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삼 밭에 살면 산삼 귀한 줄 모른다.”고 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우리를 세계가 잃어버린 ‘왕자의 영혼’을 가졌다고 했으나 정작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중국, 일본, 이스라엘 등 강대국일수록 각자의 구심으로 ‘국학’을 세운다. 그런데 각자의 국학을 주장할수록 국민적 단결과 놀라운 파워를 발휘하지만 이웃나라와 마찰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국학은 ‘홍익’, 즉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철학으로 살리면 살릴수록 화합하고 통합하는 힘을 발휘한다. 인간이 존엄성을 가지고 자연과 조화로운 정신을 국학으로 받았으니 태어나면서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홍익정신은 고루한 것으로 치부되어 이에 대한 교육은 극히 미흡했다.

▲단군산 정상 흑성산성에서본 국학원의 모습.


우리의 국학을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교육하여 홍익철학을 21세기 대한민국의 중심철학으로 정립하기 위한 요람으로 국학원 전당이 개원한 지 7년이 넘었다. 그러나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첫 삽을 뜬 것은 1995년이었다. 당시 이 땅은 닭을 키우는 양계장이었다. 길도 차 한대 지날 수 있는 비포장 일방통행로였으며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 못산다.” 할 정도로 질퍽한 진흙탕이었다. 국학원은 왜 이곳에 자리 잡았을까?

어사 박문수의 전설과 애국충절의 혼이 깃든 곳에 터를 닦다

국학원과 독립기념관이 마주한 검은산(단군산)에는 조선시대 어사 박문수의 전설이 전해진다.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죽자 그의 묘소를 단군산에 정하였다. 이때 어느 유명한 지관이 “이곳은 2~3백년 후에는 나라에서 요긴하게 쓸 땅이며, 매일 향화가 올라갈 땅이므로 그때가면 이장(移葬)을 해야 되니 이곳에 십여 리 동쪽에 묘를 쓰라.”고 권하여 지금의 북면에 위치한 은석산(銀石山)에 묘소를 정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충무공 김시민 장군을 비롯해 유관순 열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운 석오 이동녕 선생, 청산리 전투의 명장 김좌진 장군과 철기 이범석 장군, 신간회 창립위원이며 광주학생운동을 이끈 조병옥 박사, 독립군 참모장 이장녕 선생 등을 배출한 애국혼의 고장이기도 하다. 또한 대원군의 사위인 조경호는 일본이 주는 작위와 은사금을 거절한 8명 중 한명이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천안과 아산을 둘러보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포함해 수많은 애국열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처음 국혼의 도시인 이곳에 자리 잡을 당시 일화가 있다. 당시 대기업과 경합이 붙었는데 이 땅의 주인인 처녀는 땅을 팔 생각이 없다고 거절하여 대기업은 포기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 처녀가 시집을 가게 되자 국학원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국학원을 세우려고 하늘이 노처녀를 시집보냈다고도 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독립기념관 자리를 보기위해 단군산 주위를 관찰할 때 처음에 이 땅을 염두에 두었으나 보다 넓은 땅이 필요해 지금의 독립기념관 자리를 택했다고도 전한다. 몇해 전 지관은 “독립기념관 자리는 양의 기운이 승한 곳으로 오히려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데 적합하고 국학원 자리는 음이 기운이 승한 곳으로 살아있는 인재를 양성하는데 좋다. 기가 막히게 자리 잡았다.”고 감탄했다.

장영주 국학원장(대행)은 초창기 이곳에 콘테이너 박스 두 개를 붙여 국학운동 사무국으로 사용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국학원 전당은 국학운동의 뜻에 동참한 국학회원과 민간기업의 피땀 어린 성금으로 17년 만에 결실을 이루어진 것이다.

▲단군산 전망대에서 본 국학원 모습. 청기와를 얹은 건물이 국학원이며 아래쪽으로 보이는 원형이 한민족역사문화공원이다. 국학원 오른쪽 녹색은 고려 태조 왕건이 충청도에서 가장 물 맛이 좋아 이곳에 있던 마을의 우물에서 물을 먹었다는 용연저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