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은 이봉창 의사 의거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문국진)는  8일 오전 11시 백범기념관에서 '이봉창 의사 의거 8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기념식은 정양성 국가보훈처 차장, 박유철 광복회장, 김신 백범기념관장을 비롯한 독립운동관련 단체 대표와 광복회원, 일반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그린 연극 '나는 지금 희망을 던진다' 공연 후, 약사보고, 기념사업회장의 식사(式辭)에 이어 보훈처 차장ㆍ 광복회장의 기념사, 헌화, 기념공연 순으로 진행됐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기념사를 통해 "80년 전인 1932년 오늘, 의사님께서는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단행하셨습니다. 비록 의거는 실패했지만, 의사님께서는 체포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쳐습니다. 그날의 의거는 당시 침체 상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전선에 활로를 되찾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한국인의 기개와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일대 쾌거였습니다. 거사를 앞두고, 태극기 앞에서 양손에 폭탄을 들고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시던 그 거룩한 모습은, 오늘날까지 우리 후손들의 마음속에 뜨거운 나라사랑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라고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기렸다. 후손이 없는 이봉창 의사의 항일 쾌거와 애국정신을 선양하고 의사를 존경하는 뜻있는 인사들이 사단법인 이봉창의사기념사회업회를 설립해 운영한다. 이
봉창의사 관련 유물로는 독립기념관 제5전시관 (나라되찾기)에 선서문이 전시돼 있다. 

 

▲ 이봉창 의사의 선서문 <자료=독립기념관>

 

서울에서 출생한 이봉창 의사(1901.8.10.~1932.10.10.)는 1931년 1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김구 단장을 만난 후, 일본 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일왕 폭살계획을 세운 후 거사를 계획하였다.
1년 가까이 준비를 하여 1931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1931년 12월 17일 김구 단장의 전송을 받으며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동경으로 출발하였다. 12월말 동경에 도착한 이봉창 의사는 일왕 히로히토가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 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상해 김구 단장에게 전보를 보냈다.

이봉창 의사는  1월 8일 앵전문(櫻田門) 앞에서 일왕 행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왕 행렬이 나타나자 이봉창 의사는 일왕을 향해 힘차게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수류탄의 위력이 약했고 일왕에 명중하지 못해 일왕 폭살에는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정계는 크게 요동쳤으며 경호 관계자 다수가 문책당했다. 현장에서 붙잡힌 의사는 같은 해 9월 30일 동경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하셨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그 대상이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왕이었고, 거사 장소가 적의 심장부인 동경이었다는 점에서 비록 일왕 폭살에는 실패하였으나 그 의미가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침략을 본격화하였으며 1931년 7월2일 발생한 만보산(萬寶山) 사건을 크게 확대하여 한국인과 중국인의 민족간 반목을 조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봉창 의사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기관지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항일정신을 대변하였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야기된 한중 민족간 감정대립을 크게 완화하였으며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정부로부터 지대한 관심과 함께 적지 않은 경제지원도 받게 되었다.

이봉창 의사에 사형을 언도한 사실을 보도한 대판매일신문(자료=독립기념관)

이봉창 의사의 거사를 계기로 일제 강압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광복의 신념과 의지를 일깨워 침체상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전선에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였으며, 동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가 일어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김구 선생은 일본에 있던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1946년 6월 30일 국내로 봉환하여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하였다. 정부는 이봉창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