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한민족역사문화공원에서 단기4343년 음력 개천대제를 올리는 모습.

 

개천절은 최초의 인간공동체인 신시를 열고 첫 국가 고조선을 건설한 사실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국경일이라는 의미를 전한다. 고대 제천행사 풍습과 민간의 추수감사축제 풍습과 연관되었다. 민간에서 수확의 계절인 10월을 상달(上月)이라 중시해왔고 3이라는 숫자를 길한 수(吉數)로 여겨 신성시해온 전통이 개천절의 유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개천절이 국경일로 처음 제정된 것은 1919년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더불어 음력 10월 3일을 국경일로 제정하여 대황조성탄절이자 건국기원일이라 하여 공식적인 정부차원에서 축하식을 거행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53호’를 공포하여 개천절을 ‘국가에 경사로운 날’ 4대 국경일 중 하나로 지정하였다. 당시 국회 임시회의 속기록을 보면 이 과정에 반대여론은 거의 없었다. 다만 날짜에 대해 음력으로 하자는 의견이 제기 되었다가 그 상징적인 의의만 존중하고 날짜는 보편화된 양력 10월 3일로 하자는 주장이 채택되었다. 개천절 지정에 대해 반대여론이 없었던 것은 1920년대 이후 개천절을 중시하는 일반적인 인식이 국민사이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개천절을 기념해왔을까?

고조선을 비롯해 부여의 영고, 삼한의 천군, 고구려의 동맹. 백제의 교천, 신라와 고려의 연등, 팔관회 등 10월에 하늘에 천제를 지낸 역사 기록을 통해 수천 년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에서도 단군관련 제례일을 꾸준히 지켜왔다. 옛 고려가 하던 대로 첨성단에서 소격서 주관 하에 초제를 지내고 초기에는 평양의 단군묘, 단군사, 구월산의 삼성사, 강화도 마니산에서 국가차원의 제례를 지냈다고 한다.

‘개천절’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은 대종교가 처음인 듯하다. 1904년 백봉중심의 단군교단에서 발표한 <단군교 표명서>에 10월 3일을 ‘단군이 나라를 열고 가르침을 세운 경축일’로 거론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선생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고 1910년 9월 교명으로 의식규례를 개정하며 ‘개천절’이라는 이름으로 공포했다.

1920년대 들어와 개천절이란 이름은 언론에서도 사용하였는데 동아일보는 개천절을 ‘조선사람 마음에 가장 중요한 날’ (1925, 11. 18) ‘전민적(全民的) 명절’(1926. 11. 7) 이라 하여 논설을 냈다. 정인보 안재홍 최남선 등은 논설에서 개천절을 ‘조선국의 탄생일이자 조선민족의 생활과 문화의 탄생일, 그리고 민족 이상(理想)의 발단일’로 의미를 부여했다.

개천절은 일본 강점기 아래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는 물론 민간에서도 종교나 계층 사상과 관계없이 중요한 날이었다. 한민족의 민족적 정체성과 자주독립 의지를 고취시킨다고 하여 일제 식민당국의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에서는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하는데 아무런 여론의 반대가 없었던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1960년대까지 국가적인 행사로 성대하게 치러지던 개천절은 일부 개신교에서 단군을 종교차원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배척하거나 공휴일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폐지 논의가 나오는 등 수난을 겪고 있다. 현재 정부가 치르는 개천절 공식행사에도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으며 단순한 공휴일이라는 인식이 퍼져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국학신문 9월 60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