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는 '대변인 격'인 누구도, '비서 격'인 누구도 없었다. 오롯이 '박근혜' 하나였다.

 지난 한나라당 경선에서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한 박근혜 위원장은 그 뒤로 4년에 가까운 시간을 두문불출했다. 본인은 이에 대해 "불필요한 잡음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지난해 12월 한나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나서기 전까지 오랜 기간 당의 의원총회에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공식활동을 자제해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당내에는 박 위원장과 가까운 누군가를 두고 '대변인 격인 OOO 의원'이나 '비서실장 격인 OOO 의원'이 되려 언론과 정치권의 주목을 받기도 했고 박 위원장은 '불통령(소통하지 않는 대통령)'에 버금가는 '불통공주'가 되었다.

 그랬던 그가 TV에 출연했다. 뉴스도 시사토론회도 아니었다. 지난주에는 배우 최지우가 출연했고 그전에는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이 나오기도 했던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일 늦은 밤 SBS '힐링캠프'에 출연했다.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박 위원장은 시종일관 성실하게 임했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볼 만' 했고, 정치권에서 보자면, '해 볼 만' 하다는 평이다.

 예고 방송에서 '박근혜 vs 김제동'이라는 자막을 내보내고 '안철수' 'FTA(자유무역협정)' '촛불집회'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한 내용을 선보임으로써 긴장감을 고조시켰으나, 실제 방송은 그렇지 않았다. 뒷담화와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는 기존 토크쇼와 차별성을 두겠다며 만들어진 '힐링(healing)' 프로그램이니만큼 차분했고 또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점에서 박 위원장은 방송을 십분 활용했다. 방송 초반 언급된 '얼음공주' '박설(朴雪)공주'이기 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온, 막 예순을 넘긴, 한 사람이 있었다.

 '안철수'는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좋으신 교수 한 분"으로, '나꼼수(나는 꼼수다)'는 "팟캐스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풍자를 위주로 한 것"이라고 설명해내는가 하면, '부킹(클럽에서 남녀 즉석만남)'은 몰랐지만 '부비부비(클럽에서 남녀가 밀착해 추는 춤)'도 알고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개그 프로그램)'도 정확하게 설명했다. 자막에는 연신 'TV를 정말 많이 보시는 듯'이라는 문구가 나오기도 했다. 되려 대중이 대중 정치인인 '박근혜'를 '박정희의 딸' '집권 여당 대표'라는 프레임 속에 넣어두고 바라봤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방송이 정말 '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가 12살이 되던 해 청와대에 들어간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였다. 대통령의 딸로, 퍼스트레이디로 자연인 '박근혜'보다는 상징적인 무언가가 되어야 했던 박 위원장의 인생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소소한 행복이 깃든 평범한 삶을 꿈꿨었다"고 말했던 22살 모든 꿈을 접고 가슴이 뻥 뚫린 채로 어머니를 대신해 7년간 퍼스트레이디가 되어야 했던 이야기, 그 후 아버지까지 여의고 살아온 이야기까지.

 1997년 IMF로 정치에 입문했다는 박 위원장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쓰러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IMF가 아니었다면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게 정치도, 나라도 모두 부모에 대한 '효도'처럼 보였다. 여야 할 것 없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정치하는 이들이 난무한 정치권을 보고 있노라면, 박 위원장이야말로 사적인 '효(孝)'가 공적인 '국가'와 일체 되어 '공심(公心)'으로 정치를 해낼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정치 전면에 나선 박 위원장은 천막에 당사를 세우기도 했고 테러를 당하기도 했지만 "결국 한 줌, 결국 한 점으로 돌아갈 거 '아프다'고 말한다고 낫나?"라고 되물으며 "정치를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이 있으니까…"라고 답했다.

 그와 반대편에서 같은 꿈을 꾸는 또 한 사람이 다음 주 같은 시간 찾아온다. 바로 민주통합당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지는 2012년 정치인들의 TV 출연이 잦아지겠지만, 이번 박 위원장으로 인해 예능 프로그램 출연도 활발해질 것으로 점쳐진다.

 혹자는 '다 아는 이야기,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 뭐하러 또 하느냐'며 핀잔을 주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정치인들이 예능에 나와서 뭐하겠다는 거냐'며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그게 뭐가 어때서. 정치인들은 선거라는 무대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자신을 선보이고 철저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정치인들은 국회에 앉아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들 앞에서 '소통'을 논하지 마라. 2012년 소통을 원하고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