神社)’가 서쪽 기슭으로 잇고, 신앙이 집중되고 있다. 금족지로 발을 들일 수 없게 된 산허리며 산정상에는 바위터 등 고대 이래의 제사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참배하기 위한 입산은 현재도 가능하나 산 자체의 표고가 467m 정도이기 때문에 오궁(奥宮) 까지 참배하고 돌아오더라도 고작 몇 시간이면 된다. 

야마토 삼산이라 부르는 ‘카구야마’, ‘우네비야마’, ‘미미나시야마’도 역시 신의 산으로서 가장 높다는 우네비야마도 200m 미만이며 다른 두 산은 150m 정도 밖에 안된다. 이처럼 표고가 낮은 산이기 때문에 역으로 인근 사랍들에게 있어서는 일상생활로 낯익은 친근한 산이기 때문에 외포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고 그 때문에 신들도 이 곳에 오기를 바랐다고도 생각이 든다.

이와 반대로 백산이며 대산(大山, 다이센. 표고 1729m. 톳토리현 서부), 입산(立山, 다테야마. 표고 3015m. 도야마현 동부)라고 하는 수천 미터급의 고산은 이 산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쉽사리 근접하기 어운 실로 외포의 념을 품고 산을 대해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산 그 자체를 신으로서 인식하면서 혹은 귀신이라는 두려운 생물이 살고 있는 장소=즉 이경의 터전이라고 이야기했다. 당연히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존재라고도 생각했다. 고산에 물줄기를 가진 하천은 생활의 양식을 키우는데 불가결한 존재였으며 동시에 때로는 범람하여 인명을 앗아가는 두려운 악마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현상이 신의 의지로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또한 산에서의 조난도 신이 사는 금족지를 침범하므로써 신의 노여움을 산 때문이라던가 산에 사는 귀신과 마주쳤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신의산’이라는 의식이은 처음에 낮은 산을 대상으로 하는데서 이윽고 고산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런 의의에 대해 살피자자면 시람들의 공동체가 발전하여 광대한 지역을 하나의 정치 세력이 통치하게 되면 종래 수백 미터급의 낮은 산이 아니고 이번에는 그 고장의 어느 곳에서나 우러러 바라볼 수 있는 고산이 신의 산이라는 의식을 심어주어 신앙을 유대로 삼아 그 지역을 거느리게 되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똑같은 산이라고 하더라도 앞에서 지적했드시 낮은 산과 고산은 본래부터 각기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의 변화를 상정해서 거기다 정치적 해석을 갖다붙이는 것이 과연 옳을 것인가.

고시(越) 지역의 도래신(渡来神)에 대하여

지금 여기서 고대의 신들에 대한 신앙을 고찰하자면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지난 날 ‘고시(越)’라고 부르던 호쿠리쿠 지역(北陸, 한반도 동쪽 동해 건너 일본열도의 북서 지역 일대)에 있어서는 오히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대륙 전래의 문화와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야요이 시대의 도래는 논의 벼농사와 금속기가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것에 의하여 발생한 것 처럼 일본 고대 문화는 그 대부분이 대륙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해(동해. 역자주)에 면한 호쿠리쿠 지역은 ‘북규슈(北九州)’와 ‘산인(山陰)’과 더불어 대륙 문화가 일본해(동해)를 건너서 찾아든 정면 현관에 해당되며 당시로서는 실로 최신의 대륙 문화를 마음껏 누리게 된 지역이었다.

 대륙과의 관계를 살피게 하여주는 전승(伝承)이며 대륙 문화의 요소는 [고사기]며 [일본서기]를 비롯하여 여러 고대 문헌이며 각 신사가 제사모시는 신주(神主)의 성격을 보더라도 살펴볼 수가 있고 또한 근년의 조사로서도 출토된 유물들 중에 대륙 계통의 것들이 포함되었다고 지적되고 있다.

가장 유명한 전승의 하나는 쓰루가(敦賀. 동해에 면한 와카사만 바닷가의 도시)라는 지명의 유래가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스이닌천황 2년(垂仁. B.C. 29~A.D.70 재위)조의 분주(分註)에 보면 스진천황(崇神. B.C.97~B.C.30 재위) 시대에 머리에 뿔이 솟아있는 가야(伽倻)의 왕자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라는 인물이 나가토(長門)와 이즈모(出雲)를 거쳐서 게시이노우라(笥飯浦, 현재의 쓰루가시)에 당도하였다고 하며, 그 무렵에 “쓰루가(敦賀)라는 지명은 쓰누가(都奴賀)라고 불렀었다”고 [고사기]의 추아이천황(192~200 재위) 기사에 실려 있는 것을 본다면 ‘쓰루가(敦賀)’라는 지명은 가야에서 건너온 왕자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이 된다.

또한 흥미깊은 것은 [일본서기]의 스이닌천황 2년조 분주(分註)에 별전(別伝)으로서, 이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가 일본에 건너 온 동기가 “자기가 데리고 있던 동녀(童女)가 일본으로 도망쳐왔기 때문에 그 동녀를 뒤좇아 왔다. 그러나 일본에 와보니 그 동녀는 이미 난바(難波)와 도요쿠니(豊國) 엣찌젠군의 히메코소신사(比売許曾社)의 신주(祭神)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전승은 [고사기] 등에 실려있는 신라 ‘천일창(天日槍) 왕자’의 전승(신라로부터 일본으로 도망쳐온 아내를 뒤좇아 일본에 건너 온 왕자)과 공통적인 똑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느 것이나 간에 조선반도의 신라거나 가야로부터의 도래설을 보여준다. 또한 쓰누가아라시토의 동녀가 신주(祭神)로서 일본의 사당에서 제사모시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호쿠리쿠(北陸) 지역의 신주 모시는 제사의 성격상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하리라.

이 동녀 뿐만이 아니고 쓰누가아라시토 자체도 신주(祭神)가 되어 있다. 즉 노토국(能登国) 하사군(현 이시카와현 가시마군 나카시마쵸)에 소재하고 있는 쿠마카후쓰아라카시히코신사에서는 본래 신주였던 아라카시히코신 외에 쓰누가아라시토까지도 신주로 삼고 있는데, 모름지기 이것은 본래 이 신사의 신주라는 아라카시히코신이 도래계의 인격신(人格神)이었기 때문에 똑같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 전해지는 쓰누가아라시토를 제사모시게 되었다고 본다. 노토국에는 도래계의 신으로 여겨지는 신주를 집중적으로 많이 제사모시고 있다고 지적되며 [연희식](延喜式, 927) 신명장(神名帳)에는 엣찌젠국(越前国) 쓰루가군(敦賀郡)에도 신라(新羅)의 시로기히코신사(信露貴彦神社)며 시라기신사(白城神社)가 소재한 것이 확인된다. 이들 신사마다 신라계의 신주를 제사모셨다고 보인다.

도래계 신앙의 존재를 시사하는 것은 현대에 전하여 오는 신사의 이름뿐 만이 아니다. [속일본기(続日本紀)]의 엔랴쿠(延暦) 10년(서기791년) 9월 갑술조에 보면 이세며 오바리․오우미․미노․기이 등 각 지역과 나란히 와카사․엣찌젠 두 지역에 대해서도 “소를 죽여 한신(백제신. 역자주)에 제사모셔서는 안된다”는 금지 사항이 보인다. 소와 말을 잡는 것은 대륙식의 신을 모시는 제사 관습으로서 이미 고쿄쿠(皇極. 여왕) 원년(서기642) 단계에 일본에전하여 지방 고을에서도 그런 제시가 행하여진 것을 살피게 한다. 이와 같은 관습이 나가오카경(長岡京. 785~794) 시대에 지금의 호쿠이현의 와카사와 엣찌젠 두 지방에서 인정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실상 도래계의 신앙이 이 고장에 전파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주는 사실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당시 소를 죽여 한신에게 바치는 제사가 금지된 지역들은 어느 쪽이고 간에 신불습합(神仏習合. 천신과 부처를 함께 제사 지내는 일. 단 불교는 생물의 살생을 금한다. 역자주)의 증조를 보이고 있는 점이 극히 흥미로운 사실로서 보인다.

위와 같이 호쿠리쿠 지역에 광범하게 보이는 대륙계 신앙의 흔적에서 살필 때에 백산(白山) 신앙에도 대룩계의 요소를 살피게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다이센 고분(닌토쿠릉 고분)이며 동 하비키노시 호무다 고분(오진릉 고분)이라는 길이 4백미터 이상의 긴 기럭지를 보여주는 대규모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지던 무렵  조선반도에서는 마한․진한이라는 지역으로부터 각기 백제며 신라라는 새로운 국가가 성립했다. 오늘날 전해지는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백제 칠지도의 명문이며 [진서(晋書)]와 [송서(宋書)] 등 중국의 사료에는 당시 ‘왜(倭)’로 부르던 일본 조정과 조선반도 국가와의 관계를 살피게 해주는 기사가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공식 루트를 통하여 국가간의 교섭이 행하여지고 때로는 항쟁도 발생했다고 전해지며 사료의 기재가 없더라도 사적인 교섭도 많이 행하여졌다고 추측된다. 특히 통일국가로서의 백제며 신라가 성립된 4세기 단계에서는 그런 과정에서 혹은 정치적 망명자로서 일본열도로 건너 온 사람들(도래인)의 집단도 많이 존재했다.

개중에는 [일본서기] 등에 도래한 전승을 남기는 인물도 있고, 그 대표적인 예로서 궁월군(弓月君)이 있다. 궁월군의 후손으로 일컬어지는 저명한 가문은 하타씨(秦氏)로서 7세기 초두에는 쇼토쿠태자(聖徳太子)와 친교했던 하타노 카와카쓰(秦河勝)를 비롯하여 율령시대(701년 이후)에도 다수의 하타씨 가문 사람들이 중앙에서 활약했다. 그 중심은 야마시로쿠니(山背国葛野郡, 현재의 교토시)에 거점을 가진 하타씨 일족으로서 칸무천황(桓武天皇)에 의한 헤이안 천도(平安遷都)의 배경에도 이 하타씨의 존재가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이 하타씨는 기내를 중심으로 폭넓은 범위에 분포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실은 엣찌젠(越前)에도 하타씨 가문의 인물이 율령시대(서기701년 이후)에 있었고 그는 신라계의 도래인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조선반도 특히 신라로부터 문화가 들어온 지역이라고 본다.

한편 노토반도 지역은 8세기에 지역 경계를 분할하기 이전까지는 엣찌젠의 일부에 속했던 고장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는 조선반도 3개 왕국들 중에서 이른 단계에 국가체재를 갖춘 고구려 문화를 살피게 하는 요소가 많이 존재하고 있다. [연희식] 신명장에는 노토국(能登国) 스슈군에 코마시히코신사(古麻志比古神社)가 있었다는 기사가 있으며 바로 이 ‘코마(古麻)’는 ‘코마(高麗)’인데, 이것은 ‘고구려(高句麗)’라고 본다. 그렇다면 제사드린 신주는 고구려계의 신이다.

조선반도 북부 동해안에서 배를 띄우면 일본해를 횡단하여 일본열도를 향했을 때, 해류와 편서풍 관계로 노토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호쿠리쿠 지역에 도달할 가능겅이 컸다. 고구려가 당․신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된 이후, 7세기말에 그들 유민들의 ‘발해(渤海)’라는 국가가 세워졌다. 이 발해 국가는 조선반도 북부로부터 중국 동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거느렸으며 인국인 당과 신라와의 관계상 발해는 일찍부터 일본과의 친교를 소망하였으므로 일본에 국사(国使)가 건너왔다. 최초의 국사는 진키(神亀)4년(서기727)에 일본에 건너왔고, 그 후 발해가 그란(契丹)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34회나 국사를 보냈다.

국가 사신을 태운 발해선이 건너 온 곳은 노토반도를 중심으로하는 호쿠리쿠 지역으로서, 그 때문에 노토지역에는 ‘노토객원(能登客院, 현재의 이시카와현 후쿠우라 해변인가)’․‘마쓰바라객원(松原客院, 현재의 쓰루가시)’이라는 접객 시설을 율령정부에서 건설하였다. 이들 발해 사신은 중국 동북부의 모피를 위주로 하는 특산품을 많이 가져왔으며 동시에 한시(漢詩)를 비롯한 성당기(盛唐期)의 문화도 잘 전하여 주었다. 이와 같이 발해 사신의 내착지가 호쿠리쿠 지역이었다는 점에서도 그것을 직접 밝힐만한 사료는 없다고 하더라도 고구려 사신들이 이 고장으로 거너왔다고 간주하여도 전혀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민간 차원에서 고구려 시람들이 많이 건너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조선반도 북부(현 중국 길림성의 남단부)에는 백두산이라고 하는 오늘에도 많은 조선․한국인들의 큰 숭경을 받고있는 성스러운 산이 있거니와 일본의 백산에 대한 신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도 역시 조선반도로부터 건너 온 사람들이 전하여 준 신앙이 크게 여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백산과 단군(檀君)과 타이쵸(泰澄)

일본에는 대륙이며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옛날부터 산에 대한 신앙이 존재하여 왔다. 논의 벼농사에는 불가결한 물을 흘러내려주는 산들은 실로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러기에 고대인들은 산마다 신이 내려와서 자리잡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날마다 산을 숭경하여 그 은혜에 감사하는 동시에 때로는 그 모습을 바꾸어 사람들에게 재난도 가져다주는 산에 대하여 두려움도 가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드디어 신이 내려와 계신 장소라는 관념에서 산 그 자체가 신이라고 하는 관념도 생기게 되었다. 산 그 자체에 대한 신이라는 이미지를 품고 또한 두려움에서 받들어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산이라고 하더라도 마을 인근의 수백 미터짜리 산으로부터 수천 미터나 되는 산까지 다양하다. 애당초 인근의 비교적으로 낮은 산들에 친밀감을 가지면서 거기에서 신의 존재를 생가하여 왔다고 본다. 그러나 이윽고 그런 의식은 차츰 배후에 드높이 솟아있는 고산 쪽으로 옮아가고 동시에 그 곳에는 함부로 올라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금족지(禁足地)를 설정하개 되었다. 더구나 이런 고산은 계절에 따라서 날로 그 모습을 바꾸게 된다. 네 계절이 뚜렷한 지역에서는 봄에 신록의 숨결이 넘치고 여름에는 검푸르게 솟구치는 큰 모습이되고 가을에는 단풍이 물드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고 겨울에는 내리는 눈속에 순백의 산경치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와 같이 모습이 변하는 고산이야말로 실로 신 그 자체라고 받아드려졌던 것이다. 

신앙의 대상이 된 낮은 산은 각지에 허다하게 살필 수 있으나 수천 미터급 고산은 그 수가 많지는 않다. 그 중에서 오늘날 문헌으로 확인되는 예전부터 받들게 된 대표적인 고산은 일본해(동해) 쪽의 호쿠리쿠에 위치하는 백산(白山, 하쿠산)이라는 산을 들 수 있다. 백산은 현제 후쿠이현과 이시카와현및 기후현의 경계 지역에 송아있는 고산이다. 고대에는 이 자역을 엣찌젠․미노․카가라는 옛날 지명의 경계에 속했다. 물론 그렇다 하여 고고한 외떨어진 산이 아니며 몇 가닥의 산줄기를 총칭하는 호칭이었다. 산의 중심인 고젠봉우리는 2702미터이고 그 옆의 베쓰산이 2399미터, 역시 다이뇨봉우리가 2684미터로서 엣찌젠이며 미노․가가 각지로부터 바라다 볼 수 있다.

이 백산을 예전부터 신의 산으로서 우러러 왔으나 머지 않아 한반도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일본열도 각지의 사회로 퍼져나가는데 따라서 불교 승려들의 수행 장소로서 중시하게 되었다. 유물들이 확인되는 데 따라서 9세기의 헤이안시대(794~1185)에는 이 산속에 들어가서 수행했던 승려가 있다고 보인다. 이 백산의 내력을 기록한 사료에 의하면 이 산을 불교 수행장으로 개산한 것은 7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활약했던 엣찌젠의 승려 타이쵸라고 한다.

서기 957년에 기록된 증서가 있는 [타이쵸화상전기]에는 다음처럼 실려 있다.

“엣찌젠의 아소쓰 나루라는 곳에서 태어난 타이쵸는 어려서 특출한 행동을 하였고 당시 고승(입당 유학승인 도쇼)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14세 때 꿈에 나타난 11면관음의 가르침으로 엣찌미네라는 600미터의 얕은 봉우리로 입산 수행하게 되었다. 드디어 타이쵸는 백산신의 계시를 받고 백산으로 입산하여 그 정상(선정)에서 백산신의 본체인 11면관음과 성관음과 아미타여래를 감득하였다. 타이쵸의 명성은 중앙의 조정에까지 알려져 천황이 병들거나 전염병이 돌 때는 초청받아 큰 공적을 쌓아 선사(禅師)의 지위까지 받았다. 그동안 ‘겐핀(玄賓, 법상종 고승. 역자주)’이며 ‘교키(行基, 왕인의 후손. 역자주)’ 라는 고승들과도 교류한 타이쵸는 만년에는 다시금 엣찌미네 봉우리로 돌아가 그 곳에서 입적했다”

틀림없이 이 전기는 타이쵸가 생존했다고 하는 시대로부터 200년 정도 지나서 기록되었으며 그 내용에는 거의 사실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황당무게한 조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하지 않으며, [일본서기]며 [속일본기]라고 하는 조정의 명령으로 편찬된 국사에 조차 전하지 않는 중요한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를테면 나라시대 승려였던 타이쵸는 산림수행을 지향하여 당초에는 낮은 엣찌 봉우리에서 이윽고 고산인 백산에 들어갔다고 하였으나 ‘나라(奈良)시대(710~784)’의 승려는 조정의 엄격한 관리를 받아 평소에는 사찰에서만 불경 연구에 전념하여 왔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이미 나라시대 당시에 ‘밀교(密教)’가 행해졌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밀교로서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 산림수행(山林修行)이 나라시대 승려들에게서 일상적으로 행하여졌다는 사실이 인정되고 있다.

그 수행도 당초의 낮은 산에서부터 차츰 전인미답의 높은 산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이 충분히 고려되며 그 때문에 타이쵸의 거취야말로 그런 사실을 상징한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백산이 있는 호쿠리쿠 지역 각지에서도 불교 수행장으로 간주되는 유적이 최근에 와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백산(白山)과 백두산(白頭山)은 그 지형이 서로 잘 닮고 있다. 타이쵸의 속칭은 ‘삼신(三神)’이라고 하는 묘한 성씨를 가지고 있는데 그 삼신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삼신(風伯・雨師・雲師)을 참작한 가능성이 있다.

일본해(동해)에 면하고 있는 호쿠리쿠 지역은 일본 고대에 있어서 거리상으로도 한반도와 가까운 지역으로서 한반도 각지로부터 배를 타고나온 사람들이 순조롭다면 편서풍과 해류를 타고 가장 도착하기 쉬운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그것을 말하여주듯이 현재에도 또한 한반도와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전승등이 오늘에 전해지고 있는 지명과 시설 명칭, 거기에다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가 존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엣찌잰 지역 남부에 위치하는 쓰루가(敦賀)라는 도시는 고대에 있어서 물류의 중심지며 물자의 집산지였고 야마토에 있던 조정(왕도)과 극히 중요한 지이었다. 그런데 이쓰루가라는 땅의 이름은 가야에서 건너온 왕자 쓰누가아라시토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인용이 되고 있을 정도이다.

실은 쓰루가라고 하는 도시에 있는 사당인 게히신사(気比神社)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일본왕실에 규정한 사당으로서의 품격이 높은 신사이며, 이 사당의 경내에는 불교를 받드는 신궁사(神宮寺)도 함께 세웠다. 즉 일본 재래의 신도 신앙과 한반도로부터의 새로히 전하여 온 불교 신앙도 함께 모시게된 것을 밝히는 발자취를 가진 신사라는 것이 인정되어 왔다.

또한 이 도시가 소재하는 쓰루가군에는 신라의 시로기히코신사(信露貴彦神社)며 시라기신사(白城神社)라고 하는 분명히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신사가 있는 외에도 호쿠리쿠 각 고장에는 똑같은 한반도계의 명칭을 가진 신사들이 오늘날에도 수많이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타이쵸 승려에게 찾아와서 그 제자가 되어 그를 돌보아주었다고 전하는 신자라는 사람이 노토만(能登湾)에 있는 노토섬(能登島)에서 왔다고 하지만, 노토섬에는 고구려식의 묘제(墓制)에 의한 스조에미시아나고분(須曽蝦夷穴古墳)이라는 고분이 발견되었다. 분명히 호쿠리쿠 지방 각지에는 한반도계 문화의 영향을 짙게 살필 수 있다. 일본열도 중에서도 가장 현저하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사료로서 구체적인 기록울 살필 수 없으나 이와 같은 사실은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로부터 일본해(동해)를 건너와 이 지역에 상륙하여 그곳에 정착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일본열도에서 불교신앙이 왕성하여진 것도 민간 수준에서는 모름지기 중앙보다 일찍이 이루어진 것으로서 앞에서 예시했듯이 게히신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독자적인 종교문화의 흔적을 남겼다고 본다. 다시 말하여 호쿠리쿠 지역에서의 독자적인 한반도계의 종교문화의 전개가 이윽고 중앙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서는 일본열도 전역에 신도신앙과 불교신앙을 융합시킨 독자적인 종교문화를 일으키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서 간주한다면 당연히 앞에 예시한 백산에 대한 신앙에 있어서도 한반도문화의 영향이 크게 미쳤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백산신(白山神) 즉 백산신앙(白山信仰)의 중핵을 이루는 신앙 대상의 신은→여신(女神)이며, 「쿠쿠리히매(ククリヒメ)→コウクリヒメ(고쿠리히매, 高句麗媛, 고구려여신)」으로 유래할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이 신앙이 실은 한반도의 산악신앙에 유래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모름지기 백산(ハクサン, 하쿠산)이라는 산의 명칭에서도 중국․북한 국경지대에 솟아있는 한민족 발상지라고 전해오며 옛날부터 신앙의 대상이었던 영산(霊山)․장백산(長白山․白頭山)을 방불케하고 있다. 그리고 장백산도 일본의 백산과 마찬가지로 복수의 봉우리로서 구성되어 있는 연산(連山)이며 그 높이도 백두봉(白頭峰) 2749미터, 백운봉(白雲峰) 2692미터, 천문봉(天文峰) 2670미터여서 백산의 여러 봉우리와 유사하다.

또한 백두산은 그 중앙부에 천지(天池)라고 하는 화산호가 있다는 것도 백산의 선정에 화산호인 료쿠하쿠치(緑碧池)가 있는 것도 공통적이다. 이와 같은 지형적인 공통의 특징을 살피자면 이 백산에 대한 신앙이 실은 한반도로부터 이 지역으로 건너와서 정주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들의 고향의 신앙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 것인가 한다.

한반도에 뿌리를 가진 태백산(장백산)은 그 정상의 신단수(神壇樹)에 신인 환인(桓仁)의 아들 환웅(桓雄)이 하늘에서 내려와 웅녀의 태안에서 자라난 아들이 천신의 제사권자(祭祀権者)인 동시에 마침내 고조선왕조를 세운 단군(檀君)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 신화의 유사성으로부터 일본 역사책 [고사기]며 [일본서기]의 천송강림 신화에 대한 영향을 주장하는 학설도 있거니와 실로 백산은 앞에 예시했듯이 지형적인 특징으로 보더라도 다시금 그런 가능성에 관하여 고찰할 필요성을 보이고 있으며 금후 이에 대하여 다각적인 분석을 해나가므로써 한일고대사의 새로운 해석과 평가도 가능하여지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연구자가 결코 오늘이라는 시점의 국가관(国家観)에 얽매어 영향받지 말고 함께 진리를 추구하는 동학(同学)의 연구자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기탄없는 의견의 교환을 행하는 것이 아시아고대사(アジア古代史)의 발전에 이어진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