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장영주 국학원장(대)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사상은 사상대로, 이념은 이념대로, 종교는 종교대로, 학문은 학문대로,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바름도, 밝음도, 깨끗함도 찾아 볼 길이 없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듯이 국민을 속이는 외교를 하고, 엄연히 대한민국에 살면서 적대국을 몰래 방문하여 찬양하고도 당당하게 돌아오고, 국회의원은 애국가와 국기를 부정한다. 우리가 왜 이리 되었을까? 이유는 국민과 지도자들의 인생관과 국가관의 부재에 있다. 무엇이 우리에게서 바른 인생관과 국가관을 빼앗아갔는가? 개인의 창조성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그릇된 종교관과 외래의 가치관이 들어오면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국가관, 인생관을 밀어냈다.

기독교와 결탁한 자본주의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국가관을 이야기하면 국수주의자로 폄하하고, 민주 인권을 이야기 하면 좌파로 몰아붙인 것이다. 자신의 종교는 "불교다, 유교다, 기독교다, 가톨릭이다." 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면서 애국심을 이야기하면 고루한 국수주의자의 이미지를 갖도록 하였다.

향교를, 절을, 교회를, 성당을 보자. 그 어디에 태극기가 걸려 있는가? 종북주의자들이 태극기와 애국가를 부정하는 것은 당연하게 잘못된 일이거늘 이 나라 이 땅, 이 민족에게 선교하고 세금도 없이 막대한 헌금을 받는 종교 시설에 태극기도 없고 애국가도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당연한 종교 활동인가?

국혼을 바로 세우고자 함은 바른 이념, 바른 종교, 바른 마음으로 잃어버린 인생관, 국가관, 애국심을 바로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학계, 정치계, 문화계 등 우리사회 전역에 깊게 뿌리 내린 사상과 종교를 객관적으로 한층 더 깊이 살펴보자.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설화는 불교가 융성한 뒤에 꾸며진 내용이나 불교 수용을 전후한 시기의 신라왕실과 귀족세력 간의 갈등을 반영한다. 이미 신라에는 묵호자(墨胡子)나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와서 불교를 펼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신라 귀족들의 폐쇄성이라든지 재래의 정신문화의 강력함이 원인이었다. 불교의 공인은 신라의 정치체제에서 왕권의 강화과정의 필요성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신라는 발전과 함께 복잡하게 분화된 사회를 하나로 묶을 한 차원 높은 규범과 이를 뒷받침하는 지배이념이 필요했다. 따라서 왕권을 강화해야 할 법흥왕과 불교를 널리 전하려고 한 이차돈의 뜻이 맞아 떨어졌다. ‘불즉왕(佛卽王)’이라는 환치 개념을 활용할 수 있기에 불교는 왕권에 집중하도록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훗날 통일신라의 고운 최치원 선생의 <난랑비서문>에서 밝히니 이미 우리의 재래 사상과 선도철학은 그 수준이 이미 외래의 유불선을 넘을 정도로 차원이 높았다.

"나라에 '풍류도'라는 현묘한 도가 있어서, 백성을 교화해 왔으며,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있고, 그 연원은 선사에 기록되어 있다. (國有玄妙之道曰風流, 設敎之源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삼국사기』)"

유교 또한 고려조의 강력한 비호 세력을 꺾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이성계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유교의 계급사회 이념에서 활로를 찾았다. 유교 창시자인 공자의 군자교육(君子敎育)에서 그 중심은 '예학(禮學)'이었고 '인(仁)'으로써 인격 형성과 완성을 궁극의 목표로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명분을 바르게 하는 사회 질서수립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본분을 지키는 정치적 신분 계급의 확립으로 나타난다. 왕권 강화가 절실한 근세조선의 이념으로 유교가 새롭게 정착되고 나아가 화석화 되면서 백성의 고혈을 짜고 결국은 나라를 잃게 되는 원인이 된다.

19세기 초, 이 땅에 도래한 기독교는 또 한 번 한민족의 정체성을 흐려놓는다.

'하느님'이라는 이름은 어느 바이블(the Bible)에도 없는 한글 단어이다. 전도사 게일(Gale· 한국명 奇一· 1863~1936)과 언더우드, 레이놀즈가 555번 회의 작업을 거쳐 바이블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빌어쓴 우리 한글의 단어이다. 척박하고 가혹한 환경의 사막에서 탄생한 신, 여호와, GOD, 엘로힘을 천주(天主), (옥황)상제(上帝) 등으로 혼용하다가 마침내 ’하나(느)님‘으로 번역한 것이다. 자연히 우리 민족 고유의 ’하느님‘ 이름을 쓰고 나타나니, 당시 어려웠던 나라 사정과 피폐한 백성들이 저들의 신이 우리의 하나님인줄 착각하도록 알게 모르게 유도한 것이다.

한글의  ’하나님‘은 이미 이보다 3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에  활약한 노계 박인로의 총 7편의 가사 중 노계가(蘆溪歌, 1636년, 76세)에 이미 기록 되어 있다.

  "-중략- 시시로 머리 들어 북신을 바라보고

   남모르는 눈물을 천일방에 지이나다

   일생에 품을 뜻을 비옵나다 하나님아"

  이제 우리는 종교와 나라의 관계를 엄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유명하지만, 일각에서는 알리기 불편한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사건이 있다. 백서(帛書)란 비단에 쓴 글로 ‘황사영 백서’란 1801년(순조1년) 천주교신자 황사영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의 내용과 대응방안을 적어 중국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하려 한 밀서이다. 황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조카사위로 당대 조선의 촉망되는 젊은 지식인이자 열렬한 천주교인이었다. 그는 신유박해를 피해 충북 제천 배론(舟論)의 한 토굴에 숨어 지내면서 한국 천주교의 위기와 이 땅을 천주교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청나라와 서구 열강에 도움을 청하는 장문의 편지를 작성한다. 가로 62㎝, 세로 38㎝의 흰 비단 천위에 1만3천3백여 자의 한자가 자잘하게 씌어져 있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와 정약종 등 주요 순교자의 박해 과정이 소상히 기록돼 있으며 도움을 요청한다. 도움의 방법이 철저히 이 땅을 정복해 달라는 내용으로 너무나 충격적이다. 그 밀서의 핵심은 다음으로 요약된다.

1) 청국(淸國)이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하거나,

2) 조선을 아예 청국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천주교를 공인하거나,

3) 프랑스등 서양의 천주교 국가들에게 호소하여 군사 수만과 군함으로 조선을 협박하거나 정복하여 천주의 나라를 만들어 달라.

황사영은 백서가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조선조 의금부에서 압수한 백서는 조선 교구장인 뮈텔 대주교에게 전달되고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로 바쳐졌다. 1984년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는 마침내 황사영을 성인으로 서품한다. 놀랍지 아니한가. 이 어찌된 일인가? 황사영은 교인들이 보기엔 순교일지 모르나 이 땅의 대다수 민초들이 보기엔 명백한 민족의 반역자인 것이다.

‘뮈텔(G. Charles Marie Mutel, 조선명 민덕효 閔德孝) 대주교’와 안중근 의사(1879~1910)도 깊은 연관이 있다. 안중근은 독립의병장이자 삼흥, 돈의 학교 등을 세운 교육사상가이기도 한데, 민립대학 건립을 말하다가 ‘뮈텔신부’에게 뺨을 맞는다. 서양에서 온 신부들은 ‘백성들이 교육을 받으면 하나님을 멀리 한다’는 이유로 반대한 것이다. 안중근은 천주교의 실체에 대해 깨닫고, 열심히 배우던 프랑스 말과 책을 집어 던지며 분노했다.

그러함에도 천주님을 의지하려는 안중근의 의병활동을 이해하지 못한 원산의 ‘브레 신부’는 안중근이 성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고, 감옥에 갇혔을 때 ‘뮈텔 주교’는 모든 선교사들의 면회를 금지하였다. 사형을 선고 받은 안중근의 형장에 신부의 집전을 허락하고 파견을 요청한다는 일본군의 공문에 대하여서 ‘뮈텔 주교’는 다음처럼 냉정하게 거절한다.

‘오늘 저녁 5시 경에 여순 재판소 일본 검사로 부터 사형수 안중근과 빌렘 신부의 면회를 허락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이에 면회를 허락해 주어 감사하지만 여순으로 어떤 신부도 보낼 수 없다 답하였다.’(1910년 2월 16일 뮈텔주교 일기)

‘신민회 105인 사건’에 대하여서도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다.

안명근(安明根, 1879~1927)은 안중근 의사와 사촌형제 간으로 ‘테라우치’ 총독 암살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를 주도적으로 조직하였다. 신민회의 총독 암살시도 사건은 거사 직전에 폭로되고 관련자 105명 전원 검거되었다. 1911년 1월 11일자의 뮈텔 주교의 일기에 그 연유가 적혀 있다. “빌렘 신부가 편지로 -조선인들이 총독에 대한 음모를 꾸민다. - 고 알려왔는데, 그 중심에 야고보(안명근)가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아까보 장군‘에게 알리고자 눈이 많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나(뮈텔)는 그를 찾아갔다.“

안명근은 신뢰하던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고 빌렘 신부는 그것을 뮈텔에게 알린 것이다. 뮈텔은 ‘아까보’에게 그것을 전하고 결국 신민회는 전원 검거되고 만다.  애국지사의 거사 전 날, 한없이 고뇌의 마음으로 고해성사한 것을 신부가 밀정 노릇을 한 것이다. 우리의 가장 위대했던 독립운동 단체의 작전이 천주교의 밀고로 박살났고 뮈텔 대주교는 신민회를 밀고하는 대가로 명동성당 앞을 넓히는 허가를 받는다. 지금 명동성당의 널찍한 길은 105명의 피와 맞바꾼 길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천주교의 공식 입장은 안명근이 빌렘에게 말했던 것은 고해성사가 아닌 그냥 고백이라는 구차한 답변이다. 그러나 뮈텔의 일기가 학계로 흘러들자 부랴부랴 안중근의 살인 혐의를 면한다는 발표를 하더니 국민들의 여론을 비등하자 1993년, 안중근 의사를 천주교인으로 복권하였다.

일제시대에 불교는 천황에게 전투기를 바쳤으며 개신교 역시 주기철 목사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부일협력’ 한 것이 사실이며, 기미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에는 유교인은 한 명도 없었다. 오늘날, 북미 캐나다, 아메리카와 중남미 제국들, 호주의 원주민들은 누구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 물론 제국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침탈 때문이지만 제국주의자들이 앞장세운 것은 종교이었고, 대다수가 기독교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은 말한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바이블 이외에 모두 다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우리에게는 바이블만 남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의 저자 이형래는 이렇게 묻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순교라 말하면서 자신들에게 죽임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단 한마디의 어떤 언급도 없다. 그들은 군함을 타고 이 땅 들어왔고 교세확장을 위해 언제나 제국주의의 무력을 등에 업고 다니면서 때로는 협박하고 때로는 타협하며 이 땅의 문화와 역사를 잠식하고 왜곡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국학원 원장(대),한민족 역사문화 공원 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