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수 명예교수

국학원 ‘한국학을 넘어 국학으로’ 25일 정기 학술회의 개최

현대 정권이 5년 단위로 교체될 때마다 국사교과서가 개정되는 소동을 겪는다. 하물며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로 바뀔 때는 역사서와 관련해 아무 일도 없었을까?

국학원은 한민족기념관과 공동으로 오는 25일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한국학을 넘어 국학으로' 라는 주제로 제24회 정기 학술대회를 개최한다.(본보 7월 16일자 기사 바로가기 클릭)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국학의 수난과 부활의 역사'라는 주제로 미리 공개한 발표문에서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여말선초라 하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평화적 정권 교체처럼 묘사하였으나 역사의 실상은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극의 연속이었다."라고 밝혔다.

박 명예교수는 고려시대에 저술한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오랫동안 복간되지 못한 점, 『규원사화』와 『환단고기』가 간행되지 못하고 근대에 이르러서야 햇빛을 보게 된 점 등을 꼽았다. 이 둘의 공통점은 조선시대에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는 점이다.

"세종이 편찬한 『고려사』에는 마치 고려왕조가 불교의 적폐로 인한 것처럼 기술되어 태조 이성계와 그 추종세력의 반역행위를 위대한 건국공적으로 정당화하였다. 이리하여 500년간 우리나라 역사관과 역사인식은 왜곡된 채 이어져 내려왔다. 여말선초에 대한 역사 왜곡은 고려사에 국한되지 않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까지 미쳐 300년간 전국 어디에서도 읽을 수 없는 책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강행한 20만 권 국사 분서정책 못지 않은 만행이 조선시대에 벌어졌다고 밝혔다.

"세조 2년(1456)에  각도 관찰사에게 20권이 넘는 상고사 기록을 모두 압수한다고 명령했다. 만일 이 어명을 어기고 책을 감춘 자는 참형(사형)에 처한다고 하였으니 1910년의 경술국치직후에 일제가 강행한 20만권 국사 분서정책 못지 않는 만행이었다. 세조의 수서령(收書令)은 고려충신들에 대한 철퇴였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을 살펴보면, 태조 이성계가 왕조교체를 시도한 것은 단순한 역성혁명이 아니라 유혈혁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시작되는 왕조교체의 전 과정은 이성계의 손자 세종대왕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냄으로서 크게 역사가 왜곡되었다. 목조(穆祖)에서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태조(太祖) 태종(太宗)으로 이어지는 여섯 마리 용(六龍)이 우리나라에 내려 와 천복(天福)을 누린 것처럼 기술되었으며 백성들이 이를 암송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역사의 실상은 달랐다. 2천 명이 넘는 고려왕족과 수많은 충신 그리고 애국지사들이 희생된 것이다. 왕씨 일족이 예성강에 수장되고 개성의 두문동에 숨은 학자들이 화장당하였다. 이 비극은 조선 영조 때까지 재평가 받지 못하였는데 그나마 동 두문동에서 죽은 무신들의 죽음은 오늘날까지도 설원되지 않고 있다. "

한편 박성수 명예교수는 한국학계가 진서로 인정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위서로 평가되는 『규원사화』, 『환단고기』모두 단군 이전의 역사와 국학의 뿌리에 대한 기록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며 이를 상세히 밝힐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