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전시된 김구 선생과 윤의사 기념촬영 사진. 1932년 4월 26일 상해거류민단 사무실에서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 후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었다.[연합]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강인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인한
사랑을 따르기도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매헌 윤봉길 의사 어록 중에서-

오는 29일, 중국 상해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사살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80주년을 맞는다.

당시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할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국가보훈처는 오는 29일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 제 80주년 기념식이 중국 상해 루쉰 공원과 서울 양재동 매헌기념관에서 동시에 개최한다고 27일 밝혔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교육을 배척하여 학교를 자퇴하고, 사설서당인 오치서숙(烏致書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윤 의사는 1928년에는 부흥야학원(富興夜學院)을 설립하여 농민 자녀들을 교육했고, 1929년에는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해 농민계몽운동과 농촌부흥운동, 독서회 운동을 전개했다. ‘농민독본’이란 책도 만들어 청년들에게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배양,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펼쳤다.

윤 의사는 일제의 탄압을 받자 중국으로 망명,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거사를 자청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을 맞아 일본군이 상하이 점령 전승경축식을 상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열자 윤 의사는 이들을 향해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을 투척, 히로히토 일왕의 오른팔로 알려진 시라카와 대장 등 다수의 군 수뇌부를 사살했다.

의거 직후 윤 의사는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그 해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18일 오오사카(大阪) 육군 위수(衛戍)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교외에 있던 한 작업장에서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했다.

윤 의사의 유해는 백범 김구의 요청에 따라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되어 1946년 6월 30일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의사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서울 효창공원 윤봉길 의사 묘에서 열린 매헌 윤봉길 의사 76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연합]

한편, 27일 상해 기념식에는 정부를 대표해  권율정 보훈처 보훈심사위원장, 김달수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등 300여 명이, 서울 기념식에는 박승춘 보훈처장, 황의만 기념사업회장과 회원, 유족, 시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기념식에는 1982년부터 윤봉길의사의 부인인 고 ‘배용순’ 여사의 생전 효행과 자식 사랑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시행되는 ‘제29회 배용순 효부상’에는 치매 시어머니를 8년간 병수발한 오갑순씨 등 7명에게 수여된다.

보훈처는 “특히 이번 기념식에는 80주년을 기념하여 ‘부모형제의 사랑보다 더 굳은 나라사랑’을 강조한 의사의 가르침을 되새겨 사회통합과 나라발전에 더욱 매진하자는 대통령의 특별메시지가 전달된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충남 예산 충의사에서는 오전 10시에 예산군 주관으로 구본충 행정부지사 등 각계인사, 시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다례가 진행되며, 28일-29일 양일간 매헌윤봉길문화축제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