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7월과 8월 사이에 돌아오는 3번의 '대국민 몸보신의 날', 복날이 왔다. 초복은 이달 18일, 중복은 28일, 말복은 8월 7일이다. 신세계백화점이 지난 17일 신선식품 바이어, 식품매장 담당자 50여 명을 조사한 결과, 복날을 맞아 추천 보양식 1위에 민어(27%)가 뽑혔다. 이어 전복(20%), 닭(19%), 낙지(12%), 수박(4%) 순이었다. 제철 없이(?) 먹을 수 있는 보양식인 보신탕은 순위에 없었다.

 그렇다면 일 년에 세 번, 전 국민이 두 팔 걷고 원기회복을 위해 나서는 복날, 우리 조상들은 뭘 먹었을까.
 

▲ 삼계탕. 삼계탕은 원래 영계를 고아서 먹던 '영계백숙'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인삼을 넣어 먹던 것이 '계삼탕', 이후 인삼이 대중화 되고 인삼의 가치를 인정 받으면서 '삼계탕'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닭고기는 허약체질을 보하는 것으로 인삼과 찹쌀, 밤, 대추, 마늘 등을 넣어 고아서 만든 대표적 전통 보양 음식이다.

 "…《사기(史記)》에 '진덕공 2년에 비로소 삼복 제사를 지내는데 성 안 사대문에서 개를 잡아 충재(蟲災, 해충으로 농작물이 입는 재해)를 막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개 잡는 일이 곧 복날의 옛 행사요, 지금 풍속에도 개장(개를 삶아 파를 넣고 푹 끓인 것)이 삼복 중의 가장 좋은 음식이 된 것이다…"

-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우리 민족에게 복날은 일 년 중 가장 더운 날을 뜻한다. 초복과 중복, 말복, 이 삼복이 얼마나 더웠으면 '삼복더위'라는 표현이 있겠는가. 곧 개봉하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소개하듯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더위를 이겨 내라는 뜻으로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빙표(氷票)'를 주어 장빙고에서 얼음을 받아 갈 수 있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귀한 것은 높은 님들이 차지했었던 모양이다. 

 양반들은 주로 민어탕을 즐겼다고 한다. '백성의 생선'이라는 뜻의 민어는 예로부터 7~8월 산란기를 맞아 육질이 탄탄하고 기름져 맛이 가장 좋을 때이다. 다 자란 민어는 1m가 넘는데 무게가 10kg에 이른다고 한다.

이 민어 맛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도 뛰어났다.  조선 성종대왕 삼남 안양군(安陽君)의 현손(玄孫)인 이응희(李應禧, 1579~1651년)는 민어에 대해 이렇게 썼다. 


민어(民魚)

입이 크기는 농어와 닮았는데 / 巨口同鱸狀
비늘은 농어보다 조금 크다네 / 纖鱗少有差
피부는 풍성한 살로 채워졌고 / 肌充豐膳足
창자는 속현을 가득 안은 듯 / 腸抱續絃奇
솥에 끓이면 탕이 맛있지만 / 入鼎湯猶可
회를 치기에는 좋지 않아라 / 盤膾不宜登
보시라 건조시킨 뒤에는 / 當看乾曝後
밥 먹을 때 손이 먼저 가리라 / 臨飯手先持 (《옥담시집(玉潭詩集)》, 만물편)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양반들이 즐긴 민어가 '백성의 고기'라니? 어딘가 이상하다. 

"면어(鮸魚)는 곧 민어(民魚)인데, 면(鮸)과 민(民)은 음이 가깝고 민(鰵)과 민(民)은 음이 가깝다. 대저 이러한 것들의 이름에 방언을 쓰지 않고 그대로 중국말을 쓴 것인데, 다만 글자가 다를 뿐이다."(이덕무, 《청장관전서》제55권,  앙엽기 2(盎葉記二) , 우항잡록(雨航雜錄)의 물고기 이름).

 면(鮸)과 민(民)은 음이 비슷하고 민(鰵)과 민(民)이 음이 가까워 면어(鮸魚), 민어(鰵魚)를  민어(民魚)라 부른 것이다.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도 민어를 면어(鮸魚)라고 하고 그 속명을 민어(民魚)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면어를 음이 비슷하여 민간에서는 민어(民魚)라 불렀다는 얘기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면어는 민어를 말한다. 면과 민은 소리가 서로 가깝다( 鮸魚謂之民魚. 鮸民聲相近)"라고 설명했다.(《아언각비雅言覺非》 권3). 民魚라고 썼다고 '백성의 고기'라 해석하는 것은 분명코 후세 사람들의 오해이리라.  민어는 결코 백성들이 즐겼던 해물이 아니었다. 아니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고기가 아니었을까. 이름뿐인 민어에 속았구나!

지체 높고 권세 있는 양반들이 왕이 하사한 시원한 얼음을 깨어 먹는 복날, 민중들은 중노동 중의 중노동인 김매기를 해야 했다. 초복은 초벌 김매기, 중복은 두 벌 김매기, 말복은 세 벌 김매기를 하는 날이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한증막 같은 여름날 논에 들어가 허리를 굽혔다 펴기를 무한 반복해야 하는 김매기는 고된 노동이었다. 말복에 마지막 김매기를 하고 나서 음력 7월 15일 '백중'이 되면 그제야 호미씻이를 하고 잠시 농사일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렇게 힘들 게 일을 하고 난 이들이 보신을 하려면 아무래도 고기를 먹어야 했다.

 개고기를 즐긴 한나라와 달리 고구려에서는 개를 '영혼을 인도하는 동물'로 여길 만큼 귀하게 여겼다. 《보카 늑대의 왕국》(주정은 지음, 운주사, 2009)에 따르면 "조선 시대 이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복날 개고기를 먹는 것과는 무관한 문화를 가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랬던 우리 민족의 생활에서 '복날의 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이다. 조선 후기 서울에 살던 양반집 머슴들이 주인집 개를 몰래 끌고 나가 먹기 시작한 것이 슬금슬금 퍼져 나중에는 복날 김매기를 끝낸 머슴들에게 제공하는 음식(?)이 되며 전국적으로 먹게 된 듯하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한양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에 따르면 "…개고기를 파의 밑등에 섞어 삼는다. 닭고기나 죽순이 들어가면 더욱 좋다. 이것을 개장(보신탕)이라 한다. 국을 끓여 고춧가루를 뿌리고 흰밥을 말아서 먹는다. 이것을 먹고 땀을 흘리면 더위를 제거한다고 한다. 지금 풍속에도 이것을 먹는다…"라고 전하고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도 "개고기는 오장을 편하게 하며 혈맥을 조절하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며,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며 기력을 증진시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더위를 먹지 않고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팥죽을 먹기도 했다. 아이들이나 여인네들은 참외나 수박을 먹었다는 기록도 함께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