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운동시민연합이 기획한 고구려, 고조선 역사탐방단은 지난 8월 17일 출발해  만리장성의 동단 산해관이 있는 조양에 도착했다. 갈석산이 있는 수암사 앞에서.

우리가 늘 말하는 고조선의 발상지와 웅대한 고구려의 기상을 회상해보는 역사 탐방에 참여하였다. 국학운동시민연합 주최로 지난 8월 17일 6박 7일 일정으로 35명의 일행과 함께 고조선의 서쪽 경계에서 유적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우리들의 여정은 천진 공항에 내려 육로로 북상하면서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인 산해관 서북지역 고조선 시대의 유적지인 조양(朝陽)을 거처 고구려의 발상지역인 환인 집안을 향해 가슴 벅찬 옛 선조의 강역을 두루 살피게 되었다.

광복 후에도 제대로 된 고대사는 볼 수 없고 수없이 많은 유적과 유훈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역사 훼손에서 바른 역사를 복원해 가는 노력조차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개탄하면서 역사의 현장, 조상의 숨결이 느껴지는 고조선의 강역에 들어가는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천진에서 진황도 산해관에 이르는 길들은 잘 정리 되어 있어 끝없는 옥수수밭 평원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드디어 난하에 도착했다. 이곳이 경계로 좁아 보이지만 홍수 때에는 넓은 강바닥을 뒤덮는 델타(삼각주) 모습이다. 난하는 하북성(河北省) 북부 몽골고원 남부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연산산맥을 가로질러 하북평야를 거쳐 발해만으로 들어간다.

난하의 감격은 기존 역사관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넓은 고조선의 ‘서쪽 경계’라는데 있다. 이를 설정하는 학자들이 늘어가고 부족한 문서유적보다 발굴되는 유물에 따라 그 범위가 획정 될 수도 있다. 더욱이 당시의 지명이나 강 이름이 지금의 이름과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특히 “국경지역이 패수(狽水)”라는 기록 등 혼란스런 경우가 있으나 여러 기록을 살펴볼 때, 패수는 한반도 안의 강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난하의 흥분은 창려현의 갈석산(碣石山)에서 재현되었다. 주봉인 선태산(仙台山)은 해발 696m로 평지에 솟은 산으로는 작은 산이 아니다. 발해와 15km 떨어진 곳에 연산산맥의 한 자락으로 솟아오른 한 덩어리의 거대한 바위산이다.
아래로는 수암사(水岩寺)를 품고 있으나 꼭대기에는 군사시설로 보이는 구조물이 있다. 수암사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입구에 있는 거창한 콘크리트 건축물들은 중국 특유의 ‘만들어가는’역사 유적을 떠올리게 했다. 기원전 3세기 동방을 순행하던 진시황이 갈석산에 올라 갈석문이라고 새긴 이래 아홉 명의 황제가 천고의 수수께끼를 풀려 했던(九帝登臨 千古之迷何解) 신비로운 산이다.

구제(九帝) 중에는 조조(曺操)가 요서지역을 공격하고 개선하는 길에 이 산에 올라 ‘관창해보출하문행(觀滄海步出夏門行)’이란 시조를 남겼다. 1950년에 모택동이 이곳에 올라 새겨 놓은 시구도 볼 수 있었다.
갈석산 중턱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왜 우리가 숨 가쁘게 이곳에 섰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모택동의 시비(詩碑) 그리고 진시황의 순행 때문인가? 왜 고대의 아홉 제왕과 현대의 모택동이 왜 이곳에 올랐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바다와 산으로 구획된 국경지대를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에서 그들의 국가 전략을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삼스럽게 고조선의 국경 그리고 시황제로 시작되는 역대 한족과의 경계임이 점점 분명해지는 곳에 온 것 같다.
난하가 고조선의 남서(西南) 국경이라 해도 요수, 난하, 패수 등의 영역이 규명되어야 한다. “강은 바뀌어도 산은 바뀌지 않지만 그 이름이 바뀐다.”는 사가(史家)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 목적지인 산해관(山海關)을 향해 당산 톨게이트를 나오면서 많은 차량을 뚫고 지나와야 했다. 객차로와 화차로의 출구비율이 2:10인 고속도로를 지나오면서 중국의 물류 물동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갈석에서 30km 지점의 피서지로 유명한 북대하(北載河)를 지나온 것도 새삼스런 감회였다. 북경에서 250km 지점의 이 도시는 중국의 최고위층인 전·현 국가주석을 비롯한 주요직 권력층이 모여 일 년에 한두 번씩 공부하는 곳으로 알려졌다. 준비된 중요 자료로 토의하고 지도자를 간택하는 일도 한다. 오늘날 중국 지도층의 선발방식은 경쟁적이라는 점에서 중국식 민주주의의 일면을 보는 것 같다. (11월호 국학신문 연재 계속)

글 : 박상은  전 여신금융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