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문명의 실현을 이상으로 삼아 온 조선의 유교 지식인.

그들은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되면서 정신적 충격을 받지만 19세기 말까지 이미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기억을 놓지 못했다. 이들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친명사대주의자로만 볼 것인가?

이에 대해 우경섭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는 12일 동 대학에서 열린 ‘동아시아의 전쟁 기억, 트라우마를 넘어서’ 국제학술회의에서 "재조번방(再造蕃邦)’에서 ‘비례불동(非再造蕃邦禮不動)’으로: 명나라에 대한 기억의 흐름"이라는 논문을 통해  중화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했다. 재조번방(再造蕃邦)이란 "명나라 황제가 원군을 보내어 오랑캐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제후국 조선을 다시 건설해 주었다"라는 관념을 집약한 것으로 1598년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명나라 장수 형개의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친히 '再造蕃邦' 네 글자를 써서 걸어 놓도록 명했다.

이날 우 교수는 "1620년대 이후 1644년에 이르는 명청교체의 전야에 조선 지식인들이 임란 때 '再造'의 기억을 회상하며 명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명에 대한 두려움이 개재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고 "하지만 17세기 중후반 이후 청나라의 중원 지배가 점차 안정되어 가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임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현실 관계 속에서 형성된 재조번방의 기억은 17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존화양이(尊華攘夷)라는 유학적 이상을 담아내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에 따라 철학적 보편성의 기반 위에서 명나라로 상징되는 '중화'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일은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부여된 불가결한 과제였다.

우 교수는 " 이 조선 지식인들의 중화개념은 현실의 한족 왕조(明)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는 중화문명의 정통에 관해서 선택적으로 계보화하는 작업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로 우암 송시열이 명나라 숭정제의 유필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글자를 중국에서 구해와 화양동 바위에 새긴 뒤 글씨 원본을 보관하기 위해 환장암(煥章菴)을 건립한 것을 들 수 있다. 우암은 평생토록 청나라 연호를 거부하고 숭정 연호를 고집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명나라에 대해 그다지 좋은 기억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며 명대의 정치제도 전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렇다면 그가 숭정제의 어필을 보관하기 위해 환장암을 세우고 더 나아가 평생토록 청나라 연호를 거부하고 숭정 연호를 고집하며 보였던 '친명사대'의 행적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 교수는 비례부동(非禮不動)을 실마리로 제시했다.

우 교수는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글귀에 대해 우암이 부여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비례(非禮)란 극복(克)과 제거(去)의 대상으로서 일신(己)의 인욕(人欲)을 의미했고, 부동(不動)이란 회복(復)과 보존(存)의 대상으로서 보편법칙적(禮) 천리(天理)를 의미했다”고 말했다.

중화주의자 송시열은 현실에 순응하여 오랑캐에 굴복함은 인욕人欲(=己=非禮)이고, 중화문명의 여맥을 보존하는 일은 천리天理(=禮=不動)로 인식했다. 이는 숭정제가 청나라에 저항하여 자살한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비례부동(非禮不動)의 이념을 현실에서 구현한 순절(殉節)로 기억해야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우암의 인식은 수나라 군대를 몰살한 을지문덕(乙支文德)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가 있다.

우 교수는 "송시열은 을지문덕이 만약 별다른 명분 없이 천자인 수 양제에 대항했다면 마땅히 춘추필법으로 단죄되어야 하겠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의 후궁과 간음하여 인륜을 저버린 수 양제의 죄를 물었던 행동은 중화문명 수호의 공로가 있다고 칭송했다"며 "한족의 정통왕조임에도 의미 부여에 따라 중화의 계승자가 되기도 하고(숭정제) 정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던(수 양제) 정황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역사적 실체로서 명나라의 모든 것이 반드시 중화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우 교수는 "조선 지식인들의 이러한 기억 만들기는 명나라에 대한 단순한 숭배의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보편 문명으로서 중화에 대한 염원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혈통 지역 왕조의 한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중화에 대한 개념 조작 위에서 조선왕조를 중화문명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하려는 사상적 작업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요컨대 명나라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이 기억은 다분히 이중적이었다. 그것은 현실 왕조로서 명나라가 지녔던  특수성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보편적 가치로서 중화문명의 담지자인 명나라에 대한 기억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러한 기억의 사유 체계는 현실 왕조로서 청나라와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중화문화를 구분하여 인식할 것을 주장했던 연암학파의 청나라 인식 구조와도 동일한 면모를 보여준다고 우 교수는 진단했다.

 

한편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세계가 경험했던 전쟁에 관한 다른 기억들을 재구성하여 평화와 상생으로 나아가는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학술회의는 이틀에 걸쳐 한국을 비롯한 일본·중국·대만 등 4개국의 학자 12인의 발표가 진행될 예정이다.

첫 날은 ▲ 임진왜란과 근세 일본의 기억(김시덕, 고려대학교), ▲ ‘재조번방(再造蕃邦)’에서 ‘비례불동(非禮不動)’으로: 명나라에 대한 기억의 흐름(우경섭, 인하대학교), ▲ 아편전쟁에 대한 한, 중, 일 3국의 인식(강수옥, 중국 연변대), ▲ 서양 함대의 강화도 점령과 기억의 정치(이명호, 인하대학교), ▲ 운요호 사건을 서막으로 한 일제 강점의 기억(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 러일전쟁과 한국 주둔 외국 군대에 대한 기억(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이 발표된다.

이어 둘째날에는 ▲ 노구교 사변에 대한 연구와 기억(쉬용, 중국 북경대), ▲ 대만의 전쟁과 식민지 기억 : 방법으로서 '일본시대' (리청지, 대만 성공대), ▲ 식민지 여성의 제국 경험과 기억: 조선인 창녀의 대만 이주를 중심으로(진정원, 대만 중앙연구원), ▲ 일제 말기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에 대한 기억(배영미, 일본 리츠메이칸대), ▲ 동아시아의 냉전과 기억이라는 물음: 오키나와 전쟁을 중심으로(도미야마 이치로, 일본 도시샤대), ▲ 베트남 전쟁과 동아시아 정치지형의 변화(박태균, 서울대학교)가 발표된다.

참가비 무료
문의) 032-860-8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