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윤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는 9일 국학원 주최로 열린 한․몽․일 국제학술대회에 참석, 신라천일창 왕자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국가신’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국학원은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9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동북아 고대사의 공통분모 발굴을 통한 국제네트워크 구축’이라는 주제로 한․몽․일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대회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시민협력사업으로 선정되었으며,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을 받았다.

이날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홍윤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는 ‘단군신도와 천일창왕자의 태양신 신앙의 일본 전래 연구’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홍 교수는 신랑왕자 천일창의 이름이 태양신을 뜻하며, 고조선부터 이어온 태양숭배사상이 일본에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쓰기다 마사키(次田眞幸) 오차노미즈(お茶の水)대학 교수는 ‘신라왕자 천일창인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 천지일모, あめのひぼこ)의 ‘모’(矛)자는 태양신(日神)의 징표로서 천일창은 태양신이라는 명칭이다. 이 신은 조선계(朝鮮系) 태양신이며 도래인들이 신앙하였던 신이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천일창의 신라국에서는 단군조선 이래 줄곧 ‘삼족오’(太陽鳥) 등 고조선 민족의 태양신 숭상이 이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일본서기>에서 천일창왕자가 일본에 건너가가서 일본 11대 스이닌천황에게 곰신의 신주를 모신 제단인 ‘곰신단(熊神籬)’을 전한 것에 주목했다.

이에 대해 일본의 고증학자 토테이칸(藤貞幹, 1732∼1797)은 “곰신단’(熊神籬)이 ‘히모로기’(比毛呂岐)라고 부르는 ‘신라어’라고 했고, 다카노 타쓰유키(高野辰之, 1876~1947) 도쿄음악학교 교수는 ‘신라 천일창왕자가 일본에 가져온 곰신단은 일본에 등장한 신사(神社)의 효시가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홍 교수는 “신라 곰신단에 의하여 일본에서는 천신(天神)을 신앙하는 신의 사당(祠堂)이 처음 등장하여 일본 선주민(先住民)들의 사회에도 신라인 지배자 천일창이 모셔온 곰신단에 의하여 비로소 신도(神道)라는 천신신앙이 새롭게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전문]

[단군신도와 천일창왕자의 태양신 신앙의 일본 전래 연구]

일본 국가사당의 태양신이 된 신라 천일창(天日槍)왕자와 신공황후

우리 민족은 고래로부터 천신(天神)이 단비와 햇빛을 잘 내려주셔야 ‘벼농사’ 풍년이 든다는 것이 단군 조선 이래의 민족 신앙이었다. 그 기쁨은 왕과 백성들의 일치된 태양신 숭모와 소도(蘇塗)의 추수 감사제로 발전되어 왔고 그것이 후손들의 천신과 조상을 위한 사당(祠堂) 건립의 형성 과정이었다. 그런 뚜렷한 발자취가 고대 신라인들에 의하여 동해바다 건너 일본땅으로 이어진 터전이 오늘의 일본 후쿠이현 쓰루가(福井県敦賀市) 일대이다.

일본에서는 신궁(神宮)이라고 부르는 큰 사당은 10세기 초에 왕실에서 제정한 법령상의 호칭인 국가사당(式內大社)을 일컫는다. 한국 동해 건너 일본 열도 서북부 전체 지역인 호쿠리쿠(北陸)에서 유일한 국가사당으로서의 신궁은 쓰루가(敦賀)의 게히신궁(氣比神宮, 福井県敦賀市曙町11-68) 한 곳뿐이다. 이 사당에서는 현재 모두 일곱명의 천황가 국가신 신주(祭神七座)를 제사 지내오고 있다.

 이 큰 국가 사당 게히신궁의 주신(主神)인 최고위 국가신은 ‘이사사와케대신’(伊奢沙別大神)이다. 우리를 주목시키는 사실은 “게히신궁의 주신 이사사와케대신은 신라 천일창(天日槍)왕자이며 이사사와케대신이란 아메노히보코대신(天日槍大神, あめのひぼこ, 이하 천일창대신)을 말한다”고 한다.

신라 천일창 왕자는 일본왕실이 제사를 모셔오는 일본 국가 인격신(人格神)이 된 최초의 한국인 인간신(人間神)이다. 천일창 왕자의 정체는 일본의 두 가지 고대 역사책인『일본서기』(日本書紀, 720)와『고사기』(古事記, 712)에 각기 뚜렷하게 ‘신라인 천일창왕자’로서 상세한 기사가 전해온다. 물론 한국 고대사에서는 천일창왕자의 흔적이 전혀 없다.

즉『일본서기』에는 신라왕자 천일창 (新羅王子 天日槍, あめのひぼこ)으로 등장하며,『고사기』에서는 천일창이 신라왕자 천지일모(新羅王子 天之日矛, あめのひぼこ)로서 등장하지만 똑같은 인물이며 일본 역사상의 호칭도 ‘아메노히보코’(あめのひぼこ)다.

 『일본서기』에서 천일창왕자가 신라로부터 일본에 건너간 것은 일본 제11대 스이닌천황(垂仁, B.C.29~A.D.70) 당시였다. “신라왕자 천일창은 스이닌천황 왕실로 건너와서 직접 스이닌천황에게 그가 신라에서 가지고 온 곰신(熊神)의 신주(神主)를 모신 제단인 ‘곰신단’(熊神籬, くまのひもろぎ)과 붉은 옥(赤玉) 등 3가지 옥과 이즈시(出石)의 쌍날창과 이즈시의 작은 칼, 청동 해거울 등 7품(뒤이어 8품설도 별도로 나옴, 필자주)을 직접 건네 주었다”고 했다.

스이닌천황은 당시 일본 중앙지대 하리마땅(播磨國, 지금의 효고현 남부)인 “시사와노무라(宜栗邑) 터전과 아와지시마(淡路島)의 ‘이데사노무라’(出淺邑) 두 지역을 그대 마음껏 거느리시오”하고 천일창왕자에게 지배의 터전을 베풀어주었다. 그러나 천일창 왕자는 “나의 소망은 내가 마음껏 이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녀 보고나서 내 마음에 드는 고장을 스스로 택하려하오”하였다.

이에 스이닌천황은 그의 뜻을 받아드렸다. 천일창은 우지강(宇治河, 현재 교토시 남부의 강)을 동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오우미(近江, 오쓰시)의 일본 최대 비와코호수(672.4 재곱 미터) 주변 아나무라(吾名邑)를 스스로가 차지하고 한동안 그곳에 살았다. 그는 다시 서북쪽으로 올라가서 와카사만(한국 동해 맞은편 후쿠이현 쓰루가 등 일대) 바닷가 지역에서 살다가 다시금 그의 지배의 터전을 옮겨 다지마국(但馬國, 지금의 효고현 도요오카시 이즈시, 出石)로 옮겨서 살았다.

『고사기』에서는 신라 천일창왕자(天之日矛, 아메노히보코, 천지일모)의 기사를 스이닌천황(垂仁, B.C.29~A.D.70) 시대 보다 약 3백년 뒷날인 오진천황(應神, 270~310)조에 싣고 있다. 고대 지역 역사『하리마풍토기』에서는 “천일창신(天日槍命, あめのひぼこのみこと)이 신라로부터 오진천황 당대에 하리마(현재의 효고현, 兵庫縣 서쪽) 땅으로 건너왔다”고 하며 천일창왕자를 명(命) 즉 신(神)의 이름으로 밝혔다. 
이 경우는 그 당시 천일창왕자가 스진왕조의 왕실이 있었던 나라(奈良)땅으로 가기 전에 먼저 하리마땅을 정복했으며 그의 사후에 천일창을 신으로서 제사모시게 되었다는 발자취가 가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천일창왕자가 왕도였던 나라땅에 가서 신보를 스이닌천황에게 넘겨주고 나서, 새로운 정복의 땅인 하리마 지방에 내려갔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 밖에 『고고슈이』에도 역시 신라왕자 천일창은 아메노히보코(あめのひぼこ, 海檜槍, 해회창, 한자는 다르나 똑같이 읽어 온다. 필자주)의 이름으로 신라로부터 일본에 도래한 기사가 보인다. 그러나 이 모두는 고대에 썼던 각기 다른 역사 기사여서 천일창 도래 연대 등 시기가 서로 달라서 정확한 도래 시기는 파악할 수 없다. 필자로서는 서기 2~3세기 경의 일본 도래로 본다.

천일창 왕자가 신라로부터 모셔온 곰신단을 스이닌천황에게 건네준데 대하여 지금부터 2백 여년전 당시 일본의 저명한 고증학자 토테이칸(藤貞幹, 1732∼1797)이 다음처럼 밝혀 매우 주목받았다. “곰신단’(熊神籬)은 ‘히모로기’(比毛呂岐)라고 부르는 ‘신라어’이다. 이 히모로기라는 곰신단에 의하여 일본땅에는 처음으로 신(神)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신사(神祠)를 세우게 되었다”고 저명한 현대학자인 도쿄음악학교 교수 다카노 타쓰유키(高野辰之, 1876~1947)도 일찍이 도테이칸과 똑같은 주장을 했다.

 “신라 천일창왕자가 일본에 가져온 곰신단은 일본에 등장한 신사(神社)의 효시가 되었다”고 단언했다. 그러므로 신라 곰신단에 의하여 일본에서는 천신(天神)을 신앙하는 신의 사당(祠堂)이 처음 등장하여 일본 선주민(先住民)들의 사회에도 신라인 지배자 천일창이 모셔온 곰신단에 의하여 비로소 신도(神道)라는 천신신앙이 새롭게 이루어졌다는 고증이다.

게히신궁의 천황가 7명의 제신(祭神)들 중에서 으뜸인 천일창대신의 뒤를 잇는 두 번 째 서열의 신주는 추아이천황(仲哀, 192~200 재위, 帯中津彦命)이며 세 번 째는 추아이천황의 처 신공황후(神功皇后, 息長帯姫命)이다. 그 다음 네번 째 서열의 신주는 제12대 게이코천황(景行 71~130)의 아들인 야마토다케루노미코토(日本武尊)다.

게이코천황은 제11대 스이닌천황의 아들이다. 다섯 번 쩨는 신공황후가 낳은 오진천황(應神, 270~310재위. 誉田別命)이고 여섯 번 째는 타마히메노미코토(玉妃命, 虚空津比売命)다. 타마히메노미코토는 신공황후의 여동생이다. 마지막 일곱 번 째 신주는 다케우치스쿠네(武內宿禰)이다. 다케우치스쿠네는 제12대 게이코천황(景行, 71~130)의 아들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고대 초기 게히신궁이 처음 섰던 당시에는 당연하지만 이 큰 국가사당에서는 천일창대신(天日槍大神) 한 분만의 신주를 유일하게 모셨다. 현재 게히신궁 정전 앞에 세워있는 검은 석판에 새겨서 기록된 것에서도 그것을 쉬이 찾아볼 수 있듯이 “게히신궁의 초창은 벌써 2천 여년 전”이란다.

게히신궁에는 그 후 약 7백년 뒤인 서기 702년(大寶2년)에 이르자 게히신궁의 제단(祭壇)에 주신(主神) 천일창대신(이사사와케대신)의 신주  밑에다 새로히 두명의 제신(祭神)을 추가 합사(合祀)하여 제사지내게 되었다. 그 둘은 제14대 추아이천황(仲哀 192~200)과 그의 처 신공황후(神功皇后 2~3C)의 신주다.

추아이천황은 천일찬왕자와 아무런 연고도 없다. 다만 천일창왕자와 연고가 있는 사람은 그의 처 신공황후다. 왜냐하면 “신공황후는 천일창왕자의 후손”(12)이기 때문이다. 설령 신공황후가 천일창왕자의 후손이라손 치더라도 역사상 오랜 뒷날인 서기 702년에 이르자 지금까지 게히신궁에서 유일하게 제사모셔온 제신 천일창대신의 신주밑으로 이들의 두 신주가 갑자기 끼어들어 온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그 뒷날 다시 4명이 추가되었다. 여기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어떤 중대한 역사적인 사연이 깃들여 있으리라고 본다. 그 점은 아래에서 후술한다.

단군조선 이래 고조선 민족의 태양신 숭상과 벼농사 등장

오차노미즈(お茶の水)대학 국문학과 교수 쓰기다 마사키(次田眞幸)는 신라왕자 천일창인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 천지일모, あめのひぼこ)의 ‘모’(矛)자는 태양신(日神)의 징표로서 천일창은 태양신이라는 명칭이다. 이 신은 조선계(朝鮮系) 태양신이며 도래인들이 신앙하였던 신이다”라고 지적했다.

쓰기다 마사키가 천일창 왕자의 이름이 ‘태양신’을 표상한다는 것과 도래인들의  태양신 신앙이 전해졌다고 했다. 이것은 천일창의 신라국에서는 단군조선 이래 줄곧 ‘삼족오’(太陽鳥) 등 고조선 민족의 태양신 숭상과 벼농사 풍년 기원의 신앙과 그 사상이 이어져 왔다는 것을 추찰시킨다. 그 때문에 천일창이 일본에 건너감으로써 그 당시까지 벼농사 등이 없이 다만 ‘나무열매 따먹기’며 바닷가 ‘조개줍기’ 등등 원시적인 채집(採集) 생활만 하던 일본 야요이시대선주민 사회에 신라의 태양신 숭상과 선진 벼농사법이며 대장간 철기 제작 기술 등이 처음으로 전파된 것임을 아울러 추찰케 한다.

동시에 신라며 가야 등으로부터 이 곳 쓰루가 지역 등으로 천일창왕자 등이 건너 온 데서 처음으로 일본에 고조선 태양신 신앙의 신도(神道)며 제사 등의 양식이 전해진 것을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사학과 교수 혼고 마사쓰구(本鄕眞紹)도 다음처럼 지적했다. “『고사기』등 기사에 나오는 천일창(신라로부터 도망쳐온 아내를 뒤좇아 일본으로 건너 온 신라왕자)의 역사 기사와 공통적인 모티프를 갖는 것이 가야왕자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이거니와 어느 쪽이거나 이들이 조선반도로부터 건너온 것을 말해준다. 또한 쓰누가아라시토의 동녀(童女)를 신(神)으로서 일본에서 사당에 제사지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쓰루가 등 호쿠리쿠(北陸) 지역의 신을 제사 모시는 격식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시사해주는 바 매우 크다고 말하리라.”

이렇듯 일본 고대사에는 신라왕자 천일창과 스이닌천황 2년(B.C. 30년)조에 ‘머리에 뿔이 났다’고 하는 가야왕자 쓰누가아라시토라는 각기 두 인물이 등장하며 성격이 서로 매우 유사한 기사가 전해오기도 한다. 그러나  8세기 초의 『에쓰젠국정세장』등에 의하면 “쓰루가를 지배했던 토호 쓰누가아라시토 가문의 조상신(氏神)은 천일창대신 이었다”고 한다.

고대는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회여서 당시의 최고 지배자인 수장(首長)은 ‘샤먼의 왕’으로서 지배체제와 동시에 하늘의 천신 제사를 앞장서 이끌었다고 본다. 만약에 천일창이 태양신을 숭상하며 벼농사를 이끄는 그런 강력한 지배자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비록 그의 신분이 신라 왕자였다손 치더라도 일개 신라 도래인을 일본 국가사당 신궁의 국가신으로서 2천년이라는 오랜 역사속에 떠받들어 올 수는 없었다고 본다. 교토대학 사학과 교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는 “일본에서 왕실 사당을 신궁(神宮)으로 부르는 것은 신라로부터 답습했다”고 지적하면서 “이미 고대 신라는 박혁거세 시조사당(始祖廟)을 소지왕 9년(서기487년)에 신궁으로 삼았다”고 했다. 일본에서 천신이며 조상신을 제사 모시는 사당 신궁의 등장은 신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천일창왕자는 선주민에게 풍부한 식량원을 베푼 신령님 게히대신(食靈大神)

10세기 초 게히신궁에서 직접 써낸 역사책인『게히궁사기』(18)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게히궁에서는 천일창왕자의 신주를 신대(神代, 일본 고대 역사의 개국신화 시대, 필자주)로 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이름으로 호칭하여왔다. 천일창대신이라는 호칭을 비롯하여 이사사와케대신(伊奢沙別大神) 또는 게히대신(氣比大神), 또한 (글자가 서로 다른 한자어. 필자주) 역시 게히대신(食靈大神), 그 밖에 미케쓰노오카미(御食津大神) 등등 신의 이름으로 각각 존칭하였다” 고 한다. 이런 명칭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천일창신은 백성들에게 훌륭한 식량을 베풀어주시는 지배자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현재 게히신궁에서 주신 천일창대신(天日槍大神)의 존재를 표면적으로 표방하는 대표적인 신주의 명칭은 천일창대신이 아니고 이사사와케대신(伊奢沙別大神)이라는 천일창의 별칭 하나만을 내세우고 있다. 후쿠이코대학 사학과 교수 이마키 쿠니오(印牧邦雄)는 “고래로 에쓰젠(越前, 쓰루가 등 후쿠이현의 옛 지명, 필자주)의 국가사당 게히신궁은 민중의 존경을 받아 ‘게히궁’(食靈宮, 笥飯宮)이라고도 부르며 천일창왕자를 제사드렸다”고 밝혔다.

지금의 쓰루가를 고대에는 ‘게시이노우라’(笥飯浦)라는 바닷가 포구로서 불렀던 데서 뒷날 ‘게히’(笥飯)라는 한자어의 지명도 나왔다. 게히(笥飯)라는 한자어는 앞의 게히(食靈, 식령)와 서로 글자는 달라도 일본의 만요가나(한국의 이두식) 한문자 표현으로 ‘식량을 베풀어주시는 신령님'이라는 뜻이다.

인간에게는 뮈니뭐니해도 굶기지 않고 먹을 것을 제대로 베풀어주시는 하늘의 신이 으뜸이다. 후쿠이현의 예전 역사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당연하지만 “게히대신(氣比大神)은 신라 천일창왕자다”(20)라는 기사다. 쓰기다 마사키는 앞에 제시한 『고사기해설』에서 “나는 게히신궁의 이사사와케대신은 신라 천일창신(天日槍命, あめのひぼこのみこと)이라는 고대 『징키시료』(『神祇志料』)의 기사만을 믿고싶다”고 강조했다.

1933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출신 교수 쓰기다 마사키는 고대 한자어 고문서만으로 써있던 고대 역사책 『고사기』(『古事記』) 전문(全文)을 일찍이 직접 현대 일본어로 번역하고 주석한 것으로도 일본 사학계에 정평이 있다. 더구나 그가 천일창을 ‘태양신’의 존재로까지 존칭한 것은 더욱 주목된다.

한국 동해 건너 일본 서북부의 광대한 지역에서 고대부터 태양신으로서 떠받들어 오는 최고의 국가신이 된 인물이 신라왕자 천일창이라는 발자취는 결코 우리가 범상하게 스쳐 지나가버릴 만한 역사 과정이 아닌 것 같다.

한국 고대사에는 천일창에 관한 기사가 일언반구도 없으나 앞에서 검토하였듯이 일본왕실이 게히신궁의 주신으로 받들고 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천일창왕자가 신라로부터 동해 건너 일본 지역으로 이주하여 그 지역에서 벼농사법을 몰라 기아로 항상 배고픈 원시적인 일본 선주민들에게 훌륭한 쌀밥이라는 식량원을 풍부하게 제공한 것이 아니고는 그의 사후에 그의 신명(神名) 여러가지 처럼 그를 일본 선주민들의 식량과 연계된 최고위의 국가신으로서 떠받들어줄 이유는 없었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게히신궁 경내에는 사루다히코(猿田彦命)라는 별개의 천신을 모신 사당도 따로 있다. 저명한 고대사학자 나카가와 도모요시(中川友義)는 『일본서기』의 개국신화에서 “천손족을 선도한 사루다히코(猿田彦命)는 본래 조선의 한신(韓神)”이라고 지적하면서 “조선 남부의 벼농사가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신라 신도(神道)도 함께 건너왔다”고 주장했다.

신라 신도란 다름 아닌 우리 민족의 단군신도가 신라 시대로 이어져 계속 전승된 것을 간주시킨다. 게히신궁의 별개의 한 신주인 천손족 사루다히코의 이름 “사루다(猿田)는 ‘논’을 가리키는 조선어 ‘쌀밭’에서 유래된다”고하는 학자도 있다.

일인들은 한국어의 된발음이 서툴러서 흔히 ‘쌀’을 ‘사루’라고 발음한다. 경상도 지방의 방언 역시 ‘살’이기도 하다. 또한 일본 개국신화에서 사루다히코신(猿田彦命)의 마누라는 여신 사루메노키미(猿女君)다. 역시 그녀의 이름 사루메(猿女)도  ‘쌀 여신’이란다. 사루메노키미는 일본 개국신화에 등장하는 소란스런  아메노우스매노미코토(天鈿女命)의 후손이다.

“우스매노미코토라는 이름속의 ‘우스매’(鈿女)라는 뜻은 조선어의 ‘웃음 여인(笑女)’이며 그녀는 바다를 건너 온 조선의 여신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발자취는 신라 벼농사와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다.

천일창이 존귀한 쌀의 큰 신령님, 즉 식령대신(게히대신)으로 추앙받았듯이 계속하여 동해를 건너 온 신라인 집단 세력은 이 고장 미개한 채집 생활 선주민들에게 벼농사법을 널리 가르쳐 영양가 높고 맛난 쌀밥을 먹여주었고 천일창 사후에는 일본왕실 최고의 곡령신(穀靈神)으로 존숭했던 것이다. 교토대 사학과 교수 하야시야 타쓰사브로는 다음 같은 내용을 밝혀 주목 받았다.

“고대 신라인들은 논을 위한 댐을 건설하는 등 교토땅 카쓰라강(桂川)에서  신라의 선진 벼농사법을 훌륭하게 이끌었다”.

후쿠시대 사학과 아오키 미치오 교수 등은 원시적인 바닷가 조개잡이며 나무열매 따먹기 따위 채집 생활로 영양이 극도로 결핍했던 일본 “조몬시대(B.C.3C 이전) 사람들의 키는 148~157 센티였고, 유아 사망률이 높아 40세를 넘는 사람도 적어 평균 수명은 약 30세였다”고 한다. 그런 사실은 패총(조개무덤)에서 발굴한 사람뼈 연구로서 규명되었다. 그러기에 쌀밥을 먹으며 “한국 남부로부터 건너온 평균 신장 163센티의 도래인과 선주민 여인들이 혼혈하여 키가 큰 야요이인이 생겼다”고 했다.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사학과 교수 혼고 마사쓰구(本鄕眞紹)는 “사냥과 물고기잡이를 하던 선토기․조몬시대가 지나서, 기원전 3세기 경부터는 벼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생산 경제 단계인 즉 야요이시대를 맞이한다”고 하면서 “여기서 이제 고대의 신(神)들에 대한 신앙을 생각해 볼 때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지난 날 ‘코시’라고 부르던 호쿠리쿠(北陸) 지역에 있어서 오히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으나 이것은 대륙의 문화․사상의 영향이다. 야요이시대가 온 것은 논의 벼농사(水稲)와 금속 그릇이 대륙으로부터 전래하여 온 것처럼, 일본 고대문화는 그 대부분이 대륙문화의 영향을 입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해(동해, 필자주)에 면한 호쿠리쿠 지역이며 북규슈(北九州)․산인(山陰) 등 지역과 더불어 대륙문화가 일본해를 넘어서 닥쳐온 정면 현관에 해당하며, 실로 그 당시는 최신의 대륙문화를 받아서 누리던 지역이었다. 대륙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전승(伝承)이며, 대륙문화의 요소는 『고사기』․『일본서기』를 비롯하여 고대 문헌이며 각 신사의 신주의 성격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또한 근년의 조사로서 출토된 유물들 속에도 대륙 계통의 것들이 포함된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혼고 마사쓰구(本鄕眞紹) 등 일본 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했듯이 일본의 야요이시대에 신라로부터 신도(神道)며 벼농사가 건너온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발자취는 뚜렷하다. 이를테면 서기 65년 “춘3월 밤, 신라 왕도 계림(鷄林)에서는 흰닭이 울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금상자에서 총명한 아기 김알지가 알에서 태어났다”.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학과 교수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는 “신라 김알지는 신라의 곡령(穀靈) 또는 곡신(穀神)의 존재”라고 지적하면서 “일본은 신라와 가장 가깝게 벼농사와 접근된다”고 했다.

신라의 벼농사며 양잠은 이미 박혁거세왕 시대 기사에 보이고, 제7대 일성왕 당시에 “식량은 백성에게 가장 소중하므로 각 고을마다 방죽을 잘 고쳐 완벽한 물관리로 논밭을 넓게 개척하라” 라는 왕명도 있었다. 고대 신라인들에 의하여 벼농사와 댐건설 등 선진 농법이 일본에 건너간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한민족이 일찍이 만주 벌판의 농본(農本) 시대, 가을철 곡식 추수가 끝난 뒤 천신에게 감사드리며 제사 지낸 곡령 신앙은 부여(扶餘)의 영고(迎鼓)며, 고구려의 동맹(東盟, 東明),  예(濊)의 무천(舞天) 등등, 하늘의 태양과 그 관장자인 천신을 외경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쇠붙이를 달구어 삽이며 괭이 따위 농기구며, 또한 전쟁 도구로서 칼이며 창을 만드느라 대장간을 세웠다.

“천일창은 선진 한반도 벼농사와 대장간 등 철기문화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왔던 것”

와세다대학 사학과 교수 미즈노 유(水野 祐)도 “칼은 옛날부터 일찍이 금속기(金屬器)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고대 귀화인계의 대장간 기술민 집단, 이를테면 천일창 전설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신라계 귀화인들의 신보(神寶)였다고 생각한다.

옥과 거울과 칼이라는 신보를 천황이 갖추어 지니게 되는데서 비로소 주권의 표상인 ‘삼종(三種)의 신기(神器)’가 성립되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붉은 옥(赤玉) 등 부여와 고구려, 신라며 가야 등등 한민족 각국 시조들의 신비한 난생(卵生) 개국설화의 발자취도 조선민족의 일본열도 이동과 함께 고대 일본의 천손민족 국가화 작용의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사학과 교수 마쓰마에 다케시(松前 健)는 고조선의 “난생형(卵生型) 신화를 일본에 가져온 신라계 도래인집단 이즈시(出石)족이 실제로 주보(呪寶)로서 그런 붉은 옥(赤玉)을 가져온 발자취가 있다”고 하므로써 붉은 옥은 신령(神靈)을 받들게 된 천황가의 신보가 되었음을 뚜렷하게 밑받침하고 있다.

단군신도에 의한 곰신단과 신라 벼농사와 농기구의 등장

조몬시대(B.C. 3C 이전의 선사시대)의 뒤를 잇는 일본의 야요이시대(BC 3C∼AD 3C 경)는 한 마디로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벼농사시대였다. 이 때부터 비로소 일본에서 논에 벼를 심는 농사법이 신라인들에 의해 처음 등장했다. 벼농사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볍씨 자루만을 어깨에 덜렁 둘러메고 가는 것이 아니다. 큰 배에 농기구와 베틀이며 맷돌, 절구, 도리깨 등등 각종 생활 도구, 또한 삽과 괭이며 칼과 낫 등을 직접 만들기 위한 대장간 시설 등도 모두 함께 실어갔다. 일본 국내에서 철기가 생산되는 것은 5세기 후반부터의 일이다.

실제로 한국 삽(韓鋤, からさび, 가라사비)을 가리켜 시가분교대 사학과 교수 우지타니 쓰토무(宇治谷 孟)는 그가 직접 한자어로만 된『일본서기』역사책을 번역한 본문에서, “가라사비의 검’(韓鋤の劍, からさびのつるぎ)”. 이라고 표현하면서 다음처럼 해설을 이었다. “韓鋤(からさび)는 한국에서 건너온 작은 칼로 보인다.

사비(鋤)는 본래 쟁기라는 뜻이다”라고. 고쿠가쿠인대학 국문과 교수 가나자와 쇼사부로는 일본 근대의 대표적인 그의 일본어사전에서, “가라사비(韓鋤, からさび, 한국삽)를 ‘가라스키’(韓鋤, からすき, 한국쟁기)”라고 읽으며 “기원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서 논밭을 경작할 때 소가 끄는 쟁기를 흔히 가리킨다”고 삽 대신에 쟁기라고 밝혔다. 이로 미루어 소가 끄는 쟁기와 더불어 일본 고대의 소도 한국에서 건너갔음을 추찰케 한다.

또한 이 사전에서 역시 가나자와 쇼사부로는 ‘사히’(鉏, さひ)라는 단어의 항목을 제시하고 “사히는 조선어 ‘Sap’과 동계어”라며 ‘삽’(Sap)이라는 영어 단어를 굳이 이 사전의 해설문에다 표시하면서 한국어임을 단정하기도 했다. 이 밖에 대장간도 한국에서 건너왔다는 데서 고대부터 가라가누치(韓鍛冶, 한국대장간)라고 하는가 하면 이를테면 농촌에서 도리께는 가라사오(韓竿, 한국장대)라고 불렀다는 것도 주목된다. 야요이시대부터 일본으로 철제 농기구인 ‘한국삽’을 비롯하여 ‘한국 쟁기’, ‘한국대장간’, ‘한국도리께’ 등이 건너갔다.

철제 농기구가 일본에 건너가기 그 이전에는 목제 농기구가 먼저 건너갔다고 고고학자인 규슈대학 사학과 교수 니시타니 타다시(西谷 正)가 밝혔다. 그 자취는 북규슈의 백제 농업 유적으로 이름난 ‘요시노가리’ 유적이며 “가라쓰시의 나바타케(菜畑) 유적이며 후쿠오카시 이타쯔케(板付) 유적에서 탄화미(炭化米)로서의 도유체(稻遺體)의 검출은 물론이거니와 목제 농기구인 여러 가지 괭이며 흙손 등 농기구들이 출토하고 있다. 후쿠오카시의 사사이(雀居) 유적이며 나가사키의 사토다바루(里田原) 유적들에서도 실례를 살펴볼 수 있다” 고 그는 지금부터 2천 3∼4백년전 조몬 만기 후반의 북규슈 유적 발굴 결과를 밝혔다. 니시타니 타다시는 한국에서는 일본 벼농사 개시기의 목재 농기구와 비교될 수 있는 목재 농기구인 나무 괭이가 “1992년, 조선반도 서남부인 전남 광주시 신창동에서 처음으로 목제 농기구로서 괭이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의의가 매우 크다”고도 했다.

한민족 고유 철학의 뿌리 『 천부경 』정신 담긴 일본왕실 천신 제사

신라 천일창왕자도 현재까지 그를 받드는 국가신궁이 있는 쓰루가며 최종 거주지 이즈시에서 지역사회의 왕노릇을 했다고 본다. 천일창왕자가 신라로부터 건너왔을 때, 스이닌천황이  천일창왕자로 하여금 스스로 지배지를 선택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것은 어쩌면 스이닌천황 자신도 먼저 신라땅에서 건너온 신라계 후손이라는 것을 추찰케 하는 중대한 발자취다. 거듭 지적하거니와 “곰신단이 일본 고대의 천신 신앙의 신사(사당)의 시초가 되었다”는 2백여년 전의 역사 고증학자 토테이칸을 비롯하여 다카노 타쓰유키 등의 연구도 값지다.

더구나 게히신궁 최고신인 그의 밑에 여러 일본천황과 후손인 신공황후 등을 거느리는 최고신으로서 당당하게 군림하고 있지 않은가.

일본왕실 소속(1945년 8월15일 일본의 패전 이전까지) 가쿠슈인(學習院)대학 교수 마유즈미 히로미치(黛弘道)는 “하리마(효고현 남부)와 다지마(효고현 북부) 지방에 있어서의 귀화 한인집단의 존재와 그 통령가(統領家)의 가계며 집단의 중심으로서의 신궁(神宮)과 그 상징으로서의 신보(神寶), 그리고 한인의 동도(東渡)․동래(東來) 전설이 신라에도 있었다”고 했다. 마유즈미 히로미치가 천일창을 대대로의 통령가(統領家) 집안의 조상이었다고 지적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특히 이것은 앞으로 한일관계사 지배구조에 대한 매우 중대한 연구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학과 교수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의 다음 같은 투철한 주장도 주목된다. 즉 천일창이 “이즈시(出石)의 쌍날창과 이즈시의 작은 칼 등 이즈시의 신보(神寶)들을 스이닌천황에게 헌상했고, 그것들이 신부(神府, 왕실 천신제단)에 소중하게 소장되었다고 하는 것은 천일창의 신보를 매개로 하는 이즈시족(出石族)과 천황과의 동맹이 맺어진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것을 가지고 천일창이 정치적으로 천황에게 복속하는 의례(儀禮)였다고 해석하기 보다는 먼저 제1의적으로는 고대적 종교의식 관계로서의 본뜻을 이해할 일이다. <중략> 즉 야마토 조정은 대륙의 샤머니즘적인 여러 가지 의례를 수용함으로써 그 제정(祭政) 기능을 한층 더 충실하게 진행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것은 일본 천황가의 신도(神道)가 신라 천일창 왕자가 가지고 온 곰신단과 신보를 받드는 샤머니즘 신도 국가가 된 과정을 명쾌하게 지적한 것이다.

천일창이 스진천황에게 건네준 곰신단 이외의 청동제 무기인 ‘이즈시(出石)의 쌍날창’ 등 이즈시 명칭의 무기도 천일창의 일본 지배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신라 천일창 집단이 스진천황을 찾아가 만나기 이전에 이미 이즈시 지역에 건너와서 이 고장을 정복하여 당당한 ‘이즈시족’으로 군림했음을 말해준다. 그러기에 천황은 천일창에게 마음에 드는 곳을 지배하라고 응락했던 것이다.

이즈시 터전 등을 장악한 천일창은 미개한 야요이시대 선주민 사회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벼수확 논농사 전개며 선진 철기 무기 제작 대장간 기술을 앞세워 지배했음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모모야마가쿠인대 사학과 강사 단히린은 “천일창은 대장간 기술집단의 수장(왕)이 아니었는가 한다. 또한 대장간 경영은 터브가 많기 때문에 그들이 가져온 신물(神物) 중에는 곰신단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는 샤먼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기에 천일창이 신라 벼농사 문화와 함께 단군의 ‘곰신단’ 한민족 천신 삼족오 신앙을 받들며 선주민들로부터 국가신으로서 추앙받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필자는 곰신단은 고조선 단군 개국시대 웅족(熊族)의 귀공녀였던 단군 모친 웅녀의 신주단지로 추찰하여 오고 있다. 해마다 11월 23일 일본 왕궁 안에서 지내오고 있는 왕실 큰 제사를 ‘니나메사이’(新嘗祭, 이하 신상제)라고 부른다. 여기서 일본 천황가 신상제 제사 축문(御神樂)인 [한신](『韓神』)을 먼저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韓神(本)
見志萬由不 加太仁止利加介 和禮可良加見波
加良乎支世武也 加良乎支 加良乎支世牟也
(末)
也比良天乎 天耳止利毛知天 和禮加良加見毛
加良乎支世武哉 加良乎支 加良乎支世牟也
(本方) 於介 阿知女 於於於於
(末方) 於介  (鍋島家本)
 
일본 천황가의 제사 음악 아악(雅樂) 담당관인 천황궁 악장(樂長) 아베 스에마사(安倍季昌)는 “아지메(阿知女)는 천지인(天地人)을 가리킨다” (43)고 했다.  이것은 “신에게 드리는 제사에 의해서 하늘은 오래고 땅은 영원하며 그 속에서 사람을 편안하게 살게 되도록 큰절을 올리고 기도드리는 의식에서 축의(祝儀)를 제사 노래로서 부르는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아지메는 놀랍게도 곧 우리 민족의 [천부경] 의 본뜻이 아니런가. 일지 이승헌 박사(44)는 오랜 연구 과정에서 일찌기 “『천부경』은 곧 하늘 땅 사람(天·地·人)에 대한 한민족 고유의 철학의 뿌리를 담고 있다”(45)고 해설한 바 있다.

단군왕검의 건국이념의 뿌리 사상을 떠받들어온 한민족은 『천부경』의 철학 사상을 가지고 바다 건너 일본땅을 개척하여 뒷날 일본 왕실에서 아지메(阿知女)의 천지인(天地人) 철학 정신을 받들며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터전을 펼쳤다고 보아야할 것 같다. 고대로부터 일본왕실의 제1차 주권(主權)은 제사권(祭司權)이고, 제2차 주권은 정사권(政司權)이 아니었던가.

신라계의 스진천황은 신라신 대국주신을 제사지내게 됨으로써 신도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비로소 반석 같은 정사(支配)의 터전을 이루었다. 그런 견지에서, 오사카교육대 사학과 교수 토리고에 켄사브로우(鳥越憲三郞)가 다음처럼 주장한 것은 공감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역사학에서 빠져 있었던 큰 문제는 씨족이나 부족의 수호신, 즉 그들이 받들어 제사지내는 신사(神社)의 제신(祭神)과 그것에 관련되는 종교 관념이다. 이는 고대사에서뿐만이 아니라, 중세사·근세사에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특히 고대에서는 그 사회를 움직이는 인자(因子)가 바로 ‘종교관념’이었다. 그 종교 관념을 내버려두고 고대사회를 규명하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가진다. 신라 천일창왕자가 웅녀신을 제사 드리는 ‘곰신단’(구마노 히모로기)을 모시고 왔다는 것도 단군 천신(天神) 신앙의 문화를 왜나라 터전에서 처음으로 펼친 일이라고 본다. 그것은 천신 신앙의 엄숙한 과정을 과시하며 한국신인 단군의 처 웅녀신을 받들게 하는 정사(政事)가 아닐 수 없었다고 본다.

 토테이칸은 다음과 같이 신라의 신앙 체계를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히모로기(神籬)는 후세의 신사(神祠)이니라. 무릇 신리는 그 분의 몸으로 삼아 제사 드리는 분을 모시는 물건이로다. ‘신리’(神籬)를 ‘히모로기’(比毛呂岐)라고 새겨서 읽는 것은 본래 신라의 말(新羅語)이며, 그 신라어를 그 당시 빌려서 쓰게 된 것이로다. 천일창이 가지고 온 ‘곰신리’도 천일창이 조상님을 신주로 모신 것임을 알아둘 것” 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웅녀신 신앙은 곧 한국 고대의 단군신앙(檀君信仰)인 동시에 천손(天孫) 민족인 한국 민족의 조상 단군을 섬기는 신앙의 발자취를 천일창의 ‘곰신리’를 통해서 비로소 확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곰신리’야말로 “일본왕실 천황가의 한신(韓神, 백제신) 및 원신(園神, 曾富理神, 신라신) 제사” 때의 신전(神殿)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제사 때 천황의 신맞이(迎神)의 축문(祝文)에서 모시려는 아지매(阿知女) 여신이야말로 ‘웅녀신’(熊女神)이 아닌가 한다.
 
 ‘황국신도’와 신공황후의 게히신궁 등장의 배경 검토
 
모두에서 살펴보았듯이 게히신궁이 처음 섰던 고대 초기, 이 곳 게히신궁에서는 당연하지만 신라 천일창대신(天日槍大神) 한 분만의 신주를 유일하게 모셨다. 그러나 뒷날인 8세기 초(서기 702년)에 가서 여섯명의 신을 천일창대신 밑에다 더 추가 합사했다는 발자취가 이 사당 게히신궁 고문서에 전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천일창의 후손이라기는 하지만 약 7백년이나 뒷날로 내려와서 신공황후 등을 돌연하게 게히신궁에 합사했느냐는 것은 커다란 의문점이 아닐 수 없다. 일본 고대사에서 신공황후하면 ‘신라를 침공한 여걸’로 등장시키고 있다. 신공황후의 남편 추아이천황이 신의 말을 어겨서 추아이 9년(A.D. 200년) 2월에 병사하자 그녀는 신에게 남편의 죄를 사해달라고 뉘우쳤다. 그 후 10월3일에는 신이 베푸는 신풍(神風)을 등에 엎고 군사들과 배를 쉽사리 몰아 신라로 쳐들어 갔다. 아무 죄도 없는 신라왕은 벌벌 떨면서 백기를 들고 항복하면서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한 끝끝내 신공황후를 받들며 조공을 바치겠다’면서 금은 보화를 그득히 황후의 배에 실어주었다’ 고 한다. 이와 같은 역사왜곡이 실린 것이 8세기초 『일본서기』기사다.

일본 고대사의 한일 관계사를 왜곡한 전형적인 사례가 신공황후의 ‘신라 침공설’이다. 8세기 초엽 당시 후지와라노후히토(藤原不比等, 658~720) 등 왕도 나라(奈良)의 강경한 전제정권의 조정에서는 막강한 신라(668년 이후의 통일신라)를 지극히 경계했을 뿐 아니라 백제인 후손 고승 교키(行基, 668~749. 행기) 를 탄압, 끝내 그를 투옥(717년) 시키는 둥 반한적(反韓的)인 불안한 정국이 이어졌다. 교키는 그 후 제45대 쇼무천황(聖武, 724~749)을 도와 747년부터 도다이지(東大寺) 창건에 앞장섰다. 그 당시 왜왕실로서는 당나라가 신라와 손잡고, 왜의 종실(宗室) 국가인 백제를 무찌르도록 신라에게 동맹의 손을 뻗어준 데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지정학적으로도 인접한 한반도의 강력한 통일 신라는 왜를 위협하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공황후의 신라 침공설은 무엇을 노린 일본 국수주의의 역사왜곡인가. 다시 지적하여 두자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신공황후는 “신라 천일창왕자의 후손”. 이라는 사실 때문에 터무니 없는 반한․혐한적인 역사 조작을 자행했다고 본다.

즉 신라에 대한 콤플렉스에 의한 역사 조작의 역공법이 아닌가 한다. 더구나 흥미로운 것은 나이 어린 오진천황(應神, 270~310) 13년(A.D. 282년), 즉 황태자 때 신공황후는 섭정하면서 13세의 “황태자 밑에다 2월8일에 다케우치스쿠네(武內宿禰)를 수행시켜 쓰루가의 주신 게히대신(笥飯大神), 즉 천일창대신의 신주의 제단에 엎디어 참배하고 돌아오게 하였고, 황태자 일행이 쓰루가로부터 2월17일에 왕궁으로 돌아오자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게히대신이란 천일창대신이다. 더구나 그 후 약 7백년 뒤로 내려가서는 신라 천일창왕자의 신주 밑으로 그들 일련의 여섯명 왕족들을 두 번에 걸쳐 합사시키는 처사를 보였다. 서기 702년이란 일본 왕실 최초의 법률인 대보률(大寶律)을 실시한 해이다.

일본에서는 특히 17세기 이후 괄목할만하게 그들의 국체를 이른바 신이 세운 나라 일본(神國日本)과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라는 황국신도의 역사라고 강조해 왔다. 그 후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등장한 일본의 제국주의 군국정권은 더욱 치열하게 ‘기원2600년 신국일본과 만세일계의 천황 체재’를 천하에 강조하였다.

『일본서기』역사 기사가 잇대어 개찬, 조작되었다는 것은 일본학계의 통설이다. 그런 점은 19세기 말의 저명한 고대사학 박사 요시다 도고(吉田東伍)의 다음 주장에서 더욱 수긍이 간다. 즉 “『고사기』며 『일본서기』는 터무니 없다. 진무천황 건국 문제 뿐 아니라 거기 쓴 것은 전부 거짓말이다”.

일본 역사 학자들의 일본사 문헌 비판(文獻批判)은 이미 에도시대부터 시작되었거니와 특히 신공황후의 ‘신라 어친정(御親征)’이라는 기사와 가야(伽倻)땅을 일본의 관가(官家)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지배했다고 하는 고대사의 조작은 티피컬한 양대 역사왜곡이다.

일본 군국주의하에서 와세다대 사학과 교수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는 “신공황후의 신라 침공설이 허위라는 것 뿐 아니라, 일본 고대사는 간지(60년간) 두 바퀴(二運, 120년간)를 앞에다 바꿔 놓으면서 역사를 조작한 사실”. 등등을 문헌 비판했다. 또한 그는 “일본 초대 진무천황부터 9대 가이카천황까지 9명은 역사에 없는 존재를 조작했다”. 고 논증(論證) 폭로함으로써 “1940년에 주저(主著)인 4권의 책이 발매 금지 당했고, 또한 황실의 존엄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1942년에 출판법 위반에 의한 금고 3개월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리쓰메이칸대 사학과 교수 이노우에 히데오의 ‘임나일본부는 차치하고 ‘임나’라는 국가 명칭 자체가 한반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논증은 일본 사학계의 정평을 받아온다.

에도시대 초기부터 배타적 국수주의 신도국가를 강력하게 밀어부친 소위 미도학파 등등의 250년간에 이르는 방대한 일본 역사서 편찬은 구미 서구 세력이 일본에 침범한 18세기 중엽 당시에는 소위 ‘존왕론’(尊王論)으로까지 발전하여 ‘기원 2600년 신국일본(神國日本)과 만세일계의 천황’ 주장은 메이지유신(1867) 전야에 급진적으로 새롭고도 강력한 국가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21세기인 오늘에도 배타 국수적 잔재 세력은 이미 퇴색해버린 ‘신국일본과 만세일계의 천황’과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여 오고 있어 일본내에서 조차 수많은 식자의 빈축을 사고 있다.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등등이 신국일본 국수주의 신봉자들이다. 더구나 그들은 일부 극단적인 우익 언론 세력을 등에 엎고 역사 책자의 발행 등등 터무니 없는 역사왜곡을 현재까지도 자행하여 오고 있다. 그 실예가 선봉에 있는 니시오 간지 등등의 잇단 역사왜곡 책자의 다대한 물량 공급 등, 대대적인 출판 판매 행위이다.

19세기 중엽, 이른바 메이지유신(1868)으로 일본에 군국주의가 등장한 직후 일본제국주의 정권은 종래의 국가 신궁들을 이른바 관폐대사(官幣大社)라는 간판 아래 몽땅 묶어 한손에 움켜잡았다. 조선침략의 칼을 빼든 그들은 당장 쓰루가의 게히신궁으로 달려가 일본 유일의 한국인 국가신 천일창대신(天日槍大神)의 이름을 빼버렸다. 그 빈 자리에는 영리하달까 ‘이사사와케대신’이라는 천일창대신의 다른 호칭을 바꿔넣었다.

물론 그 당시 이사사와케대신이 천일창대신의 별칭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고 본다. 설령 일본 고대 역사학자라도 신도와 신궁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지 않았다면 이사사와케대신의 정체를 쉬 알아낼 수 없게 숨긴 것이다. 더구나 천일창왕자는 일본 게히신궁 최고의 국가신이며 그의 후손이 다름아닌 신공황후라는데 대한 국수주의자들의 분노의 역공법에서 다급한대로 명칭 변경을 자행했던 것으로 본다.

본 졸론은 필자가 신라왕자 천일창이 유일한 ‘일본 국가신’이라는 사실을 연오랑과 연계하여 한일 양국에 최초로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