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의 유품에서 발견된 한 장의 단군 영정 사진.

36년간 일제에 맞서 대일항쟁을 벌였던 독립운동가들에게 2000 년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조선을 건국한 단군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 대종교 총본사
이러한 질문을 안고 지난 13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자리한 대종교 총본사를 찾았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단군과 대일항쟁 그 중심에 홍암 나철이 중광한 ‘대종교(大倧敎)’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종교 총본사에 가려면 서울 지하철 3호선을 타고 홍제역에서 내려 11번 마을버스를 타야 했다. 간호전문대학교 정문에 내렸더니 때마침 내려와 준 대종교 관계자의 차를 타고 총본사를 오를 수 있었다.

환인, 환웅, 단군 삼신일체의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대종교의 총본사는 중광한지 102년이 되었지만 80년대 홍은동에 터를 잡고 세워진 건물 그대로였다.

▲ 왼쪽부터 3대 단애 윤세복 종사, 1대 나철 대종사, 2대 무원 김교헌 종사가 있다. 네번째 백포 서일 종사는 나철 대종사와 정신적 사제 관계였다고 한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대종교 학술 담당자가 두 손 가득히 오래된 책들을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바로 그곳에 독립운동가의 유품에서 나온 단군영정 사진과 똑같은 사진이 있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신건식(申健植) 선생님의 집에서 유품으로 나온 단군 영정을 직접 봤어요. 이 정도 크기인 것 같아요. 당시에 직접 품에 가지고 다니기에는 큰 것 같고, 집에 모셔두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독립운동가의 유품에서 발견된 '단군영정'

그리고 또 한가지 명부를 보여주었다. 그곳에 낯익은 이름이 들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곳에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이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단재 신채호 선생 외에도 백암 박은식 선생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대종교가 중광된지 불과 5~6년 만에 20만 명의 신도 수를 확보할만큼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유로 대종교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가 그동안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지적도 하였다.

▲ 단재 신채호 선생의 대종교 입교 자료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부터 언론과 사회 모든 분야에서 불기 시작한 단군숭봉운동이었다.

나철은 당대 최고의 정치적 거목 김윤식의 제자이자 유학자로서 을사오적 처단과 대일 외교 등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일 외교 등의 정치적인 방법이 모두 실패하자,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존재한다)’의 가치를 통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단군정신’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1909년 1월 15일, 하늘에 천제를 올리고 중광한 대종교는 당시 전국적으로 불기 시작한 단군숭봉운동에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건너가 학교를 세우고 단군의 정신으로 대일항쟁을 이끌었던 대종교 3대 종사의 묘는 이역만리 중국에서 찾는 후손도 없이 쓸쓸히 모셔져 있다. 추모비만 총본사에 세워져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갔다.

해방을 맞이한 지 66주년이 되는 오늘, 일본과 중국 등의 역사와 문화적 침탈 속에 새로운 한민족의 정신적 구심으로서 '단군 정신'이 단기연호부활운동에서 다시 살아나야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