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은 10일~11일 동 재단 11층 대회의실에서 ‘동아시아 지역 영토분쟁의 과거·현재·미래’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윤태룡 건국대학교 교수는 ‘중러 영토분쟁의 해결’ 논문을 발표했다.

윤 교수는 2005년 중러 조약을 통해 3백 년간 계속된 우수리 강의 전바오섬(다마스키섬) 분쟁이 해결된 사례에 주목했다.

윤 교수는 “1969년 8월, 양국이 대립했을 때에는 핵전쟁의 가능성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며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푸틴과 후진타오가 ‘50:50’의 원칙과 ‘공동사용’의 방식으로 중국과 러시아 간의 정치적 타결을 이뤘다”며 “이를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상호 이익을 도모했다.”고 말했다. 중러 간의 영토분쟁 해결에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 양국의 과거 관계가 부정적이었다고 두 국가가 미래에 맺을 관계도 부정적이지는 않다 ▲ 정치 지도자의 일방적 타협이 역사를 바꿔놓을 수 있다 ▲ 50:50의 원칙에서 나타나는 공정성이 영토 문제의 해결에 중요하다 ▲ 영토분쟁의 마무리는 정치적 합의에 이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등을 제시했다.

아래는 발표전문이다.

1. 서론

이번 학술회의에서 발표되는 논문의 대부분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영토분쟁의 심화과정과 동아시아 국제 정치의 암울한 일면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현재 진행 중인 해상 영토분쟁을 주제로 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참석자 모두의 주된 관심은 각자의 연구 사례에 대한 해결책을 도모하고 궁극적으로는 한일 간의 독도 영유권 분쟁 등 동아시아 영토분쟁 당사국들 간의 평화를 이루는 데 있을 것이라고 사료한다.

필자 또한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이번 논문에서는 중러 영토분쟁이라는 성공적인 해결 사례를 집중적으로 조망함으로써 당사국들이 상대방과의 관계를 적절하게 통제하고 양보한다면 어떠한 분쟁이든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쪽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2005년의 중러조약을 통해 삼백 년간  계속된 중국과 러시아의 영토분쟁이 막을 내렸다. 이 정도로 장기간 이어진 역사적 분쟁이 해결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냉전 중이었던 1969년 3월 우수리강의 전바오섬 (다마스키섬)에서 대치한 중국과 러시아는 전면전의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1969년 8월 신장의 중소 국경 서부에서 양국이 대립했을 때에는 핵전쟁의 가능성이 제기될 정도로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양국 간의 위태로운 관계 때문에라도 중러 영토분쟁은 학술적 연구의 가치가 충분한 매우 흥미로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 중러 영토분쟁의 역사적 배경

1)1689 네르친스크 조약

어떠한 접촉도, 충돌도 없었다. 중세의 소규모 국가가 우랄 산맥을 넘어 수 세기동안 번영했던 중화제국의 존재를 알지 조차 못했던 것은 당연했다. 1567년, 베이징에 도착한 두 명의 코사크 기병이 황제와의 만남을 청하였으나 거절 당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에 이르자 러시아가 우랄산맥과 시배리아를 태평양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무르 분지에 진출 한 후에는 네르친스크라는 마을을 세우고 모피 거래를 위한 교역소와 요새를 설치했다.

1670-80년대에 발발한 러시아와 중국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는 1685년에 경계확정을 위한 협상을 제안하게 되었고 그 결과 1689년 8월에 양측이 네르친스크 외부에서 만나 회담을 갖게 되었다. 수적으로 불리한 입장이었던 러시아는 중국측 요구의 대부분을 수용했다. 결과적으로 네르친스크 조약은 경계라기보다는 국경지역을 규정하게 되었다.

즉, 현대 국가에 적용되는 지도상의 정확한 구분선이 아닌, 산맥과 같은 지리적 특성에 기반한 지역적인 영유권의 분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네르친스크 조약에 따라 러시아가 아무르 분지에 세운 요새 등이 철거되었고 중국의 영토는 한세기 반 가량의 시간 동안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2)1858년 아이군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

19세기 중반 중국은 아편전쟁에서의 패배와 태평천국운동에 의한 내부 분열로 취약해진 반면 러시아는 아무르 분지에 대한 식민지배를 강화하고 네르친스크 조약 에 따라 중국의 영해로 인식되었던 오호츠크해에 정착의 기반을 세웠다.

1850년에는 반복적인 탐사를 통해 아무르 분지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권이 확대되었고 중국측 저항의 부재 덕분에 취약해진 중국을 상대로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게된 러시아가 새로운 경계확정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아이군 조약 (1858)과 베이징 조약 (1860)으로 인해 중국은 한반도 북쪽의 바다, 중국 영토, 그리고 우수리 강이 만나는 지점 아래쪽에 위치한 우수리 강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했다.

중국이 아시아 대륙을 침략함에 따라 아무르 분지와 우수리 강이 사실상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경계가 되었다. 중국은 1912년 제국에서 공화국으로의 전환에는 성공하였으나 북동쪽에서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지는 않게 되었다.

3)1919년 카라한 선언

1919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외교관 레프 카라한은 러시아 황제에 의한 중국 내 모든 영토 점령을 일방적 및 무조건적으로 포기한다는 소련 정부의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카라한 선언 당시 러시아가 포기한 영토의 상당 부분은 새로 수립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USSR)의 통제를 벗어난 반혁명 세력의 지배 하에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라한 선언은 철회되었고 때이른 축배를 들었던 중국의 분노를 샀다. 

4)잠자는 사자 중국

만주에서 손 쉽게 일본을 무찌른 러시아가 만주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확보하며 신장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는 동안 외몽골은 소련의 괴뢰국가가 되었다. 중국 제방에 이르는 국경하천에 대한 소련의 영유권 주장을 위협하는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고 주변 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새로운 정부가 지닌 최우선 과제는 중국이 절박하게 필요로 하던 경제적 지원과 정치적 연대의 유일한 돌파구였던 소련연방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Maxwell 2007:231-234] 잠자는 사자였던 중국은 다시 힘을 얻기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1969년 전바오섬 (다만스키섬) 분쟁 

불평등 조약 - 이와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역사적 진화와 불평등 조약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중러 영토분쟁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양국의 국경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명확하게 확정된 바가 없었고 영토분쟁은 주로 19세기에 양국이 체결한 일련의 ‘불평등 조약’에 기인한 것이었다. 중국은 이러한 조약이 불평등하며 그에 따른 러시아의 중국 영토 병합이 불법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분쟁이 심화된 가장 큰 원인은 1960년대의 양국관계 악화였다. 1960년대의 첫 번째 국경 분쟁 이후 국경분쟁이 점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양국 갈등의 주요 원인으로 자리잡았다.

이념갈등 - 로렌즈 뤼티가 주장한 바와 같이 중러동맹 이전의 영토분쟁은 양국간에 이념갈등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양국관계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이념은 중소관계 분열에 커다란 역할을 했으며, 특히 흐루시초프가 1967년에 비스탈린화 운동을 벌인 이후에 더욱 심화되었다. 중국과 러시아의 불협화음은 사회주의를 수립하는 데 적용된 방법론과 자본주의 세계를 향한 사회주의 진영의 진출을 위한 공동 정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과 소련의 분열은 냉전시대의 주요 사건 중 하나였다.  이념이 그러한 갈등의 중심에 있었고 점점 국내 정책과도 얽히기 시작했다. 지도층의 갈등으로 인해 마오쩌둥은 그가 지닌 국내적 및 국제적 목표의 달성을 위해 악화되고 있었던 중소관계를 활용하게 되었다.

1969년의 분쟁과 정상화를 가로막은 세 가지 장애물 - 중국과 소련연방이 1969년 전바오 섬에서 충돌하게 된 것은 위와 같은 역사적 및 정치적 맥락에서였다. 두 나라는 1964년에 이미 국경 분쟁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으나 곧 중단되었다. 중국의 문화혁명 기간 동안 긴장상태는 더욱 격화되었고 중국과 소련 모두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했다. 전바오섬에서의 출동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소국경의 다른 부분에서 양측이 또 다시 대치하여 양국 모두 엄청난 피해를 보았고 3000명 가량의 소련 병자와 중국 병사가 사망했다. 양국은 코시긴 소련 총리와 저우언라이 중국 수상이 1969년 9월 베이징에서 가진 긴급 회담을 통해 전면전은 겨우 피해갈 수 있었다. 그 후 양측은 국경지역에서의 현상태를 유지하고 교전을 중단하기 위한 임시조약에 서명했다.

양국의 협의는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 한 채 1979년 까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이어지다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중단되었다. 이후에 중국은 관계 정상화에 따른 세 가지 문제점을 강조하는 것 말고는 국경지역의 상태 변화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국이 제기한 세 가지 문제는 중국 국경과 몽골에 배치된 소련의 대규모 병력,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에 대한 소련의 지지였다. 국경 문제에 대한 협의의 성공은 전반적인 중소 관계 개선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3. 장기적 관점에서 실패가 지니는 의의

1)장기적 관점에서의 실패가 주는 교훈

중러 영토분쟁의 역사적 배경에만 집중한다면 2005년의 중러조약이 수 세기간 지속되었던 양국의 영토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국가가 가능한 한 이웃 국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이 자체가 공동의 이익이므로)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 이다. 

이웃 국가들 사이에 분쟁이 잦은 이유는 이들이 좋은 관계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이해 상충 또는 다른 국가로부터 지배 받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야기하는 국제적인 무질서 상태에서 발생한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인한 필연적인 안보적 딜레마 때문이다.

여느 양자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중러관계에서도 양국의 정체성과 주권 및 영토 보전 등의 핵심적 이해의 절충이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양국이 실패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타협의 방법을 깨달은 후에야 완전한 해결책이라기 보다는 까다로운 문제는 잠시 제쳐둔, 이전에 체결된 일련의 조약들로부터 도출한 일종의 성과로서 체결된 2005년의 중러조약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국가의 영토분쟁은 양국 관계에 존재했던 ‘의도적 모호함’을 해결하고 다루기 힘든 문제들은 그대로 놔둘 수 있는 방법을 양측이 깨달은 후에야 해결 될 수 있었다.  

2)장기적 관점의 필요성

실패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협의의 실패는 역사적 적대감에 기인한 불필요한 감정적인 문제가 아닌 각국의 현실정치에 대한 열망과 타국의 이익을 희생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한 여력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가 초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가 쌓여 양국이 향후 성취한 협력의 기초가 되었다. 저비스는 “정책을 판단하는 방식은 평가 대상이 되는 기간에 달려있다. 어떠한 사건에서의 결함이 장기적으로는 상호 협력의 기반이 될 수도 있다. 무질서를 규정 내리는 행위가 지니는 한가지 함의는 협력은 결함의 가능성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분석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구분 (협력과 결함의 구분)과 어떠한 행동이 협력적인 행동인가 또는 그렇지 않은 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꾸며진 경우가 아니라면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저비스에 따르면 중소 영토분쟁의 해결 과정에 존재 했던 과거의 실패는 실패라고 볼 수 없다. 1969년의 군사적 충돌과 같은 실패는 양국이 서로가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내세움으로써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이다. 단기적인 실패 (갈등)은 향후 성공 (협력)의 촉진제로 작용할 수 있다.

4. 영토분쟁의 성공적 해결을 위한 핵심요소

필자는 이념적 경쟁의 종식, 중국의 평화 지향, 양국의 호혜정책 등의 세 가지 요소 (원인이라고 칭하지는 않겠다)가 중소 영토분쟁의 해결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중국과 소련의 타협을 위한 ‘허용적 조건’으로서의 이념 갈등의 종식: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와 중국의 실용주의 - 테일러 프레이블이 말한 바와 같이 국가가 기존의 영토 분쟁을 다룰 때에는 세 가지 일반적 전략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첫 째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해결을 미루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양보하고 타협하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협박 또는 무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국가 주권을 타협한 지도자에 대한 국내의 응징과 위기가 고조될 경우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과 관련한 대가를 고려하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전략을 택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국가가 감당해야 할 대가를 상승시키는 요소는 어떠한 국가가 분쟁 상황에서 언제 그리고 왜 타협할 것인지 또는 무력을 사용할 것인지 설명해 준다.

본 논문의 목적이 이러한 이론을 시험해 보는 것은 아니지만 프레이블의 이론에는 중소 영토분쟁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데, 이념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뤼티는 그의 저서에서 중소 분열에서 이념적 갈등이 담당했던 중요한 역할을 강조했다.

공산주의와 공산국가 간의 갈등의 역사를 고려했음이 분명한 스티브 월트는 이러한 현상을 ‘같은 종류의 사람은 멀어지기 마련이다’라는 말을 통해 표현했다. 월트에 따르면 특정 유형의 이념은 결속이 아닌 갈등과 불화를 초래한다.

특히 특정 이념이 단일 권력에 복종하는 중앙 집권적 움직임일 필요로 하는 경우 역설적이게도 갈등 발생의 가능성이 상승한다. 일단 이념은 각 체제가 지니는 정당성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모든 체제가 그 타당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이념이 단일 지도자를 요구하는 경우 그 이념을 채택한 체제는 누가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따라서 그 이념에 속한 모든 체제의 권위는 동일한 노선을 택한 다른 체제에 의해 위협받을 것이다. 또한 주도적인 집단의 권위는 일반적 이념에 대한 해석에 달려있기 때문에 이념적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그러한 갈등의 정도 또한 매우 심각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경쟁자를 반역자로 몰아세우는 것이 각 집단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공산주의 이념이 지닌 분열적 성질 때문에 고르바초프의 ‘신사고’는 중-러 영토분쟁의 장기적 해결의 초석 마련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84년에 있었던 고르바초프의 의회 연설은 그가 향후 수 년간 도입할 이념과 정책에 대한 커다란 변화의 기틀이 되었다. 당시에는 그 중요성이 확실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는 연설을 통해 기본적인 ‘개혁 (페레스트로이카)’과 ‘정보공개 (글라스노스트)’의 개념을 설명했다. 중국과 (덩샤오핑 이후) 소련의 (고르바초프 이후) 실용주의 확대가 양국의 이념적 교조주의를 상당히 완화시켰기 때문에 고르바초프의 출현과 그의 ‘신사고’가 향후 전반적 중소관계의 개선을 가능케 한 조건을 조성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평화지향 - 중국의 외교정책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중국이 상당히 평화지향적이라는 것이다. 프라이블이 주장한 바와 같이 중국은 영토 분쟁을 다루는 과정에서 협조적인 방식을 택한 경우가 많아 많은 이들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행동 패턴을 보였다. 1949년부터 중국은 23 건의 영토분쟁 중 74 퍼센트에 해당하는 17건을 해결했다.

또한 그 해결 과정에서 상당 부분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고 대부분의 경우 분쟁 영토의 50 퍼센트 미만을 확보하며 분쟁을 마무리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에 대한 중국의 해결방식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중국 외교정책이 지닌 평화적 지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홍콩과 마카오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은 실지 회복주의를 추구하지 않았다. 소련과의 협의 과정에서 중국은 이전 조약의 불평등함이 인식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긴 했지만 러시아와 과거에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협의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였다.

최근 부상 중인 중국은 국제관계 전문가들 사이에서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중국과 미국 사이의 패권전쟁 (또는 예방전쟁)의 가능성을 우려한다. 그러나 에이버리 골드스타인의 분석과 같이 대만의 경우를 제외하면 중국의 행동은 공격적이라기 보다는 현상태 유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많은 경우 중국의 행동이 제도주의 이론에 보다 잘 부합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중국이 미국에 의해 유지되고 중국에 상당한 혜택을 제공하는 국제 경제무대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현재의 헤게모니에 대해 불만을 갖고 도전해 올 것인가의 여부를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볼 수 있겠다.

호혜주의와 학습: 소련의 양보와 중국의 유연성 - 중러관계의 오랜 역사를 호혜주의와 학습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양국이 점진적으로 ‘부정적 호혜주의 (메아리 효과를 수반한) 로부터 ‘긍정적 호혜주의’로 전환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567년에 두 명의 코사크 병사가 베이징에 도착해 요청했던 황제와의 만남은 거부당했다 (‘부정적’으로 시작). 17세기 중반 경 러시아는 우랄산맥과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무르 분지에 진입하여 네르친스크를 세웠다.

이들은 요새와 교역소를 설치했고 양측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인해 러시아의 중국영토 침략은 막을 수 있었지만 19세기 중반에는 중국 황제가 서구의 제국주의 침공에 의해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를 기회로 삼은 러시아는 아무리 분지에 대한 식민지배를 강화하고 네르친스크 조약에 따라 중국 해안으로 보존되던 지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아이군 조약과 베이징 조약에 힘입어 중국의 영토를 잠식해 나갔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양국 관계의 ‘부정적 호혜주의’에 부합하는 양상을 보인다.

러시아 외교관 카라한이 러시아 황제가 점령한 중국영토 모두를 일방적으로 포기한다는 소련 정부의 입장을 발표했을 때가 ‘긍정적 호혜주의’에 의한 새로운 양국관계를 시작하기 위한 적기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카라한 선언을 철회함으로써 새로운 소련정부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중국으로부터 커다란 분노를 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은 소련과 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이 동맹은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취약한 동맹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 갈등의 씨앗은 1969년의 전바오섬 사건으로 이어졌고 그 후 양국은 교전을 중단하고 현상태를 유지하기로 합의한다.

양국 사이의 논의는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1979년까지 이어졌지만 실질적인 진전을 보이지는 못했으며 중국은 여전히 과거의 불평등 조약이 그들을 옭아매고 있다고 느꼈다. 중국은 정상화를 가로막는 세 가지 문제의 해결을 요구했지만 소련은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중국과 소련의 역사는 ‘부정적 호혜주의’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은 곧 러시아에 의해 ‘긍정적 호혜주의’로 변모하게 된다.

1)1991 년 중소 국경 합의

미국과의 경쟁에 대한 소련의 부담감 - 베어섬에 대한 소련의 출입봉쇄가 1976에 철회되면서 양국관계 정상화를 위한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양자 논의는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후 중단된 상태였고 중국은 계속해서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문제 의 해결을 양국 관계 정상화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돌파구가 될 만한 해결책을 제시한 이는 고르바초프였다. 그는 일종의 해결사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전략은 세계무대에서 소련이 지닌 입지의 약화와 국익의 침해에 대한 우려에 기인한 것이었다. 1980년대 초반 미국과의 경쟁 심화로 인해 소련은 국가 유지비용을 상승시킨 경제 위기에 당면하게 되었다. 소련은 미국과의 군비경쟁과 중국과의 국경에 배치한 60만 병사의 유지비용을 부담할 여력이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소련이 지닌 입지가 더 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

중국의 요구에 부합한 소련의 타협: 탈베그 원칙의 도입과 협의의 출발점으로서의 불평등 조약 - 러시아는 교착상태에 빠진 중국과의 국경분쟁에 협력적인 접근법을 적용했고 이 분장에 대한 합의는 탈베그 원칙 이 국경 하천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베이징 조약 (1860)에 기반해야 한다는 중국측의 기본적 요구를 수용했다. 1986년 블라디보스토크 연설에서 고르바초프는 분쟁 중인 영토의 상당 부분을 중국에 양보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공식적 국경은 간천을 따라 규정될 수 있다” 라는 발언을 통해 러시아의 방향전환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중국이 발 빠르게 대응하면서 국경에 관한 논의가 수 개월 내에 재개되었다. 양측 모두 탈베그 원칙과 과거 조약의 공통 분모로부터의 합의를 모색하였고 상당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영토분쟁의 해결은 곧 러시아가 중국측 간천의 수 백 개에 이르는 하천섬에 대한 권리 (베어섬을 제외하고)를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 후에 이어진 중러관계의 ‘긍정적 호혜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과거에 카라한 (그리고 레닌)은 러시아가 침탈한 영토를 중국에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번복함으로써 중국으로부터 빈축을 샀지만 고르바초프가 택한 행보는 이와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잠정적 협정: 불일치에 대한 합의 (비협력을 위한 공조) - 양국관계의 진전은 1988년 10월의 회담에서도 이어졌다. 하천이 양국국경 동부의 대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에 탈베그 원칙을 수용함으로써 국경선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아무르와 우수리 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헤이샤쯔섬 (볼쇼이 우수리스키섬)이 난제로 떠올랐다. 양측은 파미르 산을 포함한 서쪽 국경에 대한 논의에 합의하고 이 지역에 대한 공동 연구에 착수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중국과 러시아가 1964년에 도달했던 합의를 다시 불러냈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은 국경 확정에 대한 기본적인 방침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는데 그 내용은 특정 지역과 관련하여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모든 시도가 실패했을 때에는 그 문제는 보류해 둠으로써 다른 지역에 대한 협의를 방해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보다 현명한 후세대’가 현재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고안해낼 수도 있다는 가정에 기반한 방침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결이 어려운 문제가 베어섬에 대한 영유권에서 발생했다. 소련은 이 문제가 협상 가능하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고 중국은 소련이 ‘원칙적으로는’ 베어섬을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며 유연한 반응을 보였다.

중국과 러시아는 ‘불일치에 대한 합의.’ ‘비협력에 대한 공조’의 방법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가끔은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를 한 켠에 미루어 둘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중국의 양보 후 1991년의 분쟁 종식: 문제의 보류 - 1987년 2월 양국은 일단 국경의 동부에 집중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양측의 협의가 1964년의 합의에 기초하여 재개될 것임을 암시했다. 1987년 8월, 중국과 러시아는 ‘기존의 관련 조약’에 의거하여 동부의 국경에 대한 분쟁을 마무리하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중국이 모든 분쟁 지역에 대한 총체적인 합의를 선호하여 국경 서부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높아졌던 반면, 소련은 각 지역별로 접근하는 방식을 원했다.

1989년 5월, 중국과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베이징 방문 기간 동안 양국관계를 정상화하였다. 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전에 주요 영토분쟁의 해결을 향한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양국은 국경 동부의 대부분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였고 중앙 아시아 지역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다. 4 번째 협의가 이루어졌던 1989년 10월에 중국은 모든 영토분쟁의 해결이라는 이전에 요구를 철회했는데 이는 첸치천 부총리의 1987년 발언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었다.

대신 중국은 지역에 특정되는 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중국은 분쟁 대상이 되었던 두 개의 섬을 제외시키기 위한 합의에 서명하기로 합의했다. 중소 관계의 개선을 가져올 국경 동부의 대부분에 대한 양측의 합의는 매우 의미 깊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중국측의 타협으로 합의가 도출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될 수 있었다.

1991년 5월 16일 첸치천 중국 부총리와 알렉산더 베스메르트니히 소련 외무 장관은 동부 국경에 대한 국경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규정된 동부 국경의 대부분은 아무르강, 우수리강, 아르군강의 본류 또는 중간선을 가로지른다.

중국과의 협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소련의 붕괴 - 소련의 붕괴는 앞서 언급한 협정의 발효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동부 국경에 대한 실질적인 경계확정은 1993년에 시작되었다. 분쟁 중인 섬의 할당 등 세부적인 경계 확정은 1997년 11월에 마무리 되었다. 분쟁 대상이었던 영토에 대한 권리는 양국에 거의 동등하게 배분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중국과 러시아는 분쟁 영토의 1,000 평방 킬로미터 가량을 분할하였고 최종적인 경계 확정에는 중국과 그 이웃국가 간에 체결된 국경 관련 협정 중 가장 상세한 협정을 적용하기로 하였다. 소련의 붕괴 이후 중앙 아시아 국가들이 중-소 국경의 서부에 대한 분쟁의 대부분을 이어 받았다. 이 지역에 대한 합의는 1994년 전반기에 있었던 실무진 회담을 통해 도출되었다. 9월에 첸치천과 안드레이 코지레프는 서부 국경협정에 서명했다. 이 지역에 대한 경계확정은 두 개의 경계표지 설치와 함께 1997년에 마무리 되었다.

2)2005년 중러조약

난제의 해결 - 1997년 11월 국경 협정 (1991년 5월에 체결된 협정)의 시행이 발표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동부국경 문제의 98퍼센트가 해결되었다. 이 협정에서 제외된 두 지역에 위치한 세 개 섬 (볼쇼이 우수리스키섬 (헤이샤쯔섬), 타라바로프섬 (인롱섬), 아르군강의 볼쇼이 섬)의 반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었으나 이 또한2003년 10월 14일에 개최된 중-러 정상회담을 통해 해결되었다. 양국의 영토 문제가 드디어 해결되었음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된 중국과 러시아는 매우 기뻐했다. 1991년 동부국경 협정에서 제외된 두 지역에 대한 분쟁은 199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푸틴 대통령의 방중기간 동안 푸틴과 장쩌민은 중국과 러시아가 ‘(해당 지역을) 동등하게 나누기로’ 합의했음을 명시한 동부 국경에 대한 추가적 국경협정에 서명했다.

양국의 타협에 의해 도달된 합의는 2005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결된 새로운 조약을 통해 공식화 되었다. 경계확정과 함께 전체 중소국경이 합의, 규정, 및 합법화 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우호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호혜주의와 공정성:’50:50’ 원칙과 공동 사용 - 중국과 러시아의 사례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상호 호혜주의의 패턴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양국이 엄격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50:50’ 원칙을 적용했음을 알 수 있다. 분할이 어려운 지역에 대한 협의의 과정에서 ‘공동 사용’이라는 개념이 최종적 합의의 도달에 매우 유용하게 작용했다.

푸틴과 후진타오가 모든 영토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한 ‘윈윈’ 전략을 선언한 직후 앞서 언급한 ‘3개 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도출된 과정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바로 분쟁 중인 섬의 경우 ’50:50’ 원칙에 의거하여 중국과 러시아에 각각 분할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에 중국과 러시아는 몇 개 문제지역을 제외하고 국경확정의 문제를 우호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연해주 핫산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된 접근법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접근법은 합법적인 해결책이 아닌 정치적 타협을 통해 도출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문제해결 방식은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윈윈’ 상황을 위한 정치적 효과의 창출에도 유효했다. 분쟁 영토를 ’50:50’ 원칙에 따라 분할하는 것이 꼭 그 지역을 ‘반’으로 나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50:50’ 접근법이 사실상 300 헥타르의 핫산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중-소 국경의 확정에 있어서 가장 까다로웠던 문제는 육상국경이 아닌 하천국경의 문제였다. ’50:50’ 원칙이 바로 수 천 개에 이르는 섬들은 중국과 러시아에 배분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국경에 관한 중국과 러시아의 협의 과정을 상징하는 전반적인 이미지는 공정성과 합리성이다. 분쟁의 대상이었던 국경하천의 섬들 중 다수는 러시아의 관할 하에 있었다. 러시아는 중국에 수 백 개의 섬을 양보했다. 이러한 ‘윈윈’의 이미지는 중국과 러시아의 영토분쟁에 대한 잠재적 반발과 민족주의적 감정을 억누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해, 핫산지역 문제에 적용된 접근법은 이 지역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전체 중-소 국경에 적용된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상호 수용 가능한 타협점을 찾고 양국이 획득한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투영했다. 또한 양국 모두 ’50:50’ 원칙과 ‘공동 사용’의 방식에 기초한 정치적 해결을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상호 이익을 도모할 수 있었다.

기술적으로 (합법적으로) 조정된 토대에 대한 정치적 합의의 마무리 - 중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정치적 결정에 의해 도출되었고 이는 하천국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국경하천 주변에 위치한 대부분의 섬에 대한 분할은 ‘기술적인 판단’ 하에 이루어졌다고 설명되었지만 상당 수의 경우가 정치적인 협의에 의해 해결되었다. 탈베그 원칙이 적용되었다면 중국의 영토가 되었을 몇 개의 섬이 러시아의 영토로 남아있다. 우수리강의 세레메테프스키섬을 예로 들 수 있고, 이와 반대되는 사례로는 사할린 섬이 있다. 이를 통해 러시아가 세레메테프스키섬에 대한 영유권을 유지하는 대가로 중국에 사할린 섬을 양보하는 내용의 정치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91년 국경협약의 개정과 핫산 지역에 대한 ‘윈윈’ 전략으로 이어진 ‘타협’의 정신이 우수리강에 대한 정치적 합의에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아무르강에 위치한 섬의 반환을 살펴보면 중국이 강력하게 요구했던 몇 개 섬이 여전히 러시아 영토로 남아있다. 아무르 강의 섬은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강의 주류가 어떤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섬들이 탈베그 원칙에 따른 엄격한 기술적 기준을 통해 분할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러시아와 중국은 정치적 합의를 도출함으로써 ’50:50’ 접근법에 따라 이 섬들을 나누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토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양국이 타협하고 양보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러시아가 타협과 양보를 통한 해결을 진정으로 원하고 실행했기 때문에, 그리고 중국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적절히 대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5. 결론: 한일 영토분쟁에 대한 함의

본 논문은 중러 영토분쟁의 성공적인 해결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한국과This 일본 사이의 문제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영토분쟁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였다. 물론 각각의 사례가 지닌 특성이 상이하기 때문에 한 가지 사례에서 유용했던 해결책을 그대로 다른 사례에 적용하는 것이 반드시 효과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중러 영토분쟁의 성공적인 해결 그 자체가 매우 고무적인 사건임과 동시에 현재 영토분쟁을 겪고 있는 국가에게 희망을 주는 사례임은 분명하다. 영토분쟁의 해결에 있어서 중국과 러시아가 거둔 성공은 다음과 같은 이론적 또는 정책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 중국과 러시아의 사례는 해스너가 주장한 ‘시간과 영토분쟁의 심화’에 대한 해결 불가능 이론과는 극명하게 상반되는 것으로서 정치적 리더십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양국의 과거 관계가 부정적이었다고 해서 두 국가가 미래에 맺을 관계도 부정적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둘째, 고르바초프가 증명했듯이 정치 지도자의 일방적 타협이 역사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일방적인 양보를 효과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부정적 호혜주의’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양측 모두에게 보다 큰 혜택을 안겨줄 ‘긍정적 호혜주의’로 전환시킬 수 있다.

셋째, ’50:50’ 원칙에서 나타나는 공정성이 영토문제의 해결에 중요하다. 분쟁지역을 공평하게 분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 ‘공동 사용’ 또한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넷째, 그러나 공성성의 원칙 (또는 ’50:50’ 원칙)은 기계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되며 유연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영토분쟁의 마무리는 기술적 또는 법적 해결책이 아닌 정치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섯째, 중국과 러시아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한가지 역설은 양국이 영토분쟁을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들의 분쟁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고 양국의 국경에 분쟁의 원인이 될만한 수많은 발화점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쟁 지역의 수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양국은 한국과 일본의 경우보다 쉽게 양보하고 타협할 수 있었고 양국이 ‘긍정적 호혜주의’를 성취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