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학교 정치학과 신복룡 교수

조선말기는 세상이 어지러운 격동의 시대였다. 을사조약(1905)체결 후, 민영환이 자결하고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사건으로 물러났으며 단재(丹齋) 신채호가 황성신문 논설위원을 맡았다. 19세에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56세에 이국의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그의 신념과 궁극적 관심사는 민족의 독립이었다.

민족의 독립을 염두에 둔 단재는 중국 양계초(梁啓超)의 ‘이태리건국 삼걸전’(三傑傳)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 스페인, 프랑스로부터 공격 받고도 독립과 번영을 누리는데 비해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된 이유는 민족 통일론자가 없어서라며 영웅을 동경했다.

“嗚呼라! 어찌하면 우리 이천만의 귀에 항상 애국이란 一字가 갱장하게 할까? 曰 오로지 역사로써 할지니라… 역사가 어떤 것이건대 그 功效의 신성함이 이러한가? 曰 역사라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의 변천 소장한 실적이니 역사가 있으면 그 나라가 반드시 興하니라” 

이글은 1908년 6월 대한협회보에 발표된 신채호선생의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란 글이다.


어찌하면 이천만 동포의 귀에 항상 ‘애국’이란 말이 울려 퍼지게 할 것인가


단재는 언론계에 있는 동안 이순신전을 연재하고 을지문덕과 최영 등 영웅전을 쓰고 시(詩)와 한글을 널리 보급시키며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 잡으면 민족의 개명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암운이 더욱 짙어지고 활동도 불가능하게 되어 단재는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단재는 무저항, 비폭력의 3·1운동의 실패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관념론적인 미덕이 얼마나 허구인가 하는 허무감에 때로는 백두산을 답사하고 때로는 통구(通溝)의 광개토대왕비를 찾았다. 비문을 더듬고 발해의 기왓장을 들여다보며 우리 역사를 중국의 변방역사로 보는 지나변방사학(支那邊邦史學)을 부정한 단재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는 잃어버린 국토를 찾겠다고 발버둥치는 것보다 국사를 바로 기술하여 국혼을 회복하는 일이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당시 사람들이 부루 단군(扶婁檀君) 등 훌륭한 선조들이 있음에도 당요(唐堯)·우순(虞舜)을 더 신앙하며 당태종과 한무제는 위대한 영웅으로 알면서 광개토대왕이나 태종 등 내 조상은 보잘것없는 오랑캐로 생각했다, 양만춘(梁萬春)과 황희(黃喜)가 어느 시대 인물인지도 모르고 셰익스피어에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단재는 이것을 우리역사를 사대·곡필을 한 김부식(金富軾) 탓이라고 했다. 김부식은 압록강이 송화강임에도 현재의 압록강으로 날조하여 만주를 제외시켰고 우리의 전통을 유교화 함으로써 지나변방사(支那邊邦史)로 몰락시켰으며 사대 외교로 역사와 영토를 축소·해석함으로써 고구려의 투혼을 상실하고 역사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묘청(妙淸)의 패전은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오늘의 비극을 초래한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국권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역사가 한자(漢字)로만 기록되어 지식계층만이 볼 수 있었고, 관(官)주도로만 역사를 기술할 수 있도록 하여 사사로이 역사를 기록할 사학자가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새왕조 성립의 정당성을 세우기 위해 전대(前代) 왕조사를  악의로 은폐하여 날조하고 전통 풍습을 비하했기 때문에 우리역사는 ‘정신없는 역사’, ‘혼이 없는 역사’로 전락했다.


비문을 더듬고 발해의 기왓장을 들여다 보며 국사를 바로 잡아 국혼을 회복하고자


따라서 국혼을 회복하려면 왕조중심 기록을 탈피하고 사대주의사관에서 벗어나 서양사학을 공부한 안목에서 역사를 이해하고 우리말과 문자를 써서 역사를 기술하고 책을 만들어 어른 아이, 누구나 한번만 읽고도 알 수 있어야 우리고유의 국정을 지키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만약 국권회복이 미처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조국의 민족사를 올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로, 두고두고 자유 독립을 꿰뚫는 날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우리역사를 바로 적어야 할 역사가의 사명이 중대함을 강조하고 자신이 그 과업을 해야 하는 소명의식도 갖고 있었다.

그가 상해(上海)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짐이라고는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한 질뿐이었다는 사실이 그가 역사 기술을 통한 국혼 회복에 얼마나 몰두했던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독립을 위해 신민회, 대한협회, 광복회 상해임시정부, 군사통일촉성회, 의열단, 다물단, 아나키스트 동방연맹 등 많은 단체를 전전했던 단재는 그 시대에 한문학은 물론 원서를 읽을 정도의 영어실력과 서양의 철학사상을 꿰뚫고 있었다. 조국을 뜨겁게 사랑했던 한국인이요, 마지막 고구려인이었던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서라도 큰 나라에 가서 더 큰 시야로 세상을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