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샤크 잠스란 케레이드 몽골국립대학 국제교류학 학장(왼쪽)은 9일 국학원 주최로 열린 한․몽․일 국제학술대회에 참석, ‘몽골인과 유라시아 민족 간의 역사적 연대성’을 주제로 발표했다.

국학원은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9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동북아 고대사의 공통분모 발굴을 통한 국제네트워크 구축’이라는 주제로 한․몽․일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번 대회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시민협력사업으로 선정되었으며,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을 받았다.

이날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바이샤크 잠스란 케레이드 몽골국립대학 국제교류학 학장은 ‘몽골인과 유라시아 민족 간의 역사적 연대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바이샤크 학장은 몽골이라는 부족 명은 몽골에 있는 문군 울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울은 은산(銀山)을 말한다.

이어 게세르 신화에 대해 소개했다. 내용은 하늘신 히르마스가 둘째 아들인 게세르를 지상으로 내려 보낸다고 한다. 게세르는 지상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한 뒤 인본주의와 조화를 이룬다. 결혼해서 아들을 낳은 게세르는 악한 무리와 전투를 벌인 뒤 지상의 악을 멸하고 제국을 건설한다.

이에 대해 바이샤크 학장은 단군신화와 게세르 신화에 대한 공통점으로 첫째, 게세르와 단군 모두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도우려고 했다. 둘째,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아들들이었다. 셋째, 지상으로 내려 온 주 목적은 인간세계에 평화와 조화를 주기 위해 왔다. 넷째 이들은 모두 지상의 인간의 여인과 결혼을 하여 자손을 번창시켰다고 밝혔다.

양 신화의 차이점은 몽골에서는 게세르 신화를 신화로 간주하고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이다.

[전문]

몽골인과 유라시아민족간의 역사적 연대성
           

소개

몽골과 몽골인은 풍부한 역사를 지녀왔을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막대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고대 몽골인들이 언제, 어떻게 어느 지역에 정착했으며 어떻게 유라시아의 다른 스키타이, 아바르, 사르마트, 킵착, 카자르, 투르크 등의 민족들과 수천 년간 교류와 갈등을 반복하면서 오늘날의 몽골인을 형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오늘날까지도 세계사에서는 명확하게 규명되어 있지 않다.

현재 몽골초원의 역사에는 많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는데 그 질문들은 몽골초원이  고대에는 키르키즈, 위구르 그리고 터키인들의 발생지였는가? 현재의 몽골초원은 고대 투르크인과 몽골인 사이에 분쟁을 하던 지역이었는가? 누가 이 스텝의 진정한 주인이었으며, 고대 몽골인은 어떠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을까? 왜 오늘날의 투르크인들의 얼굴은 서로 다르게 되었는가? 이러한 외모의 변화는 역사적 발전과 상호교류의 산물인가? 어떻게 몽골인들은 역사적 혼란과 분쟁 속에서 살아남았는가? 몽골인이 다른 민족보다 유전적으로 강해서 생존했던 것일까? 누가 초원지대의 지배자였는가? 오늘날 우리가 이 수많은 질문에 대해서 바른 답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나는 이 많은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할 것이며 이렇게 한국에 다시 와서 몇몇의 외국인 학자들과 함께 매우 중요한 의제를 다루기 위해 참석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이번 학회가 나의 모국 몽골에 대한 역사적 재고와 세계문명사에 대해서 장래에 연구할 수 있는 계기를 주게 된 것에 대해서 영광으로 생각한다. 

고대 몽골역사에 대한 현대기록

현재 몽골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유목을 주요 생산수단으로 삼던 많은 유목 민족들이 활발하게 상호 교류하던 교차지점이었으며, 이 메마른 초원의 기후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민족들에게 이 지역에 걸 맞는 생존문화를 만들게 했고 이 과정에서 수렵과 목축만이 이 지역의 풍토에 가장 어울리는 경제수단이 되었다.

중세시대에 몽골 초원에서는 많은 민족들이 탄생하고 소멸했었다. 흉노는 몽골초원에서 최초로 거대한 제국을 세우고 유럽의 일부를 정복했던 첫 번째 부족이었다. 초원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던 아틸라는 당시 유럽인들에게 큰 우환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영국을 건설하게 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훈족의 일부는 오늘날의 러시아 지역에도 들어가 정착했는데, 이들은 스키타이, 아바르, 사르마트, 킵착, 카자르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러시아의 남부지역에 부족국가를 건설했다. 후에 이 부족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거나 몽골제국과 같은 강력한 다른 초원국가에 의해 통합되었다.

우리는 흉노제국이 유목민족국가였으며 몽골계인종이 건국한 나라였음을 알 고 있다. 유전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몽골인의 기원이 흉노였음에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흉노제국은 고대 몽골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흉노제국이 존재하던 시기 유럽과 아시아는 흉노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으며 실크로드를 통해 양 대륙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흉노제국이 붕괴되었을 때, 전 세계적으로 첫 번째 민족의 대이동이 발생했다. 유럽지역으로 이동한 일부 흉노족들은 우랄 산맥을 지나 중앙 유럽에 이르러 헝가리인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또 다른 일부는 러시아의 남부로 이동해 정착했는데 스키타이, 사르마트, 아바르, 킵착, 카자르 등 다른 부족 명을 지니게 되었다.  중세시대에 유럽을 뒤흔들었던 흉노족들은 유럽으로 이동해 몽골계 유목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토착민들과 융합하는 과정을 거쳐 서서히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중세 북방유목민족들 중에서 오늘날까지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살고 있는 수백만 명의 카자르인들만이 오직 유목민이면서 정착생활을 한 민족이었으며 킵착족은 몽골의 지배하에 있었다. 몽골제국의 통치기간 동안 킵착인과 카자르인들은 몽골인들에게 말을 가축화시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아이란이나 쿠므즈 같은 발효음료 제조법을 알려줬다.
     
흉노제국 다음으로 건국된 중국에서 선비라고 알려진 선비 한국은 前 제국으로부터 가장 훌륭한 문화를 전수받았으며 흉노제국처럼 다른 유라시아 대륙의 국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으며 이들을 지배했다. 선비 한국 다음에는 니룬 한국으로 중국에서는 주잔이라고 불리던 제국이 몽골 땅에 건국되었다. 페르시아의 역사학자 라쉬드 앗 딘의 기록에 의하면 주잔은 다르리긴 (Darligin)이라고 불렸었다. 몽골 학자 G. 수바타르는 오랜 연구를 통해 주잔이 다르리긴이라는 사실을 증명해냈으며 니룬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주잔 한국의 붕괴 이후, 몽골 초원에서는 몇 백 년 동안 몽골계 국가는 건설되지 않고 위구르, 터키, 키르키즈 등의 투르크계 국가가 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투르크계 민족이 몽골초원에서 활약하게 되면서 몽골인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부터 수세기 동안 투르크계 언어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위구르로부터 이란의 소그드-아라메이 문자를 차용하여 사용했다. 이로 인해 몽골어로는 해석할 수 없는 많은 투르크계 지명이 몽골초원에는 남게 되었다. 몽골계 국가이든 투르크계 국가이든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이들이 수렵과 유목을 생활기반으로 했던 유목민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동일한 복식, 거주지, 교통수단,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고고학자들은 당시의 유물들을 발견했는데 이 유물들은 고대에 존재했던 한국들의 문화가 훈제국이 지배했던 당시의 것들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출토된 많은 금화와 도자기 제품들은 로마제국, 비잔틴 제국에서 사용되었던 것들이며 그 외에 고대 이집트의 유물, 당나라 때의 유물, 용을 묘사한 작품들이 다수 발굴되었다. 당시 몽골인들은 외부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국제교류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며 외국으로부터 많은 문물을 받아들여 몽골의 발전에 사용했다.

문화교류의 중심지로서의 몽골제국

몽골인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신당서와 구당서이며 ‘멍우, 멍와’ 등으로 불렸으며 13세기의 기록에서부터는 ‘멍구시’라는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본 필자는 중국인들이 몽골인들을 어떻게 불렀는지를 조사했는데 그 조사 결과에 의하면 몽골이라는 민족 명은 약 8세기에서 9세기에 나타난 것으로 보이며 10세기에는 카막 몽골 한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몽골이라는 부족 명에 대한 설명은 전 세계의 학자들이 각각의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 필자의 의견은 몽골이라는 부족 명의 탄생은 몽골에 있는 문군 울 (은산, 銀山)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몽골이 강성했을 당시 다른 유라시아의 민족들은 몽골에 병합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카막 몽골 한국이 건국되기 이전, 대부분의 몽골초원은 거란 (요)의 지배를 받았었다. 거란인들은 대문자와 소문자의 두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내몽골자치주의 학자 칭겔테이는 소문자로 기록된 비석을 찾았는데 그곳에는 ‘가하이 (돼지)’, ‘타히아 (닭)’, ‘노호이 (개)’등과 같은 몽골계 단어들이 일부 발견되었다. 몽골제국의 예루이 추카이 통치시기의 내각 중 9명은 거란출신 사람으로 거란인들은 몽골인들에게 13세기에 북중국에서 사용되던 조세징수제도를 가르쳤다.  

거란계 후손들 중에는 성을 ‘시아오’라고 쓰던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중원, 대만에 살고 있으며 태어날 때 몽골반점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러한 특징은 몽골, 한국, 일본, 헝가리, 그리고 북중국인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몽골반점은 이들의 기원이 몽골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유전적인 증거이다. 거란인들이 몽골초원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때, 거란인들은 말의 머리모양으로 장식한 악기를 들여왔는데 그 소리가 매우 구성져서 듣는 이로 하여금 눈물짓게 하였다. 이 악기는 현재 UNESCO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몽골 전통악기가 되었다. 거란인들의 영향을 받아 몽골의 음악은 감성적인 선율과 멜로디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몽골인들은 이 악기를 가축을 위해서도 이용하고 있는데 만약 어미 낙타가 새끼 낙타를 싫어해서 돌보지 않거나 외면하면 이 악기로 연주를 해서 새끼를 받아들이게 만들기도 한다. 중세 몽골의 역사를 알려주는 역사적 사료는 1240년 무명의 작가에 의해 기록된 ‘몽골비사’이다. 현재 몽골어로 기록되었던 원본은 사라지고 중국어로 기록된 서적만이 남아있다. 현재 전 세계의 학자들은 몽골어로 기록된 몽골비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몽골의 기원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중국어로 기록된 몽골비사는 19세기 중국에서 러시아의 선교사 카파로프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서로 다른 3종류의 책이 발견되었다. 이 문헌들은 징기스칸 이전의 몽골인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으며 징기스칸의 윗 25대조까지 잘 기록해 놓았다. 학자들은 이 기록이 몽골인의 기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역사적 자료이자 종교,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자료라고 인식하고 있다.  몽골비사는 몽골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백과사전임과 동시에 세계문명의 유산이다. 이 책은 현재 전 세계에 번역되어서 출판되고 있다.

몽골비사 외에 몽골인들은 장가르와 게세르신화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상기의 두 신화 역시 전 세계적으로 많은 학자들에 의해 문학의 보고로서 인정받고 연구되고 있다. 잔가르 신화는 서 몽골 지역에서 인기가 있었던 신화로 만담가에 의해서 7일 밤낮으로 얘기해야 전 이 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 신화는 몽골전통문자와 토드 몽골문자로 기록되었으며 몽골의 서부지역을 포함한 내몽골 자치주의 서쪽과 러시아령이 된 몽골지역의 주민들은 장가르신화를 자신들의 정신적 기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장위구르 자치주와 내 몽골자치주 서쪽지방에는 장가르를 추모하는 사당들이 존재하며 많은 참배객들이 오늘날에도 있다.

게세르 신화는 수세기간 구전문학으로 인기를 끌다가 문자로 기록되었다. 이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이 신화는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닌 샤머니즘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는 참된 길, 깨달음의 길로 가는 방법에 대한 많은 묘사가 있다. 잔가르, 게세르신화는 모두 몽골 문명의 초석을 이해 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게세르 신화는 몽골의 서부, 중부, 북부지방에서 유행했던 신화로 카자흐와 티베트인에게도 퍼져있다. 이 신화는 1716년 고대몽골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는 구전으로 전승되었으며 1987년에는 러시아 키릴 알파벳으로 출판되었다. 게세르 신화는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장은 아래와 같다.

- 제1장: 게세르의 출생신화와 성장과정에 대한 이야기
- 제2장: 게세르와 거대한 레오타드 (Leopard)와의 싸움
- 제3장: 중국의 곤마 한 진압
- 제4장: 북방에 살았던 12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의 퇴치
- 제5장: 쉬라 골 (황하로 추정)의 전투
- 제6장: 영웅 30인의 환생
- 제7장: 난두람 한 (Nandulam khan) 권력의 쇠퇴
- 제8장: 괴물의 퇴치
- 제9장: 게세르 한의 악의 세력 퇴치와 인류의 평화시대 회복

게세르 신화는 실재로 존재했던 사실을 서사시의 형식을 빌어서 표현한 것이다. 서사시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고대에 지구 또는 저지대에서 발생했던 인류의 어려웠던 시기를 구제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온 게세르가 인류를 구하기 위해 내려온 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게세르는 지상에 내려와 티베트에 있었던 린 제국의 지배자가 되어 세 명의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을 해서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리고 백성들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게세르 신화는 한국의 단군신화와도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는데, 환인의 아들 환웅은 자상에 자신의 나라를 건설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아버지는 환웅에게 3,000명의 무리들을 주면서 지상으로 내려가 국가를 건설하고 백성들을 평화롭게 통치할 것을 명한다. 전설에 의하면 태백산은 만주와 북한의 경계에 있는 산 (백두산)에서 신의 도시인 신시를 건설하고 풍백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환웅은 법을 제정하고 도덕률을 만들었으며 인간에게 다양한 예술과 의술, 농업기술을 가르쳤다. 당시 지상에는 곰과 호랑이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인간이 되길 희망해서 환웅을 찾아가서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환웅은 그들에게 20개의 마늘과 쑥을 주면서 이것들을 먹으며 바깥에 나와 햇볕을 보지 말고 동굴 속에서 100일간 있으면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동물은 환웅의 말대로 동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고 살았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곰은 계속 동굴에 머물러 21일째가 되자 인간 여인의 몸을 얻게 되었다. 웅녀는 인간으로 변하고 난 후 신단수에 아이를 갖기를 원해서 기도를 했는데 이 소리를 들은 환웅은 웅녀를 아내로 맞아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아이를 단군이라고 불렀으며 의미는 “황금 아이 (Altar Prince)” 이다. 단군은 현명하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지도자로서 기원 전 2,333년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하고 조선을 건국했다. 개국 후 1,908년이 지난 해에 단군은 태백산으로 돌아가서 산신이 되었다.

상기의 단군신화와 게세르 신화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첫째, 게세르와 단군 모두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도우려고 했다. 둘째, 그들은 모두 하느님 (텡그리)의 아들들이었다. 셋째, 지상으로 내려 온 주 목적은 인간세계에 평화와 조화를 주기 위해 왔다. 넷째, 이들은 모두 지상의 인간의 여인과 결혼을 하여 자손을 번창시켰다.

양 신화의 차이점은 몽골에서는 게세르 신화를 신화로 간주하고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이다. 단군신화는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왕조가 어떻게 건설되었는가를 묘사했으나 게세르 신화에는 게세르의 행적에 대한 연도의 기록이 존재하질 않는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게세르 신화가 기원전 300년 ~ 100년 사이에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구전문학으로서 수천 년간 몽골에서 유래되다가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에 있는 문헌에서는 고려 또는 고구려와 몽골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나 몽골과 한국에서 발견된 고고학 유물을 보면 동 몽골과 한국간의 유물적 공통점이 중앙 몽골과 동 몽골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의 유사성보다도 더 가까움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초 양국의 역사학자들은 한국과 몽골의 수교 800년을 기념하는 축하행사도 이루어졌다. 행사기간 동안 역사학자들은 최초의 한국사절단이 몽골에 온 것은 몽골족의 기원이 된 거란족이 건설했던 요나라 당시였다고 말했다.

상기의 몽골비사, 잔가르, 게세르 신화등 몽골 측의 기록 외에도 어떻게 몽골이 전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었나에 대한 기록은 중국, 페르시아, 아라비아, 아르메니아 외에 유럽국가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기록자들은 몽골을 방문했었다. 나는 역사학자로서 13세기 몽골제국의 역사와 관련된 중국문헌들을 33년간 연구해왔다. 그 간의 모든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i) 몽골제국에 대해 기록된 많은 외국문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몽골비사”와 같이 몽골인이 직접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 자료가 사료적으로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ii) 중국문헌 예를 들어 «Heida shilue»와 «Mengda beilu»는 몽골비사 다음으로 몽골에 대한 역사를 기록한 사료적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양 문헌들은 당시 몽골의 오고타이 한과 무후라이 수상의 통치시기에 몽골의 수도에서 관찰자의 입장에서 각종 내-외부정책들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한 부분들을 기록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2.pp.105-115)

iii) 당시의 몽골제국은 단순한 제국이 아닌 초강대국으로 전 세계의 지도자들이 팍스 몽골리카 (PAX MONGOSICA)라고 부를 정도로 강력했다. (2,pp.61-64)

iv) 몽골은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배경들은 몽골이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몽골인들이 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몽골인들의 주요 경제수단이었던 유목생활이 농업생활보다 더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방민족의 유목생활은 어릴 때부터 자연 속에서 말을 타고 사냥과 유목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해서 평생을 농사를 지어야 했던 농경민족에 비해 군사적으로 우수한 무사들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고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에 농경민족의 군대가 내륙 깊숙이 긴 보급로를 보호하면서 유목민족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 전쟁을 할 수 없었지만, 기마민족들은 자유자재로 공격을 할 수 있어 훨씬 더 유리했다.

13세기의 몽골은 세계경제발전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양 문화가 서로 만나 교차하는 문화허브였다.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최고의 건축가들과 문인들은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럼에 초대되어 수도건설에 참여했었다. 당시의 화려했던 도시의 흔적은 1940년대 후반서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카라포럼의 유적지에서 많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고고학 유적들의 발견을 통해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전술했다시피 몽골인들은 유목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전 세계의 문화는 크게 농경문화화 유목문화로 나뉘어져 발전해 왔다.  농경문화는 중앙집권화된 권력을 가진 문명으로 성장해서 상대적으로 덜 중앙집권화된 권력을 가졌던 유목민족문화보다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농경문화지역의 지도자들은 한 지역에 정주하면서 농경지로부터 거둬들인 수확물을 소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경제를 꾸려 나갔기 때문에 보다 더 많은 영토를 얻으면 보다 더 많은 생산물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농경문화의 지도자들이나 일반 국민들은 물질적인 풍요에 관심을 더 가져 정신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농경문화에서는 유목문화와 달리 물질주의적 문화가 더 발달되었다 (2, pp. 115-125).

그러나 초원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가축들에게 풀을 뜯기던 유목민족들은 각각의 부족들이 한 곳에서 풀을 뜯을 경우,  양들이 먹을 양식이 줄 우려가 있었으므로 제각각 흩어져 살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구조는 중앙집권적이 아닌 각각의 부족이 자치권을 가진 부족연합의 성격이 더 강했다. 특히 끝없는 초원에서 유랑생활을 해야 했던 이들은 계절에 따라 남북으로 살기 좋은 기후를 찾아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북방민족들은 항상 하늘을 보고 계절과 주기를 읽고 이동생활을 했다. 따라서 이들은 밤하늘의 별자리에 대한 이야기, 해와 달의 이야기 등에 관심이 많아 정신문화에 몰두했다.

몽골제국이 1368년 중국, 1480년 러시아, 1370~1372년 사이 페르시아에서 쇠락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몽골인들은 침체 속으로 빠져 큰 혼란에 빠져들어 급기야 17세기부터 1911년까지 몽골인들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만주족의 식민통치시절 몽골인들은 과거의 용맹했던 기상을 잃었으며 내세관을 믿는 불교계통의 라마교에 깊이 빠져 심신을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하기 보다는 경문을 읽고 기도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1600년대에 몽골제국에 도입된 라마교는 17세기 중반 리그텡 (Ligdeng) 한의 통치 시절 몽골어로 기록된 모든 책들을 불살라 버리고 산스크리스트어와 티베트어로 기록된 책만을 읽고 쓰게 되었으며 점차 종교적인 민족으로 변해가서 불교 탱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만주족의 통치시절 몽골인들은 만주어를 1911년까지 쓰고 배웠다. 만주족들은 몽골족의 문자를 1911년까지 차용해서 사용했다. 만주족의 통치기간 중 몽골인들은 한자를 공부했으며 유학을 비롯한 중국의 모든 고전들을 번역해서 공부했었다.

샤머니즘과 조상숭배

고대로부터 몽골인들은 하늘에 전능한 존재가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몽골인에게 하늘은 ‘텡게르’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사상을 “탱게리사상” 또는 “텡그리 사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몽골인들은 오직 “텡게르”만이 지구상에서 그들을 인도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인류가 상계의 존재를 알고, 어떻게 몽골인들을 조상에게로 인도하고 존경해야 하는지를 샤먼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조상으로부터의 메시지는 인간계과 신계의 중간에 위치한 샤먼에 의해서 알 수 있었다. 오직 선택된 남자와 여자만이 샤먼이 될 수 있었으며 인생의 모든 면에 대해서 조언을 주고 도움을 주는 사명을 가졌었다. 샤먼은 조상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전달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어떤 때는 꿈이나 악몽으로 오기도 한다. 정확한 꿈의 해몽은 후손들에게 어떠한 일들이 다가 올 것인 지를 알려 주는 경고가 되기도 한다. 오늘날 몽골의 샤먼들은 4가지 형태가 있는데 백색 샤먼은 일종의 치유사이며, 흑색 샤먼은 보호자, 담딘도르기그 샤먼은 “수공예가” 또는 고위 경호원, 적색 샤면은 상위의 신성한 존재를 모셨다. 모든 텡그리들은 108개의 텡그리 또는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노우온 (Noyon)”, “투쉬멜 (Tushmel)”, “바타르 (Baatar)”, 그리고 “바르라그 (Barlag)”가 있었다.

오직 남자 샤먼만이 흑색, 담딘도르기르의 샤먼 순위에 오를 수 있었고 여성 샤먼은 백색샤먼과 적색 샤먼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만약 신내림을 받은 어떤 이가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소위 ‘신병’이라고 부르는 증상이 나타나며 고통을 받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비극적인 불운을 맞기도 한다.

소비에트 시절 몰락했던 샤머니즘 또는 탱그리사상은 다시 각각의 가정에서 자신들의 백색, 적색, 흑색, 담딘도르기르를 가지고 발전하고 있으며, 몽골인들은 샤먼을 통해 그들의 조상들이 자손들에게 어떻게 바르게 살 수 있는지, 어떻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수 있는지, 그들의 조상이 어디에서 왔으며 그 일족이 어떻게 이 땅에서 번영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현재 많은 몽골인들은 텡게르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텡그리 사상은 외침으로부터 몽골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몽골의 국토를 보호하는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400~500년 된 몽골인의 민족혼이 샤먼사상을 통해서 면면히 내려오고 있으며 몽골인들에게 그들의 사상과 가르침을 지구상에 알릴 수 있도록 많은 지도를 하고 있다. 전 세계의 다른 모든 종교들 중에서 오직 샤머니즘만이 유일하게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샤먼을 통해서 조상들을 만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조상들로부터 그들의 역사와 과거, 기원을 공부할 수 있다.

결론

몽골인의 기원은 훈 (흉노)에서 왔고 같은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몽골계 인종은 몽골로부터 나왔으며 유라시아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세계역사에서 수세기 동안 지금까지 유라시아의 많은 지역과 역사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다른 민족과 영향을 받으며 융합된 문화를 만들어 갔다.

몽골은 현재까지도 북방유목민족의 전통적인 삶을 보존하고 있는 민족이며,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했으며 남방정착문명과 충돌을 해왔다. 몽골인들은 인류의 고대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라시아 대륙에 많은 국가를 건설하여 그 역사적 흔적을 남겼다. 몽골이 중세시대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에 러시아와 중국은 하나로 통합되었으며 몽골인들은 그들을 도와 국가를 건설하고 정치에 영향을 끼쳤으며, 몽골의 통치하에 그들의 자치정부를 세우는데 공헌했다.

몽골의 지정학적 위치는 동-서양의 양 문화가 교차하는 지역에 있었으며 역사적으로 항상 다른 문화가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몽골의 역사는 수 천년 동안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대했으며 종교분쟁으로 인해 싸운 일이 결코 없었으며 하늘에 있는 “텡게르 (하느님)”의 존재를 믿어왔다. 몽골은 이러한 샤머니즘의 유산이 풍부하게 남아 있는 지역으로 많은 문헌들과 기념비가 많이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