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천하관>

세상의 중심, 백제 무녕왕릉 매지권을 중심으로 

홍익정신으로 2000년이 넘는 찬란한 역사를 이루었던 단군조선의 폐관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어떤 정신과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을까?

삼국시대하면 가장 대표적인 사료가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백제편의 무녕왕 23년의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二十三年, 春二月, 王幸漢城, 命佐平因友達率沙烏等, 徵漢北州郡民年十五歲已上, 築雙峴城, 三月, 至自漢城, 夏五月, , 諡曰武寧

23년 봄 2, 왕이 한성으로 가서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 등에게 명령하여 15세 이상 되는 한수 이북 주, 군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게 하였다. 3, 왕이 한성에서 돌아왔다. 여름 5,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무녕이라 하였다.[1]

 薨 죽을()자는 제후국의 왕이 죽었을 때 쓴다. 황제가 죽었을 때는 崩()자를 쓴다. 그렇다면 백제는 스스로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여기고 있었을까?

  여기서 잠깐. 사료의 가치는 그 시대에 가까울 수록, 왜곡의 여지가 없는 것일 수록 높다. 백제의 천하관을 알아볼 때에는 백제 당시에 백제 사람이 쓴 금석문(돌이나 나무판, 혹은 쇠붙이에 글자를 새기거나 적어놓은 것)이 역사사료로 가장 큰 가치를 지닌다.

백제에 대한 사료가 많지 않았던 1972, 백제의 한 왕이었던 무녕왕의 무덤이 충남 공주읍 금성동 송산리에서 발견되었다. 학계는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매지권을 보자 살아있는 백제를 만난 듯 설레임으로 술렁거렸다. 특히 매지권에 적힌 51자 중 () 자는 그 동안 김부식의 사대사관이란 창틀로밖에 볼 수 없었던 중국의 제후국으로서의 백제의 모습과 판이하게 다른 백제를 말해주었다.

 

▲ 가운데 구멍 아래쪽에 崩(붕)자가 있다.

 

    무녕왕릉 매지권의 표면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 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登冠大墓 立志如左

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523) 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 8월 갑신일인 12일에 높으신[] 대묘(大墓)에 나아가 안장하였으니, 기록하기를 왼편과 같이 한다. (이도학, 2003)[2]

  무녕왕의 죽음을 ()이라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그 당시에는 스스로를 제후국이라 여기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고 황제의 격에 맞는 죽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만큼 백제의 국력이 강성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역사책이나 사료를 볼 때는 무엇보다 누가 썼는가가 중요하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따라 중요하게 보는 부분도 따르고 평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김부식이 쓴 책이다. 김부식은 불교의 승려였고 유교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았다. 고려시대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황제국, 고려는 제후국이었기에 김부식은 백제 무녕왕의 죽음을 ()이라 표현한 것이다. 역사서를 읽을 때, 저술자의 중심가치와 배경을 알고 그 안에 담긴 사상과 의도를 읽어내는 것, 주체적이고 균형잡힌 역사의식을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세이다. 


[1] <삼국사기> 권 제 26 백제본기 제4 무녕왕 23 www.krpia.co.kr )

[2] <살아있는 백제사> 휴머니스트(2003). 이도학. 57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