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 의자왕(사극 계백)
백제가 신라와의 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의자왕이 별로 이상한 사람도 아니며 정치를 잘못한 것도 없다면, 백제가 무엇 때문에 망했을까? 그 해답으로 외교에서 실책을 저질렀기 때문에 상황이 역전되었다고 몰아가기도 한다. 신라를 지나치게 압박하여 당의 침략을 불러왔으면서도 그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 안이하여 졸지에 당(唐)이 백제를 정벌대상으로 삼게 되는 변화가 생겼다는 비판이 되겠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선 신라를 지나치게 압박했다는 점부터 의심스럽다.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악화한 근본적인 원인은 성왕 때에 신라가 백제를 배신하고 지금의 한강유역을 탈취해 간 데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이 강요한다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했다는 발상은 험악한 정복국가 시대에 배신당해 영토를 빼앗기는 꼴을 당하고도 참아야 했다는 논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동안 신라에 잃었던 지역을 되찾겠다는 정책에 간섭하는 당의 참견을, 의자왕이 끝까지 참아야 했다는 생각 역시 무리다. 의자왕은 고구려를 협공하자는 당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만 하며 실제로는 백제의 숙원사업을 추진해 나아갔다. 결과만 의식하지 않는다면, 남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그동안 신라에 잃었던 영토를 착실히 되찾아 오는 실리정책을 폈다고 좋게 평가해 줄 수도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지금까지 나온 전문가 대부분 주장은 신라와 당의 연합 때문에 백제가 망했다는 결과를 전제로 놓고 나온 ‘결과론’에 불과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백제가 침공을 당한 다음에 대응을 잘못했다는 이야기도 문제가 많다. 알려지기에는 좌평 의직(義直)과 달솔 상영(常永)의 의견이 대립하여 제대로 된 결정을 못 하는 바람에 적을 막지 못했다고 되어 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난 후, 백제군의 움직임을 보면 기습을 받고 당황해서 우왕좌왕 한 군대처럼 보이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백제 귀족들도 성충과 흥수의 말에 반대한 적도 없다. 백제 귀족들이 성충과 흥수의 대책에 반대했다는 근거로 제시되는 사료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게 하여 물의 흐름을 따라 배를 나란히 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올라오게 하여 좁은 길을 따라 말을 가지런히 할 수 없게 함과 같지 못합니다. 이때에 군사를 놓아 공격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백강과 탄현을 막지 말자는 주장 같은 건 없다. 견해 차라고 해봐야 나당연합군의 진입 자체를 막자는 점과 진입하는 과정에서 공격하자는 미세한 것뿐이다. 실제로 백제군은 백강을 막기 위하여 출동했다. 소정방이 상륙하려다 백제군을 보고 반대편 기슭으로 뱃머리를 돌렸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신라군을 막기 위해 계백의 부대가 황산벌에서 맞아 싸웠으니, 이쪽 방면에도 대책이 있기는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백제가 대책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멸망했다는 인식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잘못 알려진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계백의 부대는 방어에 실패하면 여기서 뼈를 묻자는 결사대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계백의 부대는 황산벌 전투에서 실패하면서 여기서 전멸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이 부대의 생존자가 백강 방면의 방어전에 가세한 것으로 되어 있다. 황산벌과 백강에서의 방어가 실패한 다음에도 사비 외곽에서 백제군의 매복으로 또 한 번의 전투가 더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대패를 하고 많은 희생을 치렀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후 백제가 저항할 힘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다. 세 번의 전투에서 모두 지고 사비가 포위된 다음에도 백제 왕족들은 성이 함락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조차 갖지 않는 사비 함락의 이유는 허망한 것이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로 몰려오자, 의자왕은 웅진으로 피신해 버리고, 사비의 방어를 둘째 아들 태에게 맡겼다. 이 때 태는 제멋대로 왕위에 올라버렸다. 문제는 의자왕이 손자 문사를 사비성에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문사는 이 사태를 맞이하여 문사는 이렇게 말하며 왕족들을 선동했다.

 “왕과 태자가 [성을] 나갔는데 숙부가 멋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면 우리는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왕족들이 성에 밧줄을 묶어놓고 타고 내려가 항복을 하자 이 뒤를 따르는 무리가 생겨났다. 왕이 되었던 태(泰)도 이 사태를 보고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해버렸던 것이다. 수백 년을 이어온 강국의 최후치고는 허망한 것이었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더 이상의 이야기는 불가능하다. 혹시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의자왕을 고백하다」라는 책을 참조하시면 될 것이다.  끝.

 

이희진 박사

고려대학교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 서강대학교 박사.

주요 저서 <식민사학과 한국 고대사(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