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을 가슴에 얹고 10초 정도 생각해보자. 지난 일주일 동안 무엇이 당신의 가슴을 뛰게 했는가?”

 그의 기습적인 질문에 청중들은 갸우뚱한 채로 생각에 빠졌다. '나 뭐했지?' '내 가슴이 뛴 적이 있긴 했던가?' 그리고 이어지는 한 마디.

 “늘 당신의 가슴이 뛰고 있는지 체크하라. 그것이 당신 인생을 관통하는 한 가지 질문이다.”

 

▲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47)가 지난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상명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오! 마이 청년!’ 첫 번째 청년공감 손님으로 초대되었다. 청년공감(힐링소사이어티)과 코리안스피릿가 함께 주최하고 사단법인 국학원과 국학원청년단이 후원하는 제1회 청년공감에 모인 100여 명의 청년 앞에서 펼쳐진 오 대표의 인생 이야기는 솔직했다. 그리고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의 이야기는 중학교 1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지리산 아래 50가구가 사는, 작다 못해 단출한 마을에서 자란 그는 김유정의 소설 ‘봄봄’을 읽으면서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때마침, 4년에 걸친 지난한 짝사랑을 시작했다.

 “한 사람에게 4년 동안 300통에 달하는 연애편지를 썼다. 답장은 한 통도 못 받았지만. (웃음)
 밤새 숙제하면서는 졸아도 연애편지 쓰면서 졸거나 피곤하다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느냐. 나는 연애편지를 쓰면서 ‘아, 내 인생에 이토록 뜨겁게 가슴이 뛸 때가 또 올까’하는 생각에 연애편지 한 통을 똑같이 베껴 써뒀다.” 
10대 오연호가 느꼈던 그 뜨겁던 ‘두근거림’은 지금도 그의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다. 

  그는 마을에서 첫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시작된 서울에서의 대학생활. 큰 현수막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역사와 민족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수백 통의 연애편지에 답장 한 통 못 받으며 한 사람만 애타게 기다리던 나를 ‘역사’와 ‘민족’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에 다시 그의 가슴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독재정권, 언론탄압의 시대 속에서 20대 오연호는 ‘허구’를 쓰는 소설가 대신, ‘사실’을 쓰는 기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요즘으로 치자면 대학 내내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터넷 블로그에 정권을 비판하고 한미관계 평등을 주장하는 글을 올리면서 지냈다고 했다. 대자보와 전단, 유인물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여 1년간 감옥에 가기도 했다.

 “사실을 전하면서 가슴이 뛰었는데, 감옥에 갔다 왔더니 입사할 수 있는 언론사가 없었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이 바로 월간 ‘말’ 지(誌)였다. 서슬 퍼런 언론탄압이 있던 시대에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말’ 지는 불법매체였고 나는 철저한 비주류 기자였다.”

 '말 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청년들에게 “경마잡지 아니다”라며 웃음을 자아낸 오 대표는 ‘철저한 비주류’였던 경험에서 한 가지 빛나는 보석을 찾게 된다. 바로 본질을 보고 새 판을 만드는 에너지였다.

 “95년에 내가 노근리 사건으로 엄청난 특종을 했지만, 아무도 몰라줬다. 그런데 5년 뒤 세계적으로 유명한 AP통신이 나에게서 자료를 받아 이 사건을 취재하고 그 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나는 아무것도 못 받았다. 나는 여전히 비주류 월간지의 기자였다. 그때 느꼈다. ‘이건 아니잖아!’”

 매체가 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자로서의 자존심인 특종마저 빼앗긴 그는 결심했다. 가슴 뛰는 무언가를 가진 누구든 기자가 되어 그 두근거림을 모두와 공유할 수 있는 매체를 만들겠노라. 그렇게 지금의 ‘오마이뉴스’가 탄생했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의 캐치프레이즈는 단번에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현재까지 8만 명의 시민기자가 등록하였고 그들 중 절반은 이미 한 건 이상의 기사를 썼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이들의 가슴이 움직이자 그 두근거림을 나누기 위해 기사를 쓰고 트위터를 하고 페이스북을 하면서 미디어 행위를 시작했다. 여기서 오 대표는 요즘 대두되고 있는 ‘시민정치’의 특징을 이야기했다.

 “한국 정치가 왜 시민에 의해 요동치고 있나? 너희가 안 바꾸면 우리가 바꾸겠다는 것이다.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 사람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자발적인 미디어 행위를 시작했다. 그 결과 무소속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장이 된 것이다.”

▲ 오연호 대표와 무대에 올라 함께 이야기를 나눈 청년공감-힐링소사이어티의 멤버들. 좌측부터 이예리나(글로벌사이버대·20), 사공도경(상명대·21), 구경수(상명대·21) / 사진=김새봄 희망기자

 오지 않은 미래에 인생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오 대표는 재미있게 충전되어 있을 것을 주문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즐겁게 고민하고 또 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전했다.

 “내가 철저히 비주류 매체의 기자였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KBS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있었는데 받아들였다면 그 안에서 더 높은 자리에 가려고 노력했겠지. 그런데 나는 비주류로 남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진 틀 밖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고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지금 여러분이 비주류라고,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라. 그것은 새 판을 짤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인생 최대의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