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추석은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명절이다. 한가위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1(卷第一) 신라본기(新羅本紀)제1(第一) 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 9년 춘삼월조에 나온다. 서력으로 말하면 32년에 해당한다. 

"왕이 육부를 모두 정하고 이를 둘로 갈라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게 했다.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큰 부(部)의 뜰에 모여 마포(麻布)를 짜고 밤 10시에 파했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가려 진 편에서는 술과 음식을 내어 이긴 편에 사례했다. 이에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으니 이를 가배(嘉俳)라 불렀다.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고 읊조려  '회소(會蘇) 회소'라 하니 그 소리가 애처롭고도 우아했다. 후세 사람들이 그 소리로 노래를 만들어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했다. "(王旣定六部中分爲二使王女二人各率部内女子分朋造黨自秋七月旣望每日早集大部之績麻乙夜而罷至八月十五日考其功之多小負者置酒食以謝勝者於是歌舞百戱 皆作謂之嘉俳是時負家一女子起舞嘆曰㑹蘇㑹蘇其音哀雅後人因其聲而作歌名㑹蘇曲)
  가배는 한가위라는 뜻이다. 지금 8월 보름 명절인 추석(秋夕)이 여기에서 유래했고 '가위'는 '가배'에서 전래된 것이다.

 신라인들은 이 풍속을 외국에 나가서도 즐기니 이방인들 눈에 기이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서기 838~847년 당(唐)에 유학하여 신라 절에 머물던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권 제2에는 "절에서 밀가루로 떡을 만들고 떡 등을 마련하여 8월 보름 명절을 지냈다. 이 명절은 다른 나라에는 없고 오직 신라에만 있다....온갖 음식을 마련하고 가무와 음악을 연주하며 밤낮으로 이어져 3일 만에 끝이 난다. 지금 이 산원에서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오늘 명절을 지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엔닌은 839년 8월15일 추석을 신라 절에서 보냈다.
신라 여인들이 적마대회(績麻大會)를 했다면 남자들은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지만 『수서(隋書)』신라전(新羅傳)에 "8월15일에 잔치를 베풀고 관리들에게 활을 쏘게 하여 마포를 상으로 주었다(至八月十五日 設樂 令官人射 賞以馬布)"라는 내용이 있다. 또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에 "8월 보름에 큰 잔치를 베풀고 관리들에게 활을 쏘게 했다(八月望日 大宴賚官吏 射)"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서 비롯된 한가위가 이후로 가장 중요한 명절이 되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나 김매순(金邁淳)이 펴낸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추석에 대한 기록이 모두 있다.
"가위란 명칭은 신라에서 비롯되었다. 이 달에는 만물이 다 성숙하고 중추는 또한 가절(佳節)이라고 하므로 민간에서는 이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아무리 벽촌의 가난한 집안에서도 예에 따라 모두 쌀로 술을 빚고 닭을 잡아 찬도 만들며 또 온갖 과일을 풍성하게 차려 놓는다. 그래서 말하기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 같기만 바란다'고 한다.
사대부의 집에서는 설날, 한식, 중추, 동지의 네 명일에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설날과 동지에는 혹 안 지내기도 하였으나 한식과 중추에는 성대히 지낸다. 그러나 한식보다 중추에 더 풍성하게 지낸다. "(『열양세시기』의 8월 중추 조).

2000년 전에 시작된 명절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추석(秋夕)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중국 『예기(禮記)』의 '춘조일 추석월'(春朝日 秋夕月)'에서 왔다는 설은 맞지 않다. 『예기』에는 이 말이 없고 『대대례(大戴禮)』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삼대(하ㆍ은ㆍ주나라)의 예에 천자는 봄날 아침에 해에게 제사를 지내고 가을날 저녁에 달에게 제사를 지낸다. 해에게 하는 제사는 동단에서 하고 달에게 하는 제사는 서단에서 한다.(三代之禮, 天子春朝朝日, 秋暮夕月, 祭日東壇, 祭月西壇)" 여기서 조(朝)와 석(夕)은 배례(拜禮)를 말한다. 천자가 해와 달에 제사지내는 것을 말하니 추석하고는 거리가 멀다.

  중국에서는 이날을 중추절(仲秋節)이라 한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서 가을을 맹추(孟秋)ㆍ중추(仲秋)ㆍ계추(季秋)로 나누고 8월을 중추지월(仲秋之月)이라 한데서 나온 것이다. 월령의 기록은 주로 농사에 관한 것이고 명절로서 중추절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니었다.

중추절에 달구경을 하는 풍속은 한참 뒤 당나라 때 생겨났다. 당(唐) 현종(玄宗) 때 기록인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는 "중추 저녁에 현종이 양귀비와 장안(長安)의 건장궁(建章宮) 태액지(太液池)에서 달맞이를 했는데 이를 관민들이 모방하면서 중추절에 달을 감상하는 습속이 생겼다."는 기록이 있다.
 구양첨(歐陽詹, 785~ 약 827年)의 '장안완월시서'(長安玩月詩序)에 "8월 가을 계절이  처음과 끝 중간이다. 15일 밤은 또 한달의 중간이다. 천도에 머무르니 덥고 추운 것이 고르다. 월수를 취하여 달이 둥글어 중추라 한다(八月于秋 季始孟終 十五于夜 又月云中. 稽于天道,則寒暑均,取于月數,則蟾魂圓,故曰中秋)"라는 내용이다. 음력 8월15일은 달이 밝고 둥글어 "단원절(團圓節)"이라고 하기도 했다.
 

  중추절이 성대하게 된 것은 북송(北宋) 이후로 보이는데 남송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권8에는 그런 기록이 남아 있다. "매년 중추절이 되면 북송의 수도였던 동경(東京: 지금의 개봉(開封))의 모든 주루(酒樓)는 알록달록하게 장식을 새롭게 하고, 그 해 자랑할 만한 새 술을 처음으로 내놓고 팔았다. 과일가게는 신선한 과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손님을 끌었다. 모든 고관들과 부자 집에서는 자신의 누대(樓臺)와 정사에 올라 달구경을 하며 새벽까지 악기를 연주하고 즐겼다. 일반 백성들도 다투어 주루(酒樓)에 달려가 달구경을 하며 새벽까지 그 흥을 즐겼다." 
 

  중추절이라는 명칭은 남송(南宋) 사람 오자목(吳自牧) 『몽양록(夢梁錄)』권4에 나온다. "8월14일을 중추절이라고 하는데 이날은 삼추(맹추, 중추, 계추)의 절반에 다다르기 때문에 중추라 한다. 이날 밤 달빛이 평상시보다 배로 밝아 월석(月夕)이라 한다.(八月十五日中秋節,此日三秋恰半,故謂之中秋 此夜月色倍明于常時,又謂之月夕). "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 지금의 杭州)에서는 8월15일에 잔치를 열고 달 구경에 새벽까지 도시가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