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소 명예교수.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명예총장.

『환단고기』에는 치우천황의 중원 정벌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치우는 14대 환웅이며 헌원(黃帝)을 정벌하여 굴복시킨 천하무적의 군신軍神이었다. 환웅의 나라 신시를 역사적 사실로 입증해주는 기록이 우리 기록이 아니라 중국의 기록, 사마천의『사기』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삼국사기』에도 백제와 고구려가 중국을 정벌한 역사가 최치원의 입을 빌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그 전성기에 강병 1백만으로 남중국의 오와 월(吳越)을 정벌하고 북으로는 산동 반도의 제와 노(齊魯) 나라를 정벌하였다.”(삼국사기 열전 제6 최치원)
감히 소국이 대국을 침략한 것이다. 중국이 우리를 침략한 역사만 기록하고 우리가 중국을 침략한 역사는 기록하지 않고 삭제하는 것이 사대주의 국사인데 우리가 중국을 침략했다는 위의『삼국사기』기록은 이례적이었다. 위의 기록이 거짓말이 아니란 사실은 중국의 여러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부여인은 활과 창칼로 무기를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를 준비하고 있다.” “옥저와 예맥인은 매우 씩씩하고 보전에 능하다.” “삼한 사람들은 성질이 몹시 강인하고 용맹하다. 유사시에 대비하여 성곽을 쌓아 놓고 늘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적이 침략해 오면 모든 벼슬아치들이 스스로 나아가 싸운다. 백성들은 후방에서 군량을 날라 병사들을 먹였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우리 조상이 쓰던 태초의 활을 단궁檀弓이라 한다. 단군이 만들고 단군이 쏘던 활이라 백발백중이었고 그 이름을 단궁이라 한 것인데 후에 맥궁貊弓이라 하였고 유효 사거리(弓力)가 1천보에 달하는 무기로 지금의 미사일이나 다름없는 무기였다.

화살촉에 독약이 묻혀 있어 맞으면 반드시 죽거나 병들어 3년 뒤에 죽는다고 하였다. 당태종은 고구려의 이 화살을 맞아 3년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 뒤 맥궁은 각궁角弓이 되고 다시 국궁國弓이 되어 오늘날 한국양궁의 실력이 되어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글 배우기를 좋아하고 보통 사람의 집에서도 글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고 길거리에 서당을 지어놓고 자제들을 보내 글 읽기와 활쏘기를 배우게(誦經習射) 했다.” 권근權近은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는 무강武强을 숭상하고 고려 때 요遼와 금金과 국경을 접하여 그 풍속이 사납고 굳세었다. 늘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외적에 대비하더니 마침내 수당隋唐의 대군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는 나라가 되었으니 고구려인의 날래고 굳셈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송나라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고려의 군사지원을 요청하였을 때 일행들 중에 서긍徐兢이라는 화가가 있어 『고려도경』을 썼다. 거기에 보면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아침에 일어나 담 너머 길에 지나가는 고려인을 보니 남녀 모두가 걸어가지 않고 달려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만디의 나라 중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또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구려에 조의선인皁衣先人이라는 특수부대가 있었다는 것이며 그 부대가 고려에도 계승되었다고 기록해주고 있다. 조의선인이 입은 조의는 임금이 하사한 영광의 옷이었다.

선인은 평소 머리를 깎고 맨발로 다니며 검은 옷을 입었는데 임금이 하사한 옷이었다. 전쟁이 났다하면 무장을 하고 싸움터에 나아가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싸웠다. 고려가 거란의 외침을 받았으나 물리친 것은 그들의 힘이었다. 또 몽고의 침략을 물리친 것도 그들의 힘이었던 것이다.

신라에 화랑부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고구려의 선인이나 신라의 화랑은 모두 무사들이었다. 직업군이요 상비군이었다. 무사는 고려 때까지 살아있었고 한 때는 정권을 잡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를 망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무반을 문반보다 못한 신분으로 격하하여 무사가 말을 타고 지나가면 모두가 웃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쳐들어 왔으나 막는 군사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이후 전국에 남은 성터가 2,000이 넘었고 지금 동북삼성에는 당나라와 싸워 이긴 고구려의 산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환단고기』에는 치우가 중원을 정벌하고 황제와 싸워 이긴 사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학자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지 않았다 하여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당나라 장수의 이름만 나오고 고구려의 장수 이름은 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중국사서만 읽고 썼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어느 나라 사서인가.

광개토대왕은 18세에 등극하여 바다를 건너 왜의 九州 熊本城을 공격하여 여러 나라를 다스렸다. 그밖에도 장수왕, 평강왕, 영양왕이 왜와 중국을 공격하고 수와 당의 침략을 무찔렀다. 중국에는 수많은 고려진高麗鎭을 건설하여 전진 기지로 삼았고 중국을 식민통치하였다. (고구려 본기 제6)

발해의 본시 국명은 대진국大震國이었고 상경용천부 동경용원부 등 오경五京을 두어 태학을 두고 천경과 신고를 가르쳤고 홍익인간 하였다. (대진국본기 제7)

우리나라에는 마을마다 사정射亭(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이 있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궁력을 길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사정이 유생들이 시가를 읊조리며 술을 마시는 향락 터가 되었다.